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에 해당되는 글 4건

  1. 테드 창과 김초엽
  2. 히트 예감! '종이 동물원'
  3. 문화혁명과 SF의 상상력 '삼체'
  4. SF? 로맨스! '스타터스'

 

두 권의 SF를 잇달아 읽다. 테드 창의 신작 '숨'(엘리)과 김초엽의 데뷔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딱히 비교해 읽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테드 창의 작품을 다 읽어가는 시점에 김초엽의 책이 손에 들어왔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세간의 평만큼 좋게 읽지는 않았다. 어떤 작품은 너무 길다고 느꼈다. '보르헤스가 5페이지에 쓸 이야기를 50페이지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영화 '컨택트' 덕분에 뒤늦게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주목받기도 했지만, 난 여전히 아서 클라크에 더 끌리는 사람이다. 

'숨'을 읽은 뒤에는 '보르헤스 비교'는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아지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의 훌륭한 업데이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센테니얼맨'이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이를 질문함으로써 결국 인간의 조건에 대해 탐색한다면, '소프트웨어 객체...'는 프로그래밍된 버츄얼한 존재와 인간의 차이를 묻는다. 피와 살이 없는 존재 인간의 감정이 투여된다면, 물리적 실체를 갖지 않더라도 자아가 있다면, 그것의 존재적 위상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탐구한다. 그 탐구가 앙상한 개념을 넘어 튼실한 내러티브로 지탱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언어, 사실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사회학, 인류학, 문학 수업 시간의 교재로 쓰일 법하다. '옴팔로스'는 유사 종교 소설이다. 과학적 사고를 한계 너머로 밀어가려는 SF가 어느 순간 종교 전통과 만나는 것은 낯선 시도가 아닌데, 테드 창은 이 쪽으로도 재능이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최상급의 SF작가인 테드 창과 이제 첫 소설집을 낸 김초엽을 비교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도 테드 창에 뒤이어 읽으니, 김초엽의 글에서 어디가 문제인지 조금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 소설집에 담긴 작품 중 어떤 것들은 부실한 설계도를 따른 건물, 취재가 덜된 기사 같았다. 작품의 과학적 배경이나 플롯의 논리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테크닉에 의지해 마무리지은 듯한 글들이 있다. (작가가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 혹은 작가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독자는 완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 보완을 요구하는 건 최초의 독자인 편집자 몫이 아닐까. 한국의 문학 편집자에게 어느 정도의 재량이 주어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는 빛나는 글들이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관내분실'.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존재인 여성, 특히 엄마의 처지를 거대한 도서관에서 색인이 삭제된 채 방치된 책에 비유했다(이 작품에선 책이 아니라 생전의 두뇌를 사후에 데이터화한 정보로 은유된다).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거리의 유한성과 우주 여행의 무한성을 대비해 감정을 고조시키는 작품이다(영화 '인터스텔라'도 이런 테크닉을 썼다). '공생가설'도 흥미롭다.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작가는 '가장 즐겁게 썼던 글'이라고 말하는데, 읽는데도 즐겁다. 

 


'중국계 미국인 SF 작가'를 말할 때 당연히 떠올리는 사람은 영화 '컨택트'의 원작자 테드 창이다. 하지만 이제 떠올리는 사람을 바꿔야할지 모른다. '종이 동물원'(황금가지)의 켄 리우다. 

예전에 테드 창의 단편집을 읽었을 때도 불만이 좀 있었다. '이건 보르헤스가 7쪽 정도로 쓸 글을 50쪽으로 늘려놓은 것 아닌가?' 사변이나 아이디어는 뛰어나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선 삐걱대는 관절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켄 리우는 다르다.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그걸 능숙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때론 너무 능숙해 '반칙'이란 생각도 든다. 표제작 '종이 동물원'이 그런 느낌이다. 낯선 땅, 낯선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 어머니를 무시하고 멀리하다가, 뒤늦게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 주인공. 이런 이야기를 읽고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불쌍한 엄마' 이야기를 자주 쓰면 안된다. 동화 속 주인공이 궁지에 몰렸을 때 꺼내드는 비밀 주머니처럼, 프로페셔널한 작가라면 평생 단 한 번만 써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종이 동물원'은 재미있지만 조금 미심쩍었다면, 이어지는 단편들은 훌륭하다. 예를 들어 '레귤러'는 퇴직한 중국계 여성 경찰이 주인공이다. 이 시대에는 '레귤레이터'라 불리는 장치가 개발돼 있다. 이는 중추 신경 어딘가에 이식하는 장치로, 감정적인 반응을 조절한다. 그러므로 경찰, 판사 등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한 이성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들이 필수적으로 이식해야 하는 장치다. 특정 직업군의 사람에게 분명 도움이 되는 미래의 가상 기계 장치지만, 작가는 이를 역으로 인물의 단점, 소설의 소재로 활용한다. 레귤레이터로 가질 수 있는 능력의 양가적 면모를 모두 드러냄으로써 작품 전체를 쥐락펴락한다. 깊이 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잘 읽히는 소설이다. 작가가 이 주인공을 향후 장편에 재등장시킬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게 한다.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이나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파'는 조금 더 사변적인 소설이다. 생명체의 존재 양상, 인지의 다양한 방법 등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살핀다. 순수한 지적 즐거움을 위한 소설이다. 반면 역사에 뿌리 박은 단편도 꽤 있다. '파자점술사'는 미국의 반공정책이 현대 대만에 미친 비극,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731부대와 위안부 문제를 다룬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는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와 뉴딜 정책에 대한 대체 역사 소설이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미국과 일본, 중국을 잇는 태평양 횡단 지하 터널을 제안하고, 이에 따라 2차 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한다. 물론 전쟁은 없었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착취는 그대로였고, 공산주의자 포로들과 식민지의 징용인들, 위안부들에 대한 인권 유린은 2차 대전이라는 분기점에 의해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묻혔다. '모노노아와레'는 애상에 젖은 일본적 미의식과 우주 공간에서의 영웅적 희생을 정밀하게 교차했는데, 하이쿠처럼 어느 한 부분 빼기 힘든 꽉 짜여진 소설이다. 켄 리우의 단편 선집과 장편이 조만간 나온다고 한다. 꾸준히 살필 예정이다.  





***스포일러 있음. 

SF 업데이트의 일환으로 중국 소설 '삼체'(류츠신, 삼체)를 읽다. 중국 SF로는 처음으로 2015년 휴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읽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접한 '삼체'라는 게임 공간의 묘사가 그렇다. '삼체'는 일종의 가상현실 게임인데, 세 개의 태양이 불규칙하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움직여 안정적인 기후기와 불안정한 기후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게이머는 이 공간의 규칙을 파악해 가급적 문명을 오래 지속시켜야 한다. 주왕, 복희, 코페르니쿠스, 뉴턴, 폰 노이만, 아인슈타인 등(의 아이디를 쓰는 게이머)이 등장해 세계의 규칙을 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그때마다 게임은 종료돼 새로운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 제왕과 학자가 얽혀 우주의 법칙을 논하는 상황을 따라가긴 역부족, 요령부득이었다.  

하지만 게임 공간 묘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흥미롭다. 왕먀오라는 물리학자의 눈 앞에 갑자기 카운트다운이 보이면서 시작한다. 왕먀오는 이 이상한 현상의 원인을 추적한다. 그리고 예원제라는 원로 물리학자의 삶을 접한다. 예원제는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역시 저명한 물리학자였던 아버지를 잃었다. 10대의 홍위병들은 빅뱅, 상대성이론 같은 '반동이론'을 가르쳤다며 아버지를 쳐죽였다. 살아남은 예원제는 한 미사일 기지에 배치되는데, 이곳은 사실 군사 목적이 아닌 외계인과의 교신을 위해 세워졌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연구에만 몰두하던 예원제는 어느날 외계인의 메시지를 받는다. 외계인은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전제한 뒤, 자신의 세계가 안정적인 환경을 가진 행성을 찾고 있으며, 만일 지구를 발견한다면 그곳을 점령하려 할 것이고, 그러니까 다시는 자신이 있는 쪽으로 메시지를 발신하지 말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지구의 위치가 노출될 것이고, 곧 자신의 행성인들이 지구를 점령하려 찾아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세상에 환멸을 느끼던 예원제는 곧바로 메시지를 보내 어서 와서 지구를 정복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후 예원제를 수장으로 하는 삼체 조직은 급진적 지식인 모임이자 종교 조직으로 진화한다. 구원자 외계인을 기다리는 종교적 열정과, 지구의 종다양성을 훼손하는 인간을 저주하는 극단적인 환경론 등을 아우르는 조직이다.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지구의 각 나라 정부는 삼체 조직을 일망타진하려 하지만, 삼체 행성에선 이미 지구 정복을 위한 우주선을 보낸 뒤였다. 거리가 멀기에,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하기까지는 400년이 남았다. 삼체 행성에선 지구의 문명이 자신들을 막아낼만큼 발달할 것을 우려해. 이미 양성자 2개를 지구에 쏘아보낸 상태였다. 이 양성자는 정확한 물리적 측정을 방해하기에, 지구에선 이제 실험에 근거한 물리학이 설 자리를 잃는다. 물리학을 발달시키지 못하면, 문명도 발달할 수 없다. 

문화혁명의 기과한 열정과 그에 대한 환멸, 이에서 파생된 인류에 대한 저주, 그 저주의 수신자가 되는 외계인, 400년 뒤의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구인. 현재의 상황, 과거의 오류, 미래의 전망을 연결시키는 솜씨가 능란하다. 400년 뒤라는 멸망 시점을 100년 혹은 50년 혹은 10년 뒤로 하면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혁명의 광기에 대한 성찰이 성숙하다(시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인가).  과학적 관찰을 문명 발달의 근원으로 삼는 작가의 인식이 확고한데,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리사 프라이스의 '스타터스'(황금가지)를 읽다. SF라고 알고 읽었는데 사실은 로맨스다. 사실 '스타터스'가 SF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저 내가 잘못 알았을 뿐이다.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황금가지의 '블랙 로맨스 클럽'의 일환으로 나왔다. 그러니 'SF가 아니라 SF적 설정이 있는 로맨스였다'고 통탄해봐야 내 잘못이다. 

미래 어느 시기, 태평양 양쪽 국가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나 생물학 무기가 투하된다. 그 때문에 미국에는 '엔더스'라 불리는 노인들과 '스타터스'라 불리는 청소년, 어린이만 살아남는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과학적 설명은 생략돼있다) 엔더스는 부유하고, 부모가 없는 스타터스는 가난하다. '스타터스'인 '나' 켈리는 큰 돈을 벌기 위해 잠시 위험한 아르바이트에 응한다. 이 아르바이트는 젊은 몸을 갖고 싶은 엔더스에게 일정 기간 동안 몸을 빌려주는 일이다. 엔더스의 의식이 스타터스의 몸으로 들어간 사이, 원래 스타터스의 의식은 어딘가에서 쉬고 있다. 물론 스타터스의 몸을 렌트한 엔더스는 기간 동안 몸에 흠집을 내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 얼마간 몸을 렌트해준 스타터스는 목돈을 만질 수 있다. 

'청년을 착취하는 노년'이란 알레고리가 너무나 확연하다. 확연한 것은 재미가 없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제몫을 인정받지 못하고 기성세대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의 청년들이 읽으면 더욱 실감을 느낄텐데, '스타터스'의 목적은 세대간 착취의 폭로가 아니라 로맨스다. 

켈리를 둘러싸고 두 남자가 경쟁한다. 물론 둘 다 멋지다. 거리에서 생활할 때 만난 마이클은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인데 다정다감하고 생활력이 강하다. 켈리의 몸이 렌트된 뒤 만난 블레이크는 부유하고 로맨틱하다. 블레이크 앞에서 켈리는 '신데렐라'가 된다. 심지어 '신데렐라'처럼 벗겨진 구두를 블레이크가 줍는 에피소드까지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안해도 신데렐라인줄 아는데) 그리고 블레이크의 정체에는 한 가지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이 켈리와의 로맨스를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든다. 성실한 남자와 로맨틱한 남자. 그 사이의 순진무구한 소녀. '엑스맨'의 울버린과 사이클롭스,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처럼, 작은 디테일만 바뀌는 굵직한 로맨스의 구도다. 

이 세상에서 엔더스는 대체로 막대한 부를 누린다. 그 부에 따른 물질세계의 묘사가 또 한 축이다. 켈리가 입는 아름답고 비싼 옷들, 착용하는 장신구들, 입안에서 녹는 음식들이 자주 묘사된다. 켈리를 씩씩하고 보호본능강하며 정의로운 소녀로 묘사한 것도 이 책의 독자층을 위한 설정이다. '헝거 게임'의 캣니스 에버딘들이 여기저기 출몰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핵심은 켈리와 블레이크의 로맨스. 아래와 같은 대목은 '스타터스'의 인장과도 같다. 


"블레이크는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는, 나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또 키스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 이상 좋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로도 그랬다. 나는 그 애의 목을 감싸 쥐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 애가 내 허리 부근을 안았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이 막힐 듯한 기분과 약간의 아찔함을 느끼면서 그 애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 애의 이마에 내 이마를 기댔다." 


아니면 이런 부분. 


"말 위에 앉아 있는 블레이크를 힐끗 바라보다가 그 애를 향해 미소 지었다. 블레이크 역시 미소로 답했다. 석양에 물들어 한쪽 얼굴이 붉어진 채 그 애는 그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블레이크로부터 나에게로 보이지 않는 따뜻한 광선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만약 이게 에어스크린 게임이었다면, 우리 사이에 조잡한 하트 아이콘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베껴쓰면서 손을 조금 떨었다. 요즘 초콜렛을 너무 많이 먹었나. 로맨스는 이렇게 쓰는 것이었군. 나는 3번쯤 환생해도 쓸 수 없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