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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미녀가 잠들어야 했던 이유,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이번엔 생각보다 읽기가 훨씬 어려웠다. 한 문장 한 문장 뜯어보면 딱히 어려운 말은 없는데, 좀처럼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의 글들을 읽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오이겐 드레버만 지음·김태희 옮김/교양인/568쪽/2만8000원


따져보면 동화엔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인어공주는 왜 그리 어리석은가. 뭍의 왕자님으로부터 사랑을 얻어낼 확률이 사랑하는 가족, 타고난 육체, 아름다운 목소리와 바꿀만큼 크다고 생각하는가. 백설공주의 계모는 정말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확언을 들은 뒤에야 살육을 멈출 계획인가. 당장 먹을거리도 없는 심 봉사는 대체 어디서 구하겠다고 공양미 삼백석 타령을 하는 걸까. 현대인의 시선에서 보면 답답해 속이 터질 이야기가 상당하다. 


그래도 이 동화들은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았다. 사람의 목숨이란 것이 100년을 넘기기 힘든데, 동화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요즘엔 드라마, 영화, 소설의 소재로도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 동화들엔 ‘무언가’가 있다. 


독일의 신학자·평화운동가·심리학자인 오이겐 그레버만도 같은 의견이다. 그는 그림 형제의 동화들을 분석하면서 “상징들이 마치 몽유병 환자가 걷는 듯한 확고함과 정확성을 보이며 선택되고 배치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림 형제가 정말 훗날의 해석가·평론가들이 언급하는 구조와 상징들을 의식하고 있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은 무의식의 예감을 경청하고 그 형상이 지닌 창조적 힘에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림 형제의 의도와 상관 없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그들의 동화에는 인간의 원형적 컴플렉스, 가족 서사, 통과 의례 등이 함축적·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드레버만은 그림 동화 20여편을 심층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시리즈를 내왔는데, 이번에 한국에 나온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는 그 중 몇 편을 묶은 책이다. 


‘재투성이’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이 동화는 통상 프랑스의 동화 작가 샤를 페로가 쓴 ‘신데렐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재투성이’와 ‘신데렐라’는 세부적인 묘사가 다르긴 하지만, 어머니를 일찍 여읜 소녀가 계모와 의붓언니들의 괴롭힘을 당하다가 왕자님을 만나 행복한 삶을 시작한다는 큰 줄거리가 같다. 한국에도 ‘콩쥐 팥쥐’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드레버만은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에게 구박받으면서 죽은 친엄마를 그리워하는 ‘재투성이’를 “그런대로 무난한 환경이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잉여의 아이로 성장하는 모든 아이들의 이야기”로 정의한다. 딱 맞는 시대, 딱 맞는 환경에 태어났다고 믿는 이가 얼마나 될까. “풍부한 재능과 소질을 타고났는데도 자기 삶의 주어진 환경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 이라면, 재투성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유럽 전역은 물론 한국에까지 퍼져 있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재능과 심성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외모 속에 가려진 이야기는 성경에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이런 이야기의 테마는 외적 관찰 방식을 배제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투성이 소녀는 아직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머니의 죽음에 자신이 한몫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경건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유언은 소녀에게 더욱 큰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어머니의 죽음’은 단지 어머니의 수명이 생물학적으로 다했다는 것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어머니와 함께 행복했던 유년기 전체가 막을 내렸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어쩌면 어머니가 실제로는 죽지 않은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단지 ‘좋은 어머니’가 소녀의 ‘내면’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면 충분하다. 


재투성이 이야기의 절정부는 왕자님이 여는 무도회에서 벌어진다. 알려져 있다시피 애초에 소녀는 무도회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계모와 의붓언니는 변변한 옷도, 교양도 갖추지 못한 소녀에게 “사람들이 널 보면 다 비웃을 거야”라고 기를 죽인다. 어머니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소녀의 죄의식은 이제 멸시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뀐다. 


바로 이 두려움이 소녀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낳는다. 신데렐라 이야기에선 자정이 되면 화려한 옷가지와 마차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무도회의 절정에서 도망치는 것으로 돼있지만, 재투성이 이야기에서 소녀는 그저 자리를 뜬다. ‘내가 과연 왕자의 사랑이라는 행운을 거머쥘 자격이 있는 아이일까’라는 물음이 내면에서 솟구친다. 행복이라는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소녀는 자신감을 잃어간다. 


왕자는 남겨진 신발 한 짝을 들고 소녀를 찾아나선다. 소녀에게 행복을 찾아주려는, 외부로부터의 적극적인 움직임이다. 그럼에도 결국 행복을 거머쥐어야 하는 이는 소녀 자신이다. 재투성이를 보자는 왕자의 말에 계모는 “안됩니다. 그 아이는 너무 더러워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녀는 손과 얼굴을 말끔히 씻고 왕자 앞에 나선다. 도망치기만 하던 소녀가 스스로 나타난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슬픔과 자기 억압과 고독에서 나와 다른 사람의 사랑 안에서 행복과 믿음으로 가는 길을 찾는 소녀의 이야기”가 희미한 자존심으로 간신히 세상을 버텨가는 현실 속 많은 여성을 위로할 수도 있을 듯하다. 



전세계 아이들에게 악몽을 선사한 그림 형제


‘가시장미 공주’는 샤를 페로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로 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소녀는 왕과 왕비가 간절한 기다림 끝에 얻은 아이다. 이 이야기에선 특히 아버지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아버지는 딸의 탄생을 축하하는 호화로운 잔치를 직접 준비하고, 아이가 물레 바늘에 찔려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뒤에는 나라의 물레를 모두 불태우게 할 정도다. 아버지의 과도한 사랑 안에서 딸은 ‘아버지의 아이’로 자란다. 이는 ‘가시장미 공주’ 이야기에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는 점으로도 확인된다. 


아이는 적절한 시점에 부모를 떠나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밀착한 공주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즉 ‘성숙’하지 못한다. 드레버만은 현대 소녀들의 거식증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대체로 거식증을 패션쇼와 스크린을 지배하는 마른 여성에 대한 동경의 결과라고 여기지만, 드레버만은 “시간을 붙들어 매려는” 시도라고 본다. 즉 거식증은 성숙한 여성이 되길 거부하는 소녀들의 질환이다. 


공주가 물레 바늘에 찔린 뒤 잠드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열다섯 살 소녀가 오래된 탑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 녹슨 열쇠를 돌린 뒤 작은 방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노파의 안내로 물레를 만지다가 바늘에 찔린다는 설정이 가진 성적 함의는 분명해 보인다. 성숙한 여성이 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공주는 이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냥 잠들어버리길 택한다. 이와 함께 아버지를 비롯한 성 안의 모든 사람, 동물이 잠든다. 공주가 성장을 멈추었으므로, 공주를 보호하는 의무도 잠시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녀에 의해 키워진 뒤 열두 살이 되자 입구가 없는 탑 안에 갇힌 채 길게 기른 머리를 내려뜨려 사람을 올라오게 하는 ‘라푼첼’은 극진한 혹은 지독한 모성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를 간절히 원한 어머니는 임신 기간중 이웃집 마녀의 정원에 있던 라푼첼(들상추)을 먹고 싶어한다. 라푼첼을 따러갔다가 마녀한테 걸린 아버지는 무사히 풀려나는 대신 곧 세상에 나올 아이를 마녀에게 주기로 한다. 


이 이야기속 어머니는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을 해소하는데 실패한 여성이다. 남편 역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여성은 아이를 자신의 구원자로 기대한다. ‘재투성이’에서 생모와 계모가 하나일 수 있듯, ‘라푼첼’에서 어머니와 마녀는 하나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이를 데려간 마녀-어머니는 남편을 이 진득한 모녀 관계에서 추방한 셈이다. 실제 라푼첼은 마녀를 ‘대모님’이라고 부른다. 


‘가시장미 공주’의 왕이 딸을 속박했듯, ‘라푼첼’의 마녀 역시 딸을 가둔다. “태양 아래 가장 아름다운 아이”로 자란 라푼첼은 마녀-어머니의 긍지다. 이 딸에게 외간 남자, 즉 지나가던 왕자가 찾아오자 마녀는 불같이 화를 낸다. “어머니는 라푼첼의 삶이자 죽음이고, 집이자 감옥이고, 낙원이자 무덤이며, 신이자 악마이고, 천상이자 지옥”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녀-어머니 아래 자라난 라푼첼 역시 온전히 성숙하지 못하고 결구구 ‘마녀화’된다. 이는 라푼첼을 내쫓고 탑 안에 들어앉은 마녀에 대한 왕자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왕자는 마녀의 악담을 묵묵히 들은 뒤 절망해 탑 아래로 몸을 던져 눈을 잃는다. 


만약 그가 진정 ‘왕자’라면, 마녀의 악담 따위가 왜 두렵겠는가. 왕자가 마녀에게서 도망친 이유는, 사실 그녀가 라푼첼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어제의 부드러운 연인 라푼첼이 오늘 분노에 떠는 마녀가 된 것이다. 왕자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라푼첼의 자아라면, 어머니에게 향하지 않는 모든 사랑을 벌하려는 것은 라푼첼의 초자아다. 비극적인 모녀의 드라마는 이렇게 완성된다. 


드레버만은 정신분석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들을 상담했다. 특히 여성들의 고민을 동화 속 주인공들에게서 찾을 수 있음을 파악했다. ‘재투성이’처럼 자존감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여성, ‘가시장미 공주’ 같은 ‘파파걸’, ‘라푼첼’ 같은 ‘마마걸’은 현대 사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동화 속 여성들은 대체로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분명한 것은 행복이 스스로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컴플렉스를 명확히 인지하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재투성이’처럼 스스로 얼굴을 씻고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여성. 정신분석가는 동화를 통해 웅크린 여성을 쿡 찌를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