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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독서>의 목수정 작가 글이나 사진으로 본 이미지 때문에 조금 '쫄아서' 만났는데, 의외로 쾌활하고 다감하심. 목수정 작가/김정근 기자 재불작가 목수정(44)은 8살짜리 딸 칼리와 함께 경향신문사 인터뷰실에 도착했다. 목수정은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방학을 맞아 엄마의 나라 한국에 온 칼리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인터뷰 내내 얌전히 앉아 있었다. 전날 밤 열린 독자와의 만남 행사에서는 엄마의 책에 사인까지 함께 하며 판매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인터뷰실에서 목수정의 일과 삶은 섞여들었다. 그의 독서 편력도 마찬가지다. 3년만에 낸 신간 (생각정원)에는 목수정이 “30여년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읽었던 책들 가운데 근본을 뒤흔드는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고 여긴 17권이 담겨있다. 그러나 목수정의 책 이야기.. 더보기
'충성'의 가치를 다시 보기, <위험한 충성> 위험한 충성에릭 펠턴 지음·윤영삼 옮김/문학동네/304쪽/1만5000원 여러 단계로 구성된 단테의 속 지옥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큰 죄인을 가둔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아홉 번째 지옥에는 불충한 자들이 모여있다.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 예수를 배반한 유다 등이 이곳에서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사탄의 이빨에 영원히 물어뜯긴다. 그러나 군대에서 거수경례할 때를 제외한다면, 이제 ‘충성’(loyalty)을 이야기한다는 건 고풍스러움을 넘어 촌스럽게 들린다. 텔레비전 사극에서조차 ‘퓨전 사극’ 바람 때문인지 군주에 대한 신하의 충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아직 충성을 언급하는 세력이 있긴 하다. 우선 ‘국가에 대한 충성’이다. 한국에는 태극기를 들고 시청앞 광장을 점유하는 어르신들이 있고, 미국에서는 2001년.. 더보기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이상적인 젊은이가 거친 시대와 대결해 패하고 절망하고 타락하는 이야기는 숱하다. 난 영화 부터 떠오른다. 그러나 난 한국에서 만든 영화 보다 스페인에서 나온 만화 (길찾기)에 더 공감했다. 왜 그랬을까. 이 만화에 대해 덧붙일 말은 많지 많다. 작가가 자기 아버지의 일생을 사실적으로 옮긴 이 만화는 그 자체로 완결적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줄거리, 아니 주인공 안토니오의 삶을 간략하게 옮기는 것만으로도 이 만화에 대한 좋은 소개가 되리라 생각한다. 안토니오는 2001년 5월 4일 90세의 나이로 양로원에서 자살했다. 동료와 복지사의 눈을 피해 교묘하게 건물 꼭대기로 올랐다. 안토니오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장면에서 만화는 안토니오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오른다. 그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탐욕스럽.. 더보기
외로우면 아프다?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존 카치오포, 윌리엄 패트릭 지음·이원기 옮김/민음사/400쪽/2만2000원 영화 의 주인공 척(톰 행크스)은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국제 택배회사의 직원이다. 해외출장중 비행기 사고를 당한 그는 무인도에 표류한다. 다행히도 비행기에 싣고 가던 화물들이 무인도의 해안으로 떠밀려왔다. 척은 이 화물들을 이용해 무인도에서의 생존법을 익혀나간다. 그런데 수많은 화물 중에서도 척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은 평범한 배구공 하나였다. 척은 제조사의 이름을 따 배구공에게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친구로 삼는다. 자신의 손에서 흐른 피로 배구공 표면에 눈, 코, 입을 그리고, 마른 풀잎 같은 것을 머리카락처럼 꽂아놓는다. 척은 윌슨이라는 ‘친구’ 덕에 절망적인 무인도 생활을 견딜 수 있었.. 더보기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전후라는 이데올로기>의 고영란 인터뷰 (현실문화)는 혼란스럽다. 여러 분야에서 분명했던 사고의 경계선을 흐트러뜨리기 때문이다. 누가 억압했고 누가 억압당했는지, 누가 전쟁하자 했고 누가 평화를 주장했는지, 누가 친일파이고 누가 반일파였는지, 알 수가 없다. 저자인 고영란 니혼대 국문학과 교수(45)의 의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e메일로 만난 그는 “역사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을만큼 간단 명료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는 일본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 집단기억의 프레임을 검토한다. 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로서 이웃 나라들을 침범했던 일본은 미국의 점령기 동안 ‘평화로운 일본’, ‘약한 일본’, ‘피지배자’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이를 위해 20세기 초반 일본의 진보적 사상가, 문학자들의 글을 소환한 뒤 ‘세계 평화’의 표상으로 .. 더보기
유머와 자학, 서민 교수 인터뷰 좋은 과학책을 읽으면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가끔은 인생의 지혜를 배우기도 한다. 그런데 과학책을 읽으며 웃기는 정말 힘들다. (을유문화사)은 이 힘든 과제에 도전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렇다고 마냥 웃기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박멸된 것처럼 여겨져 좀처럼 대중의 화제에 오르지 않는 기생충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저자인 서민 단국대 교수(46)는 알만한 사람에겐 알려진 유명인사다. 신랄하고 기발하고 유머 넘치는 정치·사회 풍자 칼럼으로 강력한 팬덤을 누리고 있으며, 여세를 몰아 MBC TV 에도 고정 출연중이다. 서민은 “앉아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기생충, 기생충’ 하면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탄생한 ‘스타 과학자’다. 자신의 신간 을 들.. 더보기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왜 그랬을까, <미완의 파시즘> 미완의 파시즘가타야마 모리히데 지음·김석근 옮김/가람기획/400쪽/2만5000원 일본의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1886~1968)가 그린 세로 193.5㎝, 가로 259.5㎝의 대작 ‘아쓰시마 옥쇄’는 1943년 ‘결전미술전’에 출품됐다. 그림은 누가 일본군인지 미군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할 수 없는 거대한 혼돈의 전장을 묘사한다. 작품이 그려진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으로 돌진한 일본군의 용맹을 칭송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듯 하다. 반면 전장의 모습이 끔찍하게 묘사된 것을 보면 전쟁을 반대하는 그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후지타 쓰구하루의 '아쓰시마 옥쇄' 그림의 배경은 1943년 5월 29일 밤에서 30일 새벽 사이, 알류산 열도 서쪽 끝의 애투 섬(일본에게는 아쓰시마)에서.. 더보기
하루키의 여자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일본 출장 기간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를 다 읽었다. 그리고 귀국하는 길 나리타 공항의 22번 게이트 앞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쓴다. (음...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쿨하고 고독한 도시 남자 같군. 그래도 여기선 인터넷에 연결할 수 없어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나중 일) 하루키(사실 성으로 사람을 표시하는 관습을 따르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라카미'라고 해야 하지만, 그리고 기사라면 그렇게 쓰겠지만, 여기는 블로그이고, 한국에서는 왜그런지 하루키라고 표기하고 있어, 그냥 하루키로 씀)의 꾸준한 독자는 아니었다. 남들이 그렇듯이 (로 알려진 시절의) 을 읽었고, 몇 편의 단편집을 읽었고, 에세이는 읽다 말았고, 몇 년 전 를 읽었다. 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3권이 나왔을 때 구해보지는 않았다. 그저 .. 더보기
김우창, 가라타니 고진의 '동아시아 문명의 보편성' 대담 전문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75)와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71)은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의 거인이다. 30여년전 미국에서 처음 만나 오랜 친분을 맺어온 두 사상가가 ‘2013 도쿄국제도서전’이 열리는 도쿄 빅사이트에서 3일 다시 만났다. 가라타니는 이날 대담을 앞두고 김우창 교수에게 미리 서한을 보냈다. 한국은 통일신라, 일본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각자 중국화를 진행했지만 그 양상은 달랐다. 한국이 ‘민심은 천명’이라는 맹자의 왕도사상을 받아들인 반면 일본에서는 민심을 챙긴다든가 공개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관습이 없었다. 이런 전통은 한국에서 시위가 자주 일어나지만, 일본에서는 시위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현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논의였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한 답으로 대담을 시작했다. 가.. 더보기
'진보적 예술'에 침을 뱉어라, <모래그릇> 마쓰모토 세이초의 을 읽어 나갈 때의 첫 느낌은 '의뭉스럽다'는 것이다. 직전에 정유정의 소설을 읽어서 더욱 대비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쓰모토는 사건을 진행시키다가 뜬금없이 엉뚱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고, 또 사건과는 별 상관도 없는 듯한 등장인물들의 구체적인 일상을 슬며시 보여준다. 살펴보니 은 1960년 5월 17일~1961년 4월20일 요미우리 석간신문에 연재된 소설이라고 하는데, 신문 연재소설의 느릿한 호흡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난 신문 연재소설보다는 일일 드라마를 떠올렸다. 정유정의 소설이 2시간 안에 승부를 보는 장편 극영화라면, 마쓰모토의 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중심 인물, 주변 인물 모두를 조금씩 풀어나가는, 그러다가 극의 완결성과는 상관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들.. 더보기
재활용품으로 본 도시 생활, <도시의 쓰레기 탐색자> 도시의 쓰레기 탐색자제프 페럴 지음·김영배 옮김/시대의창/360쪽/1만8000원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날짜에 분리수거를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며칠간 머문 휴양지에서 돌아오는 날 직접 청소를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버리는지. 한국보다 생활 수준이 높고 소비 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더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쓰레기가 정말 쓰레기일까. 보는 사람에 따라 쓰레기는 보배가 된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 싼값에 충동적으로 구매한 여름용 원피스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치자. 두어 번 입어보길 시도하다가 끝내 포기하고 버린다. 이제 그 옷은 그에게 분명 쓰레기다. 그러나 이 옷이 어울리는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는 이번 여름 휴가지에서 멋진 원피스를 입고 시선을.. 더보기
작가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기, <28> *약 스포일러 한국 소설을 나오자마자 읽은 것은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일지도 모른다). 정유정의 신작 을 읽었다. 그의 전작 을 읽은 적이 있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 소설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모르겠다. 전문적인 평자라면 무엇이든 말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겐 그럴만한 꺼리가 없었다. 은 그보다는 할 말이 있다. 정유정은 책 출간을 전후한 인터뷰를 통해 구제역 파동에서 작품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언급했다. 살아있는 소, 돼지 등이 중장비에 매달린 채 거대한 구덩이 속으로 던져지는 그 풍경 말이다. 실제로 은 '빨간 눈'이라 불리는 인수공통전염병이 창궐한 서울 인근의 가상 소도시 화양을 배경으로 한다. 개와 사람이 동시에 걸리는 이 병은 환자를 2~3일 내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 더보기
비경제적, 비인간적인 월스트리트, <호모 인베스투스> 학술적인 책이다. 인류학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대목은 읽기가 좀 어렵지만, 현장의 상황이 잘 반영돼 있어 전체적으로 흥미롭다. 다만 오탈자가 너무 많다. 호모 인베스투스캐런 호 지음·유강은 옮김/이매진/520쪽/2만3000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브라질 내륙 소수 원주민의 삶을 관찰한 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했다. 브로니스라프 말리노프스키는 파푸아 뉴기니의 트리브리안드 군도 원주민들의 농경과 주술을 연구한 뒤 인간의 경제적 본성에 대한 통찰을 전했다.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 말리노프스키같은 유명 인류학자들이 ‘원시 부족’을 연구한 것은 80~100년 전 일이다. 우리 시대의 인류학자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연구하는가. 젊은 인류학자 캐런 호는 세계 금융의 중심을 자처하는 월스트리트로 향했다... 더보기
서울에 풍기문란을 허하라, <음란과 혁명> 제목이 흥미가 돋운다. 전자를 분석하고 후자의 희미한 가능성을 찾는데 집중한다. 음란과 혁명권명아 지음/책세상/412쪽/2만3000원 ‘예술인가 외설인가’라는 홍보 문안을 붙인 영화, 소설은 대체로 외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내 오랜 짐작이었는데, 국문학자 권명아는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과 외설의 구분은 음란물에 대한 일제 시대의 탄압에서 시작해 정비석, 유현목, 마광수, 장정일 등을 옭아맸다. 최근에는 김기덕 감독의 신작 가 “주제와 폭력성, 공포, 모방위험 부분에서 청소년에게는 유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직계간 성관계를 묘사하는 등 비윤리적·반사회적인 표현이 있다”는 이유로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이 등급을 받은 영화는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할 수 .. 더보기
비극은 슬프지 않다, <비극의 비밀> 농담 아니고, 정말 조만간 희랍 비극 읽기에 도전 예정. 마침 집에 챙겨둔 책이 있었음. 예전에 강대진 선생 책 (그린비) 읽은 뒤 에 돌입한 바 있음. 기대. 베르나르디노 메이, , 1654년, 이탈리아 시에나 살림베니 궁전 소장.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이고 있다. 그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는 이미 피를 흘린 채 쓰러졌다. 오레스테스의 뒤에는 복수의 여신 둘이 나타났다. 비극의 비밀강대진 지음/문학동네/400쪽/2만2000원 서양고전학자인 저자는 ‘비극’이 ‘슬픈 이야기’라는 통념을 반박한다. 실제로 오늘날 ‘비극’으로 번역된 희랍어 ‘tragoidia’에는 ‘슬프다’는 뜻이 들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독자들이 특히 희랍 비극을 읽을 때 등장인물이 처한 불행과 겪는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면 핀트가 .. 더보기
갑을관계는 관존민비로부터? <갑과 을의 나라> 갑과 을의 나라강준만 지음/인물과사상사/304쪽/1만3000원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생산성’은 놀랍다. 지난 한 해 동안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은 을 비롯해 6권이다. 올해도 1월 나온 를 시작으로 신작 까지 벌써 3권이다. 2~3달에 한 권씩 책이 나오는 셈이니, ‘(독자가) 읽는 것보다 (필자가) 쓰는 것이 빠르다’는 말이 나와도 무리가 아니다. 남양유업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욕설을 하는 녹취록이 공개되고, 검찰이 남양유업 본사를 압수수색했음을 알리는 경향신문 기사는 5월 7일자에 게재됐다. 각 언론들은 이때를 기준으로 한국 사회의 ‘갑을 관계’에 대한 기획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남양유업과 대리점주들이 갈등을 빚고 있다는 사실은 1~2월 간간이 보도됐으나, 이때는 갑을 관계에 대한 사회적 관.. 더보기
어떻게 늙을 것인가, 대니얼 클라인 인터뷰 미국의 교양 철학 저술가 대니얼 클라인(74)은 인공치아 수술을 권유받은 뒤 생각했다. “이 나이에 그런 짓을 꼭 해야 하나?” 클라인은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청춘을 ‘이식’하려던 계획을 접었다. 대신 ‘노인다운 노인’이 되길 두려워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할까. 다행히도 2000여년 전에 만족스러운 노년을 보내는 방법을 찾아낸 철학자가 있었다. 클라인은 사람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살아가는 그리스 이드라 섬에서 에피쿠로스의 책을 읽으며 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결과가 (책읽는 수요일)이다. 이 책에서 그는 마음이 흔들리고 운수에 끌려 방황하는 청년보다,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느긋한 노년을 예찬한다. 인생을 살펴보기 좋으며, 숨가쁜 야망에 휘둘릴 필요가 없으며, 대가 없는 우.. 더보기
살인이 드러내는 삶의 비루함, 마쓰모토 세이초의 이야기들 두 군데 출판사(북스피어, 모비딕)에서 연합해 내고 있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책들을 몇 권 읽었다. 는 간략히 소개한 적이 있고, 이번에 더 읽은 것은 , , 다. 앞의 두 권은 장편, 마지막 것은 단편집이다. 흔히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으로 불리는 마쓰모토는 41세에 뒤늦게 작가로 데뷔해 이후 40년 동안 100여편의 장편, 1000여편의 중단편을 써낸 다산의 소설가다. 인간인 이상 그 작품들이 다 훌륭할 수는 없을테고, 한국에서는 그 중 괜찮은 것들이 소개되는 중일 것으로 짐작한다.(101편의 영화를 찍은 임권택 감독도 80년대 이전 영화에 대해선 손사래를 친다.) 이번에 읽은 책들도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마쓰모토 세이초 센세(1909~1992) 그 중 가장 괜찮았던 것은 . '짐승의 길'이란 짐승.. 더보기
일한만큼 받을까, 살만큼 받을까,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짧은 분량, 쉬운 서술로 '비주류 경제학'(이지만 언젠가는 주류가 되라!)의 이론들을 전한다. 리뷰에도 자세히 썼지만, 특히 임금에 대한 정의가 흥미로웠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가 무슨 뜻인지 이제서야 대략 짐작.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류동민 지음/웅진지식하우스/279쪽/1만3000원 경제학은 깔끔하다. 가격 형성 과정을 떠올려보자. 수요가 늘어나면 가격이 오르고,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이 내린다. 수요와 공급의 선이 엇갈려 가격을 결정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그래프는 수학적으로 명쾌하고 시각적으로 단정하다. 그런데 우리 삶은 경제학처럼 깔끔하지 않다. 오히려 빈 틈이 많고 너저분하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을 때면 시장조정 과정을 통해 균형이 회복된다”는 표현을 살펴보자. 이 문장 속 ‘균형.. 더보기
599만년의 체험에서 무얼 배울까, <어제까지의 세계> 거의 모든 일간지의 북섹션에서 이 책을 톱 리뷰로 다루었다. 제목도 한결같이 "전통사회에서 배운다" 정도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전통사회를 무조건 낭만화해 바라보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사실 새로운 내용은 없는데, 읽기 쉽게 잘 쓰여졌고 사례도 풍부하다. 어제까지의 세계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강주헌 옮김/김영사/744쪽/2만9000원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대단히 자의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사실은 일찌감치 지적돼 왔다.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1937년 브라질의 내륙 지역에서 서구의 ‘문명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개인’들을 만난 뒤, 문명과 미개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에서 서로 관계 맺고 있음을 발견했다. ‘문명권’에 속한 서구 학자로서 펴낸 참회의 기록이 였다.. 더보기
넌 좋아하니, 난 아니란다,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는 군대에서 읽었다. 지금은 절판된 민음사 판본도 아닌, 출판사와 역자가 기억나지 않는 야리꾸리한 판본이었다. 읽긴 읽었는데 뭘 읽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다가 검열 시간에 간부에게 책을 빼앗겼다. 표지에는 "예술인가 포르노인가" 운운하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던 것 같다. 문학동네 판본을 입수한 김에 를 다시 읽었다.(여기에도 "에로티시즘 혹은 포르노그래피"라고 써있다!) 음...그러고 보니 난 를 읽은게 아니었다. 예전의 그런 번역으로는 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거다. 원문을 알 수는 없지만, 거의 매 페이지마다 번역자의 노고가 뚝뚝 묻어난다. 아마 예전에 읽은 그 번역은 문학동네 판본에 비하면 구글 번역기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런 소설을 읽을만한 한글로 바꾸어준 역자에게 감사한다. .. 더보기
일중독자와 포르노배우의 유사성,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완전히 새로운 통찰은 아니지만, 신랄한 비유가 많아 재미있게 읽었다. 나의 경우는 리뷰가 책의 분위기를 닮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리뷰의 표현도 신랄해졌다.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장혜경 옮김/로도스/212쪽/1만4000원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당신이 듣기에 거북살스러운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 독일의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는 당신이 포르노 배우 같다고 말한다. 이 30대 후반의 여성 철학자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욕망, 탈진, 중독, 우울증 등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고 한다. 왜 내가 포르노 배우인가. 새벽부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만원 지하철에 우겨넣은 뒤 직장으로 달려간 내가, 담배 피고 화장실 갈 시간을 아껴 일한 내가, 10분만에 점심 식사.. 더보기
대통령 선거? 구글에 물어봐,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내게 과학책 읽기는 늘 힘에 부친다. 그래도 이 책은 최첨단 이론을 소개하면서도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었다.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정하웅·김동섭·이해웅 지음/사이언스북스/400쪽/2만2000원 구어의 시대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인기 많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구어적 특성을 보인다. 글투가 일상의 대화를 닮았을 뿐 아니라, 발화가 즉각적이고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문어의 보루였던 책도 이제는 구어로 만들어지는 추세다. 고독한 저자가 자신의 집필실에 틀어박혀 하얀 종이 혹은 워드 프로세서와 대면해 한 줄씩 써내려가는 건 ‘고전적’ 풍경이다. 요즘의 많은 책들은 대중 강연을 녹취한 후 가공을 거쳐 출간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친근한 말투를 그대로 살린 ‘힐링’ 서적, 이제는 ‘멘토’.. 더보기
영어와 한국어, 사투라외 표준어는 평등하다,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 쉽고 재미있게 잘 읽힌다. 그러나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언어인 영어를 모국어로 삼은 저자가 '언어의 자유시장' 정도로 해석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니 다소 배알이 꼴리는 부분도 있다.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로버트 레인 그린 지음·김한영 옮김/모멘토/498쪽/1만9000원 뼈째회, 늘찬배달, 누리사랑방, 교감지기, 똑똑전화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원을 살피면 그 뜻이 짐작가는 것이 있기도 하고, 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단어도 있다. 이 말들은 각각 세꼬시, 퀵서비스, 블로그, 솔 메이트, 스마트폰 등에 대해 국립국어원이 제시한 ‘순화어’다. 아름다운 고유어를 널리 쓰이게 하겠다는 의도야 이해하지만, 언어는 언중에 의해 사용되어야 언어다. 순화어로 제시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주변.. 더보기
자유의지는 지니어스 서비스에 있다, <컬처 쇼크> 이번주엔 프런트가 아니라 다른 면 톱기사. 덕분에 분량이 평소의 절반. 컴퓨터 과학자들이 인터넷의 영향력에 대해 부정적인 멘트를 많이 해서 좀 의외였는데, 나도 대체로 그런 시각에 동의 컬처 쇼크재레드 다이아몬드 외 지음·강주헌 옮김/와이즈베리/392쪽/2만원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출판사 대표인 미국인 존 브록만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주소록”을 갖고 있다. 그는 1996년 엣지 재단을 설립해 인문학, 과학, 예술, 사업을 막론하고 두루 뻗은 인맥을 포섭했다. 엣지 재단은 특별 강연회와 연례 만찬회를 열어 이들의 교류를 주선하고, 그곳에서 생산된 지식을 세상에 전한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커, 재레드 다이아몬드, 대니얼 카너먼 등이 엣지 재단의 회원이다. 는 엣지 재단이 펴내는 ‘베스트 오브 엣지.. 더보기
사진에 대한 3가지 시선, <지속의 순간들><한번은><전쟁교본>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이번엔 사진에 대한 책 3권을 잇달아 읽었다. 시작은 제프 다이어의 (사흘)이다. 영국의 작가 제프 다이어는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번역되지) 않은 사람인데, 이 책을 읽어보면 뒤늦지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유명한 보르헤스의 '어느 중국 백과사전' 분류를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은 20세기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임의로 분류하고 해석한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임의'다. 누가 폴 스트랜드, 워커 에반스, 도로테아 랭, 안드레 케르테스, 다이앤 아버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을 작가별, 시대별이 아니라 눈먼 거지, 손, 벤치 등의 소재를 다루는 방식으로 분류해 해설할 생각을 했겠는가. 다이어는 자신의 영감 넘치는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물.. 더보기
감옥에 가려는 아이들,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 청소년책인지 모르고 집었는데, 잘 읽히고 감동도 있다.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시위 문화에 대해 느끼는 바도 생기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저녁 뉴스 시간에 맞춰 시위를 계획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신시아 Y 레빈슨 지음·박영록 옮김/낮은산/248쪽/1만5000원 한 사회가 오랜 시간 다져온 생각이나 제도 따위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바깥 세상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해도 마찬가지다. 이권을 지키기 위한 주류의 저항 때문이든, 낡은 습속을 벗기 싫어하는 보수적 사람들 때문이든, 세상의 혼란을 두려워하는 민초들 때문이든. 그래서 낡은 틀이 바뀌는데는 새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땀, 심지어 피가 필요하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대체로 법적인 성인을 가리킨다. 허나 이렇게 다가올 .. 더보기
인간의 두뇌는 진화하지 않았다. 언어와 음악이 진화했다, <자연모방> 자연모방마크 챈기지 지음·노승영 옮김/에이도스/270쪽/1만6000원 (원제 Harnessed·‘안장을 씌운다’는 뜻으로 언어·음악이 인간 뇌에 꼭 들어맞음을 비유함)의 저자는 인간 청각의 중요성이 시각에 비해 과소평가돼 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대개 눈으로 세상을 파악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귀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랬다. 출근길 지하철 빈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귀를 열어보았다. 객차내 안내방송은 수시로 정차역을 알려주었다. 열차가 레일과 마찰하는 소리의 크기에 따라 역에서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정도, 속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린 뒤 들리는 발자국 소리의 크기는 역별 승객수에 비례했다. 암흑 속에서도 출근길 지하철의 풍경은 선하게 그려졌다. 책에는 이런 예도 나온다... 더보기
숲 속의 미녀가 잠들어야 했던 이유,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이번엔 생각보다 읽기가 훨씬 어려웠다. 한 문장 한 문장 뜯어보면 딱히 어려운 말은 없는데, 좀처럼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의 글들을 읽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오이겐 드레버만 지음·김태희 옮김/교양인/568쪽/2만8000원 따져보면 동화엔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인어공주는 왜 그리 어리석은가. 뭍의 왕자님으로부터 사랑을 얻어낼 확률이 사랑하는 가족, 타고난 육체, 아름다운 목소리와 바꿀만큼 크다고 생각하는가. 백설공주의 계모는 정말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확언을 들은 뒤에야 살육을 멈출 계획인가. 당장 먹을거리도 없는 심 봉사는 대체 어디서 구하겠다고 공양미 삼백석 타령을 하는 걸까. 현대인의 시선에서 보면 답답해 속이 터질 .. 더보기
조기 유학의 허와 실, <그랜드 투어> 도판이 많고, 서술이 평이해 읽기가 수월했다. 그랜드 투어설혜심 지음/웅진지식하우스/412쪽/2만3000원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현대인은 다독가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시대다. 한국에서도 해외여행은 30년전만 해도 특권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요즘은 동남아 정도라면 제주도 못지 않게 쉽게 갈 수 있다. 서유럽인들은 한국인들보다 이른 시기에 해외여행에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 시대에만 해도 의미있는 경험을 쌓을만한 외국이라고는 중국밖에 없었을테지만, 같은 대륙에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여러나라가 오밀조밀 붙어있는 서유럽에는 갈 곳이 많았다. 고대 로마의 부자들은 시골이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