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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카타콤, <일탈: 게일 루빈 선집> '카타콤'은 궁금하긴 한데.... 만약 가볼 기회가 생기더라도 나로선 여기서 묘사된 걸 읽는 정도로 충분하겠다. 일탈: 게일 루빈 선집게일 루빈 지음, 신혜수·임옥희·조혜영·허윤 옮김/현실문화/904쪽/4만4000원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게일 루빈 미국 미시간대 교수(66)는 문제적 인물이다. 인류학, 비교문학, 여성학을 가르치는 그는 1970년대부터 논쟁적인 글을 써왔는데, ‘진보’를 자처하는 페미니스트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통에 진영 내에서도 미움받거나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역자를 대표해 서문을 쓴 임옥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조차 1997년쯤 의 번역을 제안받고는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임 교수는 “마음속의 금서”였던 을 번역해 펴내기에 이르렀.. 더보기
불안증의 공포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우디 앨런 영화 보면 코미디인데, 실제로는 공포다. 한국판 표지 역시 귀업게 표현하려 했다. 저자는 최대한 담담하게 쓰려 하고, 또 가끔 유머를 발휘하려고도 하지만, 웃기기보다는 끔찍하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스콧 스토셀 지음·홍한별 옮김/반비/496쪽/2만2000원 우디 앨런은 자신의 컴플렉스를 기막힌 작품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점만으로도 대단한 예술가다. 앨런이 연출하고 주연까지 맡은 영화 (1977)의 주인공 앨비 싱어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어린 시절의 싱어는 “우주가 계속 팽창하다가 결국 터져버리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하며 나날을 지냈다. 성인이 된 뒤에도 불안증을 극복하지 못한 싱어는 15년째 정신과에 출입하고 있는데, 별로 나아질 기미는 없다. 싱어의 불안은 그의 직업,.. 더보기
김현희 눈물의 효과, <슬픈 쌍둥이의 눈물> 슬픈 쌍둥이의 눈물박강성주 지음/한울아카데미/320쪽/3만4000원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해 방콕을 거쳐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던 대한항공 858기가 안다만해에서 사라졌다. 비행기에는 승무원과 탑승객 등 115명이 타고 있었다. 당국은 비행기가 공중폭파됐을 가능성을 시사했으며, 12월 1일 테러 용의자 2명을 바레인에서 체포했다. 둘은 곧바로 자살을 기도했는데, 중년 남성은 사망했으나 젊은 여성은 목숨을 건졌다. 이 여성 용의자는 12월 15일 서울로 압송됐다.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당선된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기 하루 전이었다. 12월 23일, 이 여성은 자신이 북한 공작원 김현희라고 자백했다. 김현희는 이듬해 1월 15일 기자회견에도 등장했다. 김현희는 북한 지도부가 서울올.. 더보기
누가 더 과학적인가 <언던 사이언스> 오랜만에 과학책을 프런트로. 언던 사이언스현재환 지음/뜨인돌/248쪽/1만4000원 미국에선 일찌감치 유방암 연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중년 남성을 ‘보편적 인간’으로 상정한 현대의학 및 과학 연구에서 여성 질환인 유방암이 경시되어 왔다”고 비판해왔다. 반면 의학계 내부에서는 유방암 연구가 제대로 이뤄져 왔음에도 일부 여성 활동가들이 과학에 대해 알지도 못한 채 성차별주의 관념을 내세운다고 반박했다. 결국 ‘나쁜 과학자 집단 대 정의로운 여성운동가들’, 혹은 ‘진실한 과학자 집단 대 히스테릭한 여성들’이라는 이분법적 선악 구도가 유방암 관련 논쟁을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대결 구도는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광우.. 더보기
시스템이 만든 탐정소설, <미스터 메르세데스> ***스포일러 미량 는 스티븐 킹의 '첫 탐정 추리소설'을 표방한다. 오랫동안 보스턴에 살아온 작가는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테러사건을 소재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책에서는 새벽부터 취업박람회에 줄을 서있던 가난한 서민들을, 훔친 메르세데스로 마구 치어 죽인 살인마가 등장한다. 살인마의 정체는 극 초반부터 밝혀진다. 어머니와 단둘이, 다소 이상한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 이 청년은 얼핏 성실하고 모난데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에 대한 끔찍한 적의를 품고 있다. 킹은 청년이 연쇄살인마가 된 가족사를 소개하기는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누구나 괴물이 되는건 아니다. '미스터 메르세데스'는 타고난 사이코패스에 가깝다. 재판을 받았다면 정신이상을 호소했을 가능성이 크다. 은퇴한 뒤 허무의 늪에 .. 더보기
이남희, 마이클 최 UCLA 교수 부부 이남희 교수는 청소년기에 미국에 건너갔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한국어를 잘했다. 그는 언어에 민감해, "커피 한 잔 나오셨습니다" 같은 말이 견디기 힘들다고 햇다. 마이클 최 교수는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둘은 사이 좋은 중년 부부로 보였다. 1988년 3월 노엄 촘스키의 미국 노스웨스턴대 강연이었다. 시카고 지역사회에서 풀뿌리 운동을 하던 이남희씨(55)는 질문 기회를 얻으려 손을 내지르는 한 아시아계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수적인 미주 한인 사회에서 촘스키의 강연에 올 사람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청년은 재미교포 2세로 이름은 마이클 최(50)였다. 둘은 얼마 뒤 연애를 시작했고, 92년 결혼했다. 캘리포니아대 로스 엔젤레스 캠퍼스(UCLA)의 아시아학 부교수, 정치학과 교수로 각각 재직중인 이남.. 더보기
나도 저자가 됐다, 엑스플렉스의 텐북스 왜 냈나 싶은 책도 참 많고, 좋다 싶은 책도 읽는 이가 드물어진데다가, 인터넷 어디서라도 글 쓸 공간은 무한한 세상에, 여전히 책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출판의 문턱은 낮아졌으니, '저자가 되고 싶다'는 로망은 예전보다 훨씬 충족하기 쉬워졌다. "책은 하나의 세계"라는 담임 교사의 말도 기억에 남는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마포에 있는 출판문화공간 엑스플렉스에서는 조촐하지만 뜻깊은 한 출간기념회가 열렸다. “인생에 한번, 나도 저자!”라는 모토를 내걸고 지난 6주 동안 열렸던 강좌 ‘텐북스’ 제1기 수료식을 겸한 자리였다. 저자 지망생 4명은 지난달 13일 처음 엑스플렉스에 모였다. 이후 매주 토요일 오후 4시간씩 혹독한 책만들기 수련을 거쳤다. 그날 강의가 끝나면 내주.. 더보기
행복에 대한 두 가지 시선 신간이 출판면에 실리기 위해선 때로 우연이 필요하다. 이번 주에는 우연히도 행복에 대해 전혀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두 책이 나란히 배포됐다. 굳이 따지자면 후자의 책이 전자의 책을 '저격'하고 있다. 그만큼 행복의 개념은 중요한 이슈라고 볼 수 있다. 이 책들은 각자 다른 주에 나왔다면 따로 다룰만했겠지만, 이번주에는 하나로 묶어 '책과 삶' 프론트 페이지에 실었다. 행복을 추구하는 온갖 학문과 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더 좋은 물건을 갖기 위해 살던 사람들은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바꾼 듯 보인다. 서점에 가면 행복을 다룬 심리학 책들이 잔뜩 쌓여있고, 행복을 주제로 한 강의들도 곳곳에서 펼쳐진다. 심지어 이윤 추구가 존재 이유와 같던 기업들도 .. 더보기
나를 사랑하는 방법, <자존감의 여섯 기둥> 이런 종류의 책을 잘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서인지 어쩌다 읽으면 신선한 느낌을 받곤 한다. '사회'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말도 안하는 저자의 태도가 충격적이긴 하지만, 미국의 심리학자에게 그런 걸 바란다는 자체가 연목구어 같기도 하고. 자존감의 여섯 기둥너새니얼 브랜든 지음·김세진 옮김/교양인/512쪽/1만8000원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애타게 사랑을 갈망하지만, 그가 사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문난 바람둥이 혹은 유부남이었다. 여자는 어쩌다보니 결혼에 성공하지만, 역시 행복을 누리진 못한다.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에게 “나보다 다른 여자가 낫지 않느냐”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지쳐버린 남편은 이혼 서류를 내민다. 여자는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생각한다. “난 원래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더보기
어느 지식인의 회상, <20세기를 생각한다> 는 쉽지 않은 책이었다. 20세기의 혁명, 반혁명, 전쟁, 정치인, 지식인에 대한 매우 세밀한 논평이 담겨 있기 떄문이다. 독서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래도 이런 책은 척 보면 '좋은 책'이라는 확신이 든다. 20세기를 생각한다토니 주트·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열린책들/520쪽/2만5000원 영국 출신의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60세였던 2008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뉴욕대 레마르크연구소의 소장이자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란 평가를 받은 의 저자로 명망을 누리던 시기였다. 21살 연하의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주트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날, 그에게 공저를 제안했다. 2009년 1월 책을 위한 첫 대화를 시작했을 때만.. 더보기
서구중심주의 대논쟁! 김경만 vs 강정인 처음엔 김경만 교수 인터뷰만 예정했으나, 뒤늦게 강정인 교수가 주관하는 학술회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강 교수도 인터뷰했다. 내 입장에서야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네"라고 말할 수밖에. 최근 일주일 간격으로 서강대 다산관을 잇달아 찾았다. 4층 연구실의 사회학과 김경만 교수(57)와 6층의 정치외교학과 강정인 교수(61)을 만나기 위해서다. 두 학자는 2007년 이 건물에서 ‘한국 사회과학의 서구의존성 누구 책임인가’라는 주제로 4시간 동안 지적 대결을 펼친 적이 있다. 이후 ‘학문적 긴장’을 유지하며 지내온 이들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다시 한번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김 교수는 신간 (문학동네)에서 강정인, 한완상, 조한혜정 등 동료 학자들을 실명비판했다. 세계 학계의 보편적 흐름과 분리된 .. 더보기
군대가 직접 매춘부를 고용한다면?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실제 집필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송병선 역/문학동네)는 태초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이후에는 술술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상황 설정이 기발하고, 인물들의 대립 구조가 명확하고, 주인공의 운명이 비교적 예측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튼 독자는 이렇게 쓰여진 소설을 재빠르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 페루 육군의 행정장교인 팔탈레온 판토하 대위는 아마존 밀림에서 근무하는 군인을 위한 '특별봉사대'를 조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는다. 오지에 근무하느라 욕구불만에 시달린 병사들이 인근의 부녀자들을 성폭행하는 사태가 잦아지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군에서 은밀하게 순회 집창촌을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쉽게 말해 '위안부'다. 근면성실하고,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높은 판토하는 이.. 더보기
군인의 삶을 통해 본 세계사, <군인> 이번 주 책은 재미있었다. 리뷰 말미에도 썼지만, 특정 입장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독자가 자연스럽게 어떤 느낌을 갖도록 한다. 동서고금의 방대한 군인, 전쟁의 사례를 읽는 재미도 있었다. 특히 6장 '어떤 꼴로 죽었을까'는 판소리 '적벽가'의 죽음 대목처럼 해학적이면서도 처절하다. 그러고보니 전사를 '꼴'로 표현한 것 자체가 해학적이군. 저자 역시 참전 경험이 있다고 한다. 군인볼프 슈나이더 지음·박종대 옮김/열린책들/584쪽/2만5000원 로버트 하인라인의 SF 속 세상 사람들은 시민과 민간인으로 나뉜다. 시민은 참정권을 갖고, 민간인은 갖지 못한다.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군대에 다녀와야 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마찬가지다. 이곳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 적이 있는 사람, 즉 군인만이 나라를 움.. 더보기
독창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베낀다, <작가란 무엇인가2> 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에 이어 도 출간됐다. 정확한 판매량은 알 수 없지만, 왠지 이 시리즈가 책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선 꽤 인기를 끈 것 같다. 이 책의 포맷을 거의 그대로 따서 한국 작가들을 다룬 책을 보았기 때문이다. 1편에서 그랬던 것처럼 2편에서도 인상적인 몇 구절을 옮겨 적어본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독창적이지 않은 작가들은 과거나 현재의 다른 많은 이들을 모방하기 때문에 다재다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술적으로 독창적이려면, 자기 자신을 베끼는 것 말고는 다른 게 없지요. 나보코프(1899~1977) 조이스 캐럴 오츠각각의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독립적인 것입니다. 어떤 책이 그 작가의 첫 번째든, 열 번째든, 오십 번째든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비평에 대해) 저처럼 많은 책.. 더보기
학술서적 북디자이너는 수도사와 같다. 콜롬비아대학출판사 북디자이너 이창재씨 이창재씨는 미국에서 e메일을 보내 자신의 전시회 소식을 미리 알려왔다. 아마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보도자료는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이뤄져 있었다. 사실 재미교포에 대한 선입견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직접 만나본 이창재씨는 재미교포 하면 떠오르곤 하는 과장된 쿨함, 느끼함이 없었다. 중학교 때 이민 갔다고 하는데 한국어 어휘, 발음이 모두 정확했다. 물론 북디자인도 한국의 많은 학술서들과는 달리 아름다웠다. 1996년 미국 뉴욕의 예술대학인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한 이창재씨(49)는 두 군데 직장에서 면접을 봤다. 모두가 웹 디자인에 눈을 돌리고 있어 프린트 디자인을 지향하는 이는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콩데나스트는 한때 100종 이상의 잡지를 발행한 거대 출판 기업이었다. 으리으리한 건물에 들어가니.. 더보기
518의 철학적 의미 <철학의 헌정> 친절하신 김상봉 교수는 책의 어느 부분에 어떤 내용이 기술돼 있는지, 어떤 참고 자료를 활용해 기사를 작성하면 좋은지까지 알려주셨다! 헤겔은 프랑스 혁명의 철학적 의미를 규명하는데 학문 여정의 한 자락을 할애했다. 가 그 결과물이다. 주나라를 이상국가로 여긴 공자는 이를 위한 삶과 사회의 원리를 제시하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의 철학자들이 동학농민운동, 3·1 운동, 4·19 혁명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철학적으로 대응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55)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말했다. “대체 철학이 뭡니까. 플라톤, 칸트, 맑스 이야기하면 철학입니까. 자기 사회에 대한 주체적인 성찰과 비판은 왜 철학이 아닙니까?” 5·18은 한국 현대사의 주요 변곡점이며 .. 더보기
삼겹살을 안 먹을 수 있을까, <동물을 위한 윤리학> 공장식 축산의 끔찍함 혹은 동물원의 열악함을 떠올리거나, 이 책과 같이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논변을 전개하거나, 결국 결론은 채식쪽으로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삼겹살의 고소한 기름내를 멀리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내려야 하는 실존적 결단만이 남았다. 아마 그런 결단은 어떤 깨달음의 순간에 따라와야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임순례 감독이 전한 순간은 이렇다. 시장에서 사와 마루에 둔 검은 비닐 봉지 속의 바지락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동물을 위한 윤리학최훈 지음/사월의 책/368쪽/1만8000원 철학은 생각의 한계를 시험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확정된 생각의 경계는 그에 따르는 실천을 요구한다. 최훈 강원대 교수는 ‘채식주의 철학자’다. 이는 동물의 ‘도덕적 지위’(moral stat.. 더보기
동양의 비스마르크인가?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내 인식은 '점진론자' '온건주의자'였고, 안중근의 의거로 인해 일본의 조선 병탄이 오히려 가속화된 측면이 있다는 견해도 설득력 있게 여기는 정도였으나. 이 책은 그같은 나의 얄팍한 상식을 여지 없이 무너뜨린다. 군인이 아닌 외교관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겉으론 대의명분과 온건한 방법론을 내걸었지만, 그 역시 제국주의의 첨병일 뿐이었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가 가진 정치인, 외교관으로서의 수완, 경륜까지 폄훼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울러 책을 읽고 나니, 한반도의 근대 정치가들 중 이토 히로부미 정도로 폭넓은 국제적 시야를 가진 이들이 있을지 궁금했다. 별로 없을 것 같다. 다들 뜻은 클지언정, 그 뜻을 실행할 능력은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설사 그런 능력을 갖췄다해도, 시대와 지역.. 더보기
백인 여성에 대한 매혹, <미친 사랑> 내친 김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또다른 소설 (시공사)도 읽었다. 이 소설은 다니자키의 초기 문학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고 하며, 서구에 일본 문학이 알려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일본문학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 "다니자키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아니라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하지만, 솔직히 은 꽤 통속적이라서 의 정밀한 심리적 속임수나, , 의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엔 미치지 못한다. 절반쯤 읽다가 "연구자도 아닌 내가 왜 1920년대 일본 풍속 소설을 읽어야 하나"는 생각이 들어 덮으려던 중 힘을 내 마저 읽었는데, 막상 읽고나니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신문 연재 도중 "신문사의 형편에 따라"(아마도 검열 당국의 개입에 따라).. 더보기
구어가 책이 된다 이리 틀고 저리 틀다 만들어낸 기사. 그래도 만들면 된다. 지난 두 달 이상 각종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수위권을 다툰 (기시미 이치로 외·인플루엔셜)와 (채사장·한빛비즈)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책 모두 구어를 기반으로 집필됐다는 사실이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에 기반해 행복한 인간 관계의 조건에 대해 설명하는 는 열등감 많은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 형식으로 서술됐다. 다섯 밤 동안 청년과 철학자는 서로를 논박하면서 배움을 주고 받는다. (지대넓얕)의 저자 채사장은 논술 강사 출신이다. 2011년 역사, 경제, 정치 등 각 분야의 지식을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 전하는 의 초고를 썼고, 2014년 4월 같은 제목의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책은 팟캐스트의 인기와 맞물려 금세 입소문을 탔다... 더보기
힐러리 클린턴에 대해, 평전과 자서전 사실 난 힐러리 클린턴을 싫어하지 않는다. 버락 오바마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다툴 때도 내심 클린턴을 응원했다. 난 연설을 지나치게 잘하는 사람을 별로 안믿는 편인데, 버락 오바마가 딱 그랬다. 반면 클린턴은 그 권력욕, 권모술수, 추진력이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꽤 어울릴 것 같았다. 사랑받지 못하지만 일은 잘하는 대통령이 될 것 같았다. 물론 뭐라고 생각해봐야 내겐 미국 대통령 투표권이 없지만.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은 해외에서 반응이 별로 안 좋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힐러리 클린턴의 민주주의 이론, 사상적 지향점 같은 걸 알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린 그저 버락 오바마와 다른 힐러리 클린턴의 포지션, 케네디, 부시에 이어 클린턴 가문이 미국의 왕가로 등극할 수 있을지가 궁금.. 더보기
에로티시즘과 장애물, <열쇠> 성을 다룬 의학 다큐멘터리와 포르노그래피의 차이는 무얼까. 아마도 섹스를 하기 위해 포르노는 다큐보다 조금 더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섹스가 벌어지는 상황을 설정하고, 몇 겹의 옷을 하나씩 벗기고(혹은 섹스에 방해받지 않을 정도만 남겨두고), 카메라나 조명은 관객의 목적은 충족시키되 너무 직설적이지는 않을 정도로 영상의 각도, 움직임, 명암에 변화를 줘야 한다. 처음부터 나체로 나온 파트너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섹스를 하고, 카메라는 그것을 미동도 없이 정면으로 비춘다면? 그건 의학 다큐다. 에로티시즘은 방해받을 때 자극받는다. 지난 세기의 정신분석가들은 에로티시즘을 금기와 연계시키기도 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창비식 표기로는 타니자끼 준이찌로오!)의 는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 더보기
베이컨과의 대화,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은 정규 미술 교육은커녕 정규 교육 자체에 거의 무심했다. 하지만 저명한 미술평론가 데이비드 실베스터와 25년에 걸쳐 행한 9편의 인터뷰는 예술가의 직관과 지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게 한다. 화가는 그림, 영화감독은 영상, 무용가는 몸짓으로 표현하므로, 그들에게 문자 혹은 구술 언어는 주된 표현수단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든 빼어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언어로 번역해 대략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듯하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흔히 이해되는 방식이 아니거나, 말하거나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태도를 가질 뿐.) (디자인하우스) 중 흥미로운 대목을 발췌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성깔 있는 아이리쉬. 나는 오독에 화나지 않습니다. 그러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더보기
평화와 번영의 제국, <제국: 평천하의 논리>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 저자의 지난번 저서인 을 2012년 읽고 기사로 쓴 적이 있다. 나도 지금 검색하다가 알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사를 읽으니 책 내용이 대략 생각 난다는 점. (기사 잘 썼네!). 이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인 반면, 는 많은 독자들이 읽기 불편할성 싶다. 옳든 그르든, 동의하든 안하든 요즘은 이런 책이 더 흥미롭다. '신자유주의는 나쁘다' '느리게 사는 삶이 좋다'는 이야기가 담긴 책에는 거의 아무런 자극을 느낄 수 없다. 제국: 평천하의 논리 헤어프리트 뮌클러 지음·공진성 옮김/책세상/448쪽/2만원 5000여년의 역사 동안 ‘제국’인 적이 없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제국의 역할을 긍정적인 뉘앙스로 조명하는 책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가 오랜 기간 아시아의 제국.. 더보기
아시아문화전당의 베네딕트 앤더슨 개관을 앞두고 학술대회를 연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 다녀왔다. 사실 만족스럽지 않은 출장이었다. 나 자신의 부족함과 통제불가능한 변수 때문에 취재를 원활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며칠전 개통된 KTX를 타고 재빨리 올라오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베네딕트 앤더슨의 기조강연은 괜찮았다. 우리는 그를 30여년전 나온 의 저자로만 기억하지만, 앤더슨은 그 이후에도 꾸준히 자신의 이론을 수정, 보완해 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몇 가지 흥미로운, 그래서 앞으로 규명해야할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아시아문화전당은 근사했다. 그 유명한 구 전남도청을 전면에 두고, 새로 지은 건물은 뒤로 숨어든 모양새였다. 넓직하면서도 아늑한데다 사방으로 뚫인 모양새(물론 개관 하기 전이라 한 군데를 제외하곤 모두 막혀있.. 더보기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여정 혹은 변명, <조지프 앤턴> 824쪽에 달하는 살만 루슈디 자서전 의 메시지를 간결히 요약하면 이렇다. 표현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는 그것을 위해 싸우는 만큼만 주어진다. 쓸데없는 일인지 알면서도 살만 루슈디를 만나면 묻고 싶다. "1988년으로 돌아간다면 를 다시 쓰겠냐"고. 그에겐 도 있고 도 있기 때문이다. 없이도 그의 작가적 명성은 견고했을 것이다. 그는 출간과 함께 13년간의 부자유를 경험했다. 단지 '부자유'라고 말하는 건 약하다. 그 부자유는 이동과 거주의 제한은 물론 수많은 이슬람교도들의 분노, 친구인줄 알았던 이들의 배신, 죽음에 대한 공포, 가족이나 조력자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아마 루슈디는 "그래도 를 쓰겠다"고 답하겠지. 그런 결기가 없이는 13년의 도피,.. 더보기
독립출판, 왜 하나 전시 첫날 가서 봤는데 끝나갈 무렵 블로그에 올림. 아무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독립출판물을 전시하고 소장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전시실. 서가에는 여느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십진분류표가 붙어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분류방법이 특이함을 알 수 있다. 철학(100), 종교(200), 사회과학(300), 순수과학(400)의 익숙한 순서 대신, 예술(10), 문학(20), 사진(30), 디자인(40)으로 이어진다. 이는 국립중앙도서관이 마련한 특별전 ‘도서관 독립출판 열람실’(31일까지)을 위해 제작된 독립출판용 분류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제작된 국내 독립출판물 400여종, 600여권이 선보이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독립출판서점, 독립출판 페스티.. 더보기
알쏭달쏭 표절논란 기사를 쓰면서 얄팍하게나마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법서지만, 꼼꼼하게 읽으면 어렵지 않다. 외국에서 유학, 교수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고려대 심리학과에 부임한 박선웅 교수는 한국의 표절 시비가 당황스럽다고 했다. 실험 설계, 데이터 해석에 관여한 지도교수를 논문 저자 중 하나로 올리는 일, 하나의 실험을 여러 개 논문으로 발표하는 일, 학위 논문을 학술지에 다시 발표하는 일 등은 해외 학계에서 허용되는데 한국에선 종종 ‘표절’로 몰리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학문 윤리, 표절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2006년 김병준 교육부총리 지명자가 표절 시비로 낙마한 뒤, 학위가 있는 공직자들은 혹독한 논문 검증을 거쳐야 했다. 문대성 의원은 박사학위 논문 표절 시비가 붙어 한때 새누리당을 떠.. 더보기
기업과 국가에 투항한 NGO, <저항주식회사> 한국에서 안좋다고 느낀 현상이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안도감을 느껴야 할지 난감함을 느껴야 할지. 저항주식회사 피터 도베르뉴·제네비브 르바론 지음, 황성원 옮김/동녘/276쪽/1만4000원 도심의 번화가를 걷다가 유엔난민기구, 그린피스, 국경없는 의사회 등 세계적인 비정부기구(NGO)가 후원회원을 모집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자원봉사자나 활동가가 붙임성도 좋게 말을 건넨다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후원회원을 모집하는 이들은 대부분 전문 마케팅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다. 이들은 회원 모집 실적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다. 그게 잘못된 일일까. 두 가지 시선이 있다. 마케팅 기업을 동원한 회원모집은 대의를 알리기보다는 성과를 올리는데 급급해 NGO의 도덕성을 훼손할 여지가 있다.. 더보기
여자에게 직장이 무슨 소용? <하우스 와이프2.0> 시카고 트리뷴에 근무하다 퇴사한 한 여기자의 사례를 골라 써서 그런지, 사내 여기자 몇몇이 급관심 보임. 하우스 와이프2.0에밀리 맷차 지음·허원 옮김/미메시스/432쪽/1만6800원 ‘도메스틱 포르노’(domestic pornography)란 말이 있다고 한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이는 ‘완벽한 살림에 대한 사진을 보여주는 책, 잡지, TV쇼, 블로그’를 뜻한다. 미국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도 블로그 세계에서는 ‘완벽한 살림’을 전시하는 이들이 있다. 음식, 육아, 인테리어 등에서 타의 모범이 돼 파워블로거로 등극하기도 한다. 물론 운영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이 블로거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은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일정 수준의 성취를 이룬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는 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