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텍스트

어떻게 늙을 것인가, 대니얼 클라인 인터뷰

미국의 교양 철학 저술가 대니얼 클라인(74)은 인공치아 수술을 권유받은 뒤 생각했다. “이 나이에 그런 짓을 꼭 해야 하나?”


클라인은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청춘을 ‘이식’하려던 계획을 접었다. 대신 ‘노인다운 노인’이 되길 두려워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할까. 다행히도 2000여년 전에 만족스러운 노년을 보내는 방법을 찾아낸 철학자가 있었다. 클라인은 사람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살아가는 그리스 이드라 섬에서 에피쿠로스의 책을 읽으며 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결과가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책읽는 수요일)이다. 이 책에서 그는 마음이 흔들리고 운수에 끌려 방황하는 청년보다,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느긋한 노년을 예찬한다. 인생을 살펴보기 좋으며, 숨가쁜 야망에 휘둘릴 필요가 없으며, 대가 없는 우정을 나누기 좋은 노년은 인생의 황금기라는 것이다.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살고 있는 클라인에게 e메일로 노년의 삶, 죽음, 철학에 대해 물었다. 



그리스 이드라 섬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는 대니얼 클라인. "청춘으로 사는 건 피곤합니다!"


-우리 사회는 젊음을 숭상한다. 당신은 어떻게 나이들어가는 육체에 대해 떳떳할 수 있었나. 

“어떤 의술도 74세의 나를 한창때처럼 혈기왕성하고 성욕 넘치게 만들지 못한다. 난 젊음에 속박된 우리 문화가 이끄는대로 노화와 싸우거나, 아니면 ‘자연이 이끄는대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연스러운’ 흐름은 천천히 가겠다는 것이다. 노화와 싸우길 그만둔 순간부터, 난 일상의 삶에 더욱 만족하고 있다. 어떤이는 내게 ”당신은 늙지 않았어요. 젊게 행동하셔야 해요“라고 말하지만, 난 ”이봐요. 전 이미 젊어봤거든요“라고 답한다.”


-나이 들어가는 육체보다 견디기 힘든건 그에 동반하는 질병과 고통이 아닐까. 

“불편을 초래하는 의학 장비들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놀라곤 한다. 지금 내 욕실은 거의 병원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고통을 참기 힘들 정도가 되면, 난 그만 살아야 될 때라고 생각할 것이다. 난 이미 그 슬픈 사건에 대해 준비를 마쳤다.”


흔히 에피쿠로스를 ‘쾌락주의자’라고 하지만, 이때의 쾌락은 순간을 만족시키는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지속적인 마음의 평안에 가깝다. 에피쿠로스는 내세를 믿지 않았으며, 직접 콩을 길러 양념 없이 삶아 먹기를 즐겼다. 성욕이든, 물욕이든, 한 사람을 뒤흔드는 ‘미친 주인’에서 벗어나 마음을 챙기고 평범함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 쾌락주의자다.  



에피쿠로스(BC 341~270)


-당신의 설명대로라면 에피쿠로스적인 삶은 정말 멋지다. 하지만 노년이 아닌 청년이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사실 에피쿠로스는 그가 제시한 삶의 방식을 노년만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난 젊은 시절에도 그의 철학을 따르려고 했지만, 항상 야망이 나를 방해했다. 야망에 높은 가치를 매기는 사회에 사는 젊은이가 야망에 저항하기란 어렵다. 에피쿠로스적인 삶을 살려는 젊은이에게 행운이 있기를 빈다. 일단 삶의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용기가 생길 것이다.”


-‘항구에 정박한 배’와 같은 노년을 ‘보수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 

“노년을 독특하고 가치있는 삶의 단계로 보는 관점과 ‘옛날이 좋았어’라고 불평하는 건 다르다. 후자는 매력도, 성취감도 없다. 내게도 예를 들어 ‘옛날 음악이 더 좋았다’고 투덜대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건 단지 우리가 음악의 옛 형태에 더 익숙하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한국에서는 화장터같이 죽음에 관련된 장소를 ‘혐오시설’이라 부르며 반대하는 경우가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뿌리깊은 혐오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인간과 그들이 만든 문화는 항상 죽음의 문제를 부정해왔다.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이며, 그래서 죽음에 대한 의식과 싸운다. 죽음을 부정하는 한 형태로 천국 같은 사후세계를 찾기도 한다. 이런 접근 방식에 대해서 시비를 가리지는 않겠다. 죽음은 두렵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최대로 써도 모자란다고 생각할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나도 그럭저럭 헤쳐나갈 뿐이다.”


-한국은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 언론에서는 ‘은퇴에 필요한 자금’에 대한 기사가 쏟아진다. 사실 돈이야말로 평온한 노년을 보장하는 수단 아닐까. 

“수입이 없다면 생활에 필요한 자금은 분명 중대한 문제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노년에는 훨씬 적게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다. 덜 비싼 음식, 덜 빈번한 여행과 모험…. 예를 들어 야외에 앉아 새를 관찰하면 돈을 들이지 않고도 소박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한국은 ‘일중독자’의 사회다. 어떤 이들은 은퇴 이후 갑자기 생긴 광막한 자유 시간을 감당하지 못해 방황하곤 한다. 

“그것은 이곳 미국에서도 중대한 문제다. 우리가 ‘바쁘지’ 않고, 달성해야 할 새 목표도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쓸모가 없어졌다는 생각에 실의에 빠진다. 내 스스로에게 건넨 조언을 다시 떠올리고 싶다. 모든 걸 내버려두고, 지금 가진 걸 즐겨라. 에피쿠로스도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즐거움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카데미가 철학을 가두었다는 시선이 있는 반면, 대중을 향한 철학은 지나치게 속화됐다는 시선도 있다. 철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나는 학문적 배경이 없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철학책들을 써왔다. 그 과정에서 철학을 속화시켰을지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 염두에 두고 있는 질문은 단순화된 철학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나머지 잘못 이해될 수도 있는 지점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제대로 된다면, 그러한 철학은 우리 모두에게 가치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철학이 ‘똑똑이’들을 위한 학문이라고 말한다면 철학을 삶에 연결시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철학은 우리 모두를 위해, 의식 있는 생명의 안내자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