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에 해당되는 글 247건

  1. 백색의 두 가지 방향, '눈'과 '흰'
  2. 모든 병사의 죽음, '전쟁의 재발견'
  3. 자연에 끼어든 초자연, 스티븐 킹의 '아웃사이더' (2)
  4. 테드 창과 김초엽
  5. 줌파 라히리의 세계
  6. 고통스러운 삶에 익숙해지기, '부서지기 쉬운 삶'
  7. 80일간의 어둠, '극야행'
  8. 인사이트 있는 교양서, '앞으로의 교양'
  9.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
  10. '왕좌의 게임' 작가의 호러SF, '나이트플라이어'
  11. 히트 예감! '종이 동물원'
  12. 패러디와 통찰 사이, '생명창조자의 율법'
  13. 문화혁명과 SF의 상상력 '삼체'
  14. 가장 이상한 도시들,'이중도시'
  15. '너는 여기에 없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
  16. 비 오는 밤의 꿈같은 인생, '나, 제왕의 생애'
  17. 앞선 문명으로부터 뒤처진 문명에게,'중력의 임무'
  18. 스와핑, 섹스봇, 신경개조, 감옥실험...'심장은 마지막 순간에' (1)
  19. 인간관계의 총합 '검의 폭풍'
  20. SF? 로맨스! '스타터스'
  21. 난삽하지만 신랄하고 철저하고 까끌까끌한, '유령퇴장'
  22. 식물도 죽이지 말라 '세계 종교의 역사'
  23. 건달과 식당주인과 그 아내와...'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24. 위대하지도, 굴욕적이지도 않은 삶 '스토너'
  25. 어처구니 없는 극우의 스케일,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26. 데이비드 밴의 악스트 인터뷰 중 발췌. 13살때 아버지가 자살한 작가의 이야기.
  27. 오래 살자, 살아서 말하자, '눈먼 암살자'
  28. 기자와 작가, '헤밍웨이의 말'
  29. 삶은 고된가, 김훈의 '공터에서'
  30. 요점 정리의 대가,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지난해 김민정 시인은 인터뷰하는 자리에 넓직한 교정지를 들고 왔다. 무슨 책이냐 물어보니 곧 나올 막상스 페르민의 '눈'(난다)이라고 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인 책이라고 자랑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작가 한강에게 이 책을 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페르민은 처음 듣는 작가라 이름만 기억했다. 인터뷰 다음 달 '눈'이 출간됐으나, 곧바로 집어들만큼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여름 막바지가 돼서야 챙겨두었던 '눈'을 펼쳤다. 

 

1999년 출간된 책이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124쪽에 불과하고, 게다가 행간이나 여백이 넓어 텍스트는 더욱 적다. 마음 먹으면 1시간 이내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책을 '마음 먹고' 읽을 이유는 없다. 책에 여백이 많다는 건 그만큼 독서에도 여백을 주라는 지침일 것이다. 

 

프랑스 작가의 소설이지만 19세기 후반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하이쿠와 눈을 사랑하는 청년 유코 아키타가 주인공이다. 유코가 승려나 군인이 되길 원하는 아버지는 시인이 되겠다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아버지가 말하자 아들이 답한다.

"시인은 직업이 아니야. 시간을 흘려보내는 거지.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흘러가는 물이다. 이 강물처럼 말이야."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눈을 좋아하는 유코는 눈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서만 시를 쓰겠다고 결심한다. 봄이 오면 벚꽃 잎의 향을 맡고 ,여름이 되면 숲에서 꿀 향기를 맡고, 우기에는 버섯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겨울이 되면 눈에 관한 하이쿠를 썼다. 그러던 중 유코의 집에 궁정 시인이 찾아온다. 궁정 시인은 유코가 서예, 회화, 춤에 대해 무지하고, 유코의 시에 색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더욱 수련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유코는 내키지 않았지만 궁정 시인의 권유에 따라 남쪽의 소세키 선생을 찾아나선다. 

 

여기까지가 도입부고, 이후엔 유코와 전직 무인이자 현직 예술가인 소세키, 소세키와 프랑스 출신 곡예사 여성의 사랑, 유코가 예기치 않게 둘의 운명에 개입하는 과정, 유코가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솔직히 도입부 이후는 도입부만큼 인상적이지 않았다. 책의 이미지나 부피에서 조금 더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이야기를 기대한 것 같다. 소세키와 곡예사의 사랑은 동화적으로 그려지는데, 시의 본질이나 눈에 대한 탐구를 그린 도입부와 잘 접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친 김에 한강의 '흰'(문학동네)도 사서 읽었다. 이 책의 편집자 역시 김민정이다. 내가 구입한 건 지난달 나온 2판 6쇄다. 2판엔초판에 없던 '작가의 말'이 실려 있다. 그리고 '작가의 말'은 책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흰' 역시 '눈'처럼 시적이고 짤막한 소설이다. ('흰'은 196쪽이다.) 물론 흰 색을 소재로 한다는 점을 빼고 둘은 크게 다른 소설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하얀'과 '흰'을 구분한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작가는 '흰' 책을 쓰기로 하고 소재의 목록을 만들어간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수의...

 

픽션에서 작가의 자전적 삶을 읽어내는 건 부질없고 무용하겠지만, '흰'에는 작가의 경험담이 크게 들어있는 것 같다. 추정컨대 작가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한동안 머물며 이 책을 썼다. 그곳은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본보기 절멸 도시로 지적돼 95%가 파괴됐다. 조금 스산하고 한적한 도시에서 작가는 두통에 시달리며 글을 쓴다. 무엇보다 그 글은 작가의 어머니가 스물 네살 때 혼자 있다가 조산한 큰 딸, 두 시간 동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속삭였지만 끝내 떠난 아기에 관한 것이다. 어머니는 이듬해 두번째로 낳은 사내 아기를 또다시 잃었고, 그로부터 3년이 흘러 '나'를, 또 4년이 흘러 남동생을 낳았다. 앞선 두 생명이 살았다면, 화자와 그의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어머니도 임종 직전까지 "그 부스러진 기억들을 꺼내 어루만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에게 죽은 언니는 일종의 빚이고, 화자는 죽은 언니 대신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작가의 말'에서 전한 것처럼, '흰'은 죽음과 애도에 대한 글이다. 하지만 꺼이꺼이 통곡하지는 않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상을 살면서 문득 생각하고 애도한다. 낯선 동유럽의 도시를 산책하면서, 조금씩 춥고 어두워지는 도시의 분위기에 침잠하면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두통을 견뎌내면서 애도한다. 순진하게 예쁜 '하얀'이 아니라, 먹먹한 '흰' 글을 쓴다. '흰'은 한강의 전작보다 조금 더 개인적인 글이겠지만, 거창하게 말하면 존재의 부채의식을 드러낸다. 우리의 삶이 거저 주어진 것,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누군가의 희생이나 죽음에 기반한다는 인식, 개인적이라고 사소하진 않다. 

 

마이클 스티븐슨의 '전쟁의 재발견'(교양인)을 읽다. 오랜만에 읽은 흥미진진한 논픽션. 원제는 'The Last Full Measure: How Soldiers Die in Battle'이다. 말 그대로 고대 전투 서사시 '일리아스'부터 현대 베트남전, 이라크전까지 전쟁에서 군인들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 그린다. (번역제목을 좀 점잖고 심심하게 달았다.) 이런 설명만 들으면 흔하고 말초적인 미시사 서술 같은데, 막상 읽으면 방대하게 수집돼 적절하게 배치된 자료에 감탄하고, 자료를 관통하는 저자의 안목에 또 감탄한다. 분량이 648쪽이라 들고 다니며 읽기는 좀 버거운데, 그래도 오래 걸리지 않아 완독했다. 

 

청동기부터 무기가 조금씩 발달하면서 죽음의 방식도 달라지는 양상을 서술한다. 1대1의 전투를 선호하던 중세 기사들은 멀리서 쏘아 죽일 수 있는 화살이나 머스킷총을 비겁하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윤리의 기준을 뒤바꾸기에, 기사들의 불평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면 돌격'의 이상 역시 조금씩 쇠퇴한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적과 아군, 군과 민간의 구분이 뚜렷했으나,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에 이르러 민간인 소년이 갑자기 전투원으로 돌변하는 등의 일이 벌어진다. 미군은 군인과 구분되지 않는 민간인 여성, 미성년을 전투원처럼 대한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의 원인을 베트남, 이라크 등 피침략 국가의 게릴라전술 때문으로 돌리는 서술은 조금 거북하지만, 이 책이 정치서가 아니라 전쟁사라는 점은 감안해야 하겠다. 

 

산업화, 대량생산의 시기로 접어든 20세기 전투의 양상이 고전적일리는 없다. 19세기까지 전쟁의 양상이 점진적으로 변화했다면, 20세기는 급진적으로 달라졌다. 무기의 성능이 갑작스럽게 발달하면서, 많은 전투인력이 짧은 기간에 '소모'되는 전면전이 전개된다. 패전하면 말할 것도 없고, 승전해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피할 수 없다. 2차 대전 때는 1600만명이 죽었다. 소련은 승전국이 됐지만, 그건 다른 연합국의 사망자를 합친 것보다 10배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 '총 든 고깃덩어리'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 어떤 영광과 명예의 수식을 붙여도 달라지지 않는 진실이다. 

 

 

 

스티븐 킹의 신작 '아웃사이더'(황금가지)를 읽다. 72세의 킹은 여전히 다산이다. 꽤 두꺼운 장편을 별다른 공백기 없이 매년 펴낸다. '아웃사이더'는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됐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올해도 또다른 장편이 예정된 모양이다. 내년엔 '아웃사이더' 중반부에 등장하는 홀리 기브니를 내세운 또다른 소설이 나온다. 예전에 미국의 장르 소설 작가는 이름을 내세운 기업처럼 작동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혹시 스티븐 킹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자료를 조사해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소도시의 리틀 야구단 코치이자 교사가 끔찍한 소년 성폭행 살해범으로 백주에 체포된다. 경찰들은 그를 범인으로 확신해 야구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는 구장에서 눈에 띄게 망신을 주며 체포한다. 코치가 당일 살해된 소년과 관련이 있음을 증언하는 수많은 목격자가 있다. 하지만 평범한 가정의 성실한 아버지인 코치는 이 모든 혐의를 부인한다. 소년이 살해되던 날 코치는 인근 소도시에서 다른 교사들과 함께 한 작가의 강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함께한 교사들과 지역 방송사 카메라에 잡힌 모습이 그의 알리바이를 증명한다. 용의자가 같은 시각 두 군데서 목격된 사건. 검찰과 경찰은 당황하면서도 형사 사법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려 한다. 하지만 검사가 의도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게 연출한 피의자 이송 과정에서, 피해자의 형이 코치를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은 애매하게 묻힐 뻔하지만, 킹은 소설 중간쯤 이야기의 급커브를 튼다. 

 

여느 추리 작가였다면 한 사람이 두 장소에 있는 트릭을 만들고 깨기 위해 온갖 언어적, 물리적 장치를 설치해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45년의 작가 경력 동안 독자를 소름끼치게 하는 이야기를 써나가며 즐거워했던 킹은 자신의 장기로 이 트릭을 훌쩍 뛰어넘는다. 자연적 이야기에 초자연적 설정을 도입하는 것이다. 아마 기존의 추리 작가였다면 '반칙'이라고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밀실 살인 사건을 그린 추리 소설에서 유령이 벽을 뚫고 들어와 살인을 저질렀다고 결말을 내버린다면, 그건 반칙 아닌가. 킹은 개의치 않는다. '스티븐 킹의 첫 탐정 추리소설'이라고 했던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도 은근 슬쩍 킹의 호러 장기가 드러난 적이 있지만, '아웃사이더'처럼 노골적으로 초자연적 존재를 도입한 적은 없다.

 

'아웃사이더' 중반부에 나타나는 홀리 기브니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 시작하는 빌 호지스 3부작의 조연 캐릭터였다. 호지스 3부작의 끝에 호지스가 죽었기에 기브니도 그대로 사라질 뻔 했지만, 킹은 신경 과민, 대인 기피 탐정이라 할 수 있는 기브니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번에 다시 기브니를 연결고리로 추리 소설을 썼다. 물론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추리 70에 호러 30이라면, '아웃사이더'는 그 반대 비율이다. 

 

 

 

 

 

 

 

두 권의 SF를 잇달아 읽다. 테드 창의 신작 '숨'(엘리)과 김초엽의 데뷔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딱히 비교해 읽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테드 창의 작품을 다 읽어가는 시점에 김초엽의 책이 손에 들어왔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세간의 평만큼 좋게 읽지는 않았다. 어떤 작품은 너무 길다고 느꼈다. '보르헤스가 5페이지에 쓸 이야기를 50페이지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영화 '컨택트' 덕분에 뒤늦게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주목받기도 했지만, 난 여전히 아서 클라크에 더 끌리는 사람이다. 

'숨'을 읽은 뒤에는 '보르헤스 비교'는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아지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의 훌륭한 업데이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센테니얼맨'이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이를 질문함으로써 결국 인간의 조건에 대해 탐색한다면, '소프트웨어 객체...'는 프로그래밍된 버츄얼한 존재와 인간의 차이를 묻는다. 피와 살이 없는 존재 인간의 감정이 투여된다면, 물리적 실체를 갖지 않더라도 자아가 있다면, 그것의 존재적 위상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탐구한다. 그 탐구가 앙상한 개념을 넘어 튼실한 내러티브로 지탱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언어, 사실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사회학, 인류학, 문학 수업 시간의 교재로 쓰일 법하다. '옴팔로스'는 유사 종교 소설이다. 과학적 사고를 한계 너머로 밀어가려는 SF가 어느 순간 종교 전통과 만나는 것은 낯선 시도가 아닌데, 테드 창은 이 쪽으로도 재능이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최상급의 SF작가인 테드 창과 이제 첫 소설집을 낸 김초엽을 비교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도 테드 창에 뒤이어 읽으니, 김초엽의 글에서 어디가 문제인지 조금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 소설집에 담긴 작품 중 어떤 것들은 부실한 설계도를 따른 건물, 취재가 덜된 기사 같았다. 작품의 과학적 배경이나 플롯의 논리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테크닉에 의지해 마무리지은 듯한 글들이 있다. (작가가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 혹은 작가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독자는 완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 보완을 요구하는 건 최초의 독자인 편집자 몫이 아닐까. 한국의 문학 편집자에게 어느 정도의 재량이 주어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는 빛나는 글들이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관내분실'.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존재인 여성, 특히 엄마의 처지를 거대한 도서관에서 색인이 삭제된 채 방치된 책에 비유했다(이 작품에선 책이 아니라 생전의 두뇌를 사후에 데이터화한 정보로 은유된다).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거리의 유한성과 우주 여행의 무한성을 대비해 감정을 고조시키는 작품이다(영화 '인터스텔라'도 이런 테크닉을 썼다). '공생가설'도 흥미롭다.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작가는 '가장 즐겁게 썼던 글'이라고 말하는데, 읽는데도 즐겁다. 

 

 

줌파 라히리의 책 두 권을 잇달아 읽다. 사실 다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라히리에 대해 몇 자라도 적어놓고 싶다. 먼저 읽은 책은 신간 '내가 있는 곳'(마음산책)이었다. 인도계 영국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라히리는 어느날 갑자기 이탈리아어를 배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곤 한다는데, '내가 있는 곳'이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장편소설이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했지만,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낯선 도시에 머물며 얻어낸 짤막한 이야기들이 '보도에서' '길에서' '사무실에서' '수영장에서'와 같은 제목을 단 채 이어진 연작 형태다. 감각적이고 투명하고 단순한 문체로 삶의 감각을 전한다. 작가가 모어보다 덜 익숙한 이탈리아어로 썼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스타일이 그러한지 알 수는 없었다. 어떤 부분에선 한때 내가 열심히 읽었던 뒤라스의 문체가 느껴지기도 했다. 좋았다는 얘기다. 

 

줌파 라히리(1967~)

내친김에 2013년 펴낸 두번째 장편 '저지대'(마음산책)를 구매했다. 그런데 두께부터가 당황스러웠다. '내가 있는 곳'은 200쪽이지만, '저지대'는 548쪽이다. '내가 있는 곳'이 현대의 작가(혹은 교수)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저지대'는 1960년대 인도 낙살라이트 운동의 전조를 다루면서 시작한다. 낙살라이트란 인도 낙살바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마오쩌둥주의 운동으로, 무장봉기와 반정부 테러를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초반 4분의 1까지는 낯설었다. (여기 낙살라이트에 관심 있었던 분?) 하지만 라히리는 낙살라이트 운동의 전개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다. 이야기는 수바시와 우다얀이라는 형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수바시는 내성적이고 차분하지만, 우다얀은 활달하고 적극적이다. 수바시가 학업에 열중해 미국으로 유학가 해양학 박사가 된 사이, 우다얀은 인도에 남아 낙살라이트 운동에 투신한다. 우다얀의 지난한 투쟁기가 펼쳐지려나보다 하는 순간, 우다얀은 정부군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아직 소설 초반이다. 이제 라히리는 이야기의 방향을 튼다. 수바시는 우다얀의 아이를 임신한 처제 가우리를 미국으로 데려간다. 명목상 결혼으로 동생의 아이와 아내를 책임지려 한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수바시, 가우리, 그리고 가우리의 친딸이자 수바시의 양딸인 벨라의 이야기가 이후에 펼쳐진다. 이제부터는 인도의 고된 현대사와 큰 관계가 없다. 

아니, 있다. 상처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으니까. 멀찌감치서 낙살라이트 운동을 지켜본 수바시에게도, 신혼에 남편을 잃은 가우리에게도, 낙살라이트가 무엇인지, 수바시가 양아버지인지 모르고 자란 벨라에게도, 역사와 사회가 할퀸 흔적은 남았다. 라히리는 개인에게 미친 역사의 궤적을 세 사람의 기묘한 관계와 요동치는 마음으로 그려보인다. 엄마 가우리가 갑자기 가출한 뒤, 청소년기 들어 마음의 혼돈을 겪는 벨라는 상담가 닥터 그랜트를 만난다. 그리고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랜트 선생님은 그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겠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벨라가 어디를 가든 그 감정은 풍경의 일부를 이룰 거라고 했다. 벨라의 생각 속에 엄마의 부재가 항상 존재할 거라고 그랜트 선생님은 말했다. 엄마가 왜 떠났는지에 대한 답은 결코 찾지 못할 거라고 벨라에게 말했다. 

수바시가 왜 동생의 아내 가우리를 미국으로 데려왔는지, 왜 가우리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아이를 남겨두고 가출한 뒤에도 별다른 원망을 하지 않는지, 독자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그 짐작이 이끄는 수바시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 뿐이다. 엄마가 떠난 뒤 청소년기의 고비를 넘긴 벨라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갖지 않고 미국을 떠돈다. 아니 직장을 갖지 않았다는 건 편견어린 말이다. 벨라는 농촌 운동, 환경 운동 비슷한 흐름에 몸을 얹었다. 벨라의 선택도 이해할 수 있다. 역시 가장 공감이 어려운 건 가우리다. 어찌 보면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수바시를, 그리고 친딸을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 철학을 공부하며 독자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라히리는 가우리의 선택에도 논리적인 감정의 길을 만들었다.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감정, 역사와 세월이 할퀸 상처가 가우리를 그리로 이끌었다. 

'저지대'의 사람들은 애초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낸다. 가혹한 삶이었지만 그로부터 물러서지 않는다. 어찌 보면 우연 같은, 알고 보면 필연인 선택으로 삶을 이어간다. 소설 속 사람들은 이해못할, 낯선, 기괴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그걸 그냥 이상하고 충격적으로 그려내는 작가가 있고, 충분히 논리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도 있다. 물론 라히리는 후자다. 비논리적인 삶을 논리적으로 직관해낸다.  

 


미국의 철학자 토드 메이의 '부서지기 쉬운 삶'(돌베개)을 읽다. 원제는 'A Fragile Life: Accepting Our Vulnerability'다. 쉽게 말해 '철학 에세이'이라 할 수 있지만, 흔히 한국 출판계에서 '철학 에세이'라는 명명이 주는 어감보다는 무거운 책이다. 

저자는 철학이 이론의 전개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메시지여야 한다고 말한다. 강단의 학자들이 까다로운 개념어로 세심하게 다루는 '철학'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철학'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모두 삶의 메시지를 전했다. 메이는 해탈하지 못한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 상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색한다. 메이는 '희박하나마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철학적 관점 네 가지에 주목한다. 불교, 도교, 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주의다. 

불교는 만물이 변화한다고 본다. 여기 있는 노트북 컴퓨터와 테이블도 언젠가는 썩거나 부서져 다른 무언가로 바뀐다. 나는 파도 같은 존재다. 파도가 솟구칠 때는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바다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삶의 괴로움은 우주가 하나의 변화의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제로는 그저 이 과정의 한순간에 불과한 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난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한 방법이 명상이다. 명상은 외부에서 내부로의 방향 전환이 아니라, 외부에 대한 집착을 줄여나가는 훈련이다. 물론 불교도도 타자를 연민한다. 다만 그러한 연민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동정이 아니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평정에 기반한다. 

도교는 천지만물의 근원인 '도'를 말한다. 물론 '도덕경'의 첫 구절처럼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도는 인간의 언어가 쉽게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무위'(inaction 혹은 nonaction으로 번역된다고)를 통해서만이 우주를 과정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장자는 말한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탄식, 변덕과 집착, 경박함과 방종, 아첨과 아양은 음악 소리가 텅 빈 곳에서 나오고 버섯이 습기에서 생겨나듯 밤낮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모른다. 두어라! 두어라!"

스토아주의자들의 시각은 불교와 조금 비슷하다. 이들은 "삶은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에 최대한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익살을 섞지 말고 품위 있게 삶에 맞서라. 억눌리지 말고 희망을 높게 잡지도 말라. 승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극복하는 데 있다." 세상 온갖 악과 부조리와 고통은 예고 없이 우리를 습격하지만, 우리에겐 이에 맞설 별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세계의 관계, 즉 실존적으로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통제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우스조차 체념적으로 '명상록'에 적었다. "매일 아침 너 자신에게 말하라. 오늘 나는 참견하는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을, 오만한 사람을, 신의 없는 사람을, 악의 있는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훈련을 거듭했다. 이 역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고 체념하는 태도와 관련 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는 흔히 '향락주의자'라고 번역되지만, 맛있는 음식, 좋은 자동차,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에피쿠로스는 다음처럼 적었다. "욕망의 일부는 자연적이고, 일부는 근거가 없으며, 자연적 욕망에는 필연적인 것과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있다. 그리고 필연적인 욕망에는 행복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 있고, 육체를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 삶 자체를 위한 것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향락주의자'라는 명칭은 이 모든 욕망을 뭉뚱그려 합친다. 하지만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비싼 차를 사고 싶다는 '근거 없는 욕망'을 배격하고,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 욕망, 예를 들어 '성욕' 같은 것도 자제하라고 권한다. (결국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전혀 향락적이지 않다.)  모든 향락의 끝인 죽음에 대해서는 어떨까. 심플하고 논리적인 답이 준비돼 있다.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감각에 존재하고, 죽으면 감각이 상실"된다. 

언젠가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고 있다. 책을 읽고 그에 연관된 책을 살피는 식이다. 강하게 의식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책을 짚는다. 그러므로 '부서지기 쉬운 삶' 이후에 읽을 책은 오랫동안 회사 책상에 꽂혀 있던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이다. 




가쿠하타 유스케의 논픽션 '극야행'(마티)을 읽다. '극야'란 말이 낯설었는데, 대략 '백야'의 반대말이다. 북극 지역에서 해가 뜨지 않고 몇 달이고 밤만 계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논픽션 작가이자 탐험가인 가쿠하타는 북극 지역의 극야를 홀로 걷기로 하고 4년에 걸쳐 차근차근 준비한다. 부분적으로 직접 걸어 지형을 익히고, 곳곳의 창고에 식량과 물품을 저장한다. 100여년 전에야 북극점, 남극점에 가장 먼저 도달하려는 경쟁들이 있었지만, 이제 지구 표면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고, 지구에 기록되지 않은 곳도 없다. 이제 탐험가는 어디를 가야할까. 가쿠하타는 극야행의 의미를 다음처럼 정의한다. 

탐험은 요컨대 인간 사회 시스템 바깥으로 나오는 활동입니다. 옛날에는 탐험의 목적이 지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이었죠. 그때는 지도가 당대의 시스템이 미치는 범위를 도식화한 매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지도에는 공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탐험은 어떤 모습일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극야가 떠올랐습니다. 이번 탐험은 미답의 땅을 개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

매일 태양이 뜨는 건 얼마나 당연한가요. 우린 태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태양이 뜨지 않는 세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죠. 그 점에서 저는 극야 세계가 미지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120일 동안 밤뿐인 세계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극야의 세계로 나간다면 현대인이 잃어버린 자연과의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쿠하타가 북극의 극야를 80일간 헤맸다고 해서 어딘가에 '세계기록'으로 남을 리는 없다. 애초에 목적지가 불분명한 여정이었으니까. 가쿠하타는 그저 스스로 세운 '탐험'의 정의에 따라 북극을 떠돈다. 누가 뭐라하든, 스스로 설정한 장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생의 한 절정기와 많은 돈을 투자한다. (가쿠하타는 극야행이 자신 인생의 절정기에 도전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탐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쿠하타는 자기가 세운 목적을 이뤘을까. 쉬웠다면 책이 재미있을리 없다. 사람도 없고 불빛도 없는 끝없이 광활한 밤의 세계에서 인간의 감각은 혼돈에 빠진다. 작은 언덕이 거대한 산맥처럼 보이고, 바위 덩어리가 사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쿠하타는 몇 번이나 지역을 걸어 눈과 발로 익혔지만, 어둠은 여전히 가쿠하타를 속인다. 가쿠하타는 일부러 GPS도 가져가지 않았다. 특수제작한 육분의는 극야행 초반부에 잃어버렸다. 나침반과 별의 위치에 의존해 대략적인 방향을 잡고 걸었다. 빛이 없어 공간감을 상실한 순간, 가쿠하타는 자신의 실체를 잃어버린다. 

개 한 마리가 그의 유일한 동행이다. 어둠 속 눈보라 속에서 헤매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무렵 식량 저장고를 발견하지만, 북극곰이 털어간 지 오래다. 절망에 빠진 가쿠하타는 생존의 방법을 모색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개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개도 사료를 충분히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상태지만, 어쩔 수 없다. 책 후반부는 가쿠하타가 개를 잡아먹는 최후 수단만은 사용하지 않기 위해 야생동물 사냥에 전력하는 과정을 그린다. 물론 어두컴컴한 빙판 위에서 사냥이 잘 될 리는 없다. 

극한 고생이 이어지는 후반부는 처절하지만, 의외로 유머러스한 대목도 많다. 다 떠나서, 개 한 마리와 썰매를 번갈아 끌며 끝없는 어둠 속의 북극 지대를 헤매는 풍경만큼은 인상 깊다. 그런 체험을 들려준 사람은 아마도 없었으니까. 상상만해도 두렵고 외롭고 우울한 여정이다. 이런 탐험을 생각해내 실행하는 '예외적 인간'이 나타나는 사회도 대단하다. '인도방랑'의 후지와라 신야, 북극 사진가 호시노 미치오도 생각이 난다. 





스카쓰케 마사노부의 '앞으로의 교양'(항해)을 읽다. 일본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의 의뢰로, 편집자인 스가쓰케가 미디어, 디자인, 건축, 경제, 문학, 생명 등 12개 분야의 명사와 월 1회 대담을 했고, 그 중 11개를 묶어서 책을 냈다. 11명 중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건축가 이토 도요,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정도였다. 각 대담의 분량이 길지 않고, '일본책은 정리를 잘한다'는 인상이 있어, 우연히 입수하고 얼마 뒤 읽기 시작했다. 대담이 2016년 9월~2017년 9월 진행됐으니, 비교적 최근의 양상과 흐름에 대한 정보를 기대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의외로 인사이트가 있었다. 각 대담자 당 길지 않은 분량이다보니 간략하고 단정적이라는 인상도 없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책에 기대하는 바가 바로 그러한 간결함이다. 사전 조사를 많이 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쉬운 질문부터 던져나가는 인터뷰어의 태도가 좋았다(인터뷰어로서 이상적인 자세다). 구루인 양 허세 부리거나, 20~30년전 공부에 기대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변화를 읽어내려 고민하는 인터뷰이들의 태도도 좋았다. 나도 모르게 몇 군데 줄을 쳤다. 몇 문장 인용한다. 


개인의 개성이 사물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주관을 억제하고 사실을 담담하게 쓴 기사보다 글쓴이의 색깔이 드러나는 기사가 더 잘 읽히거든요. 

앞으로의 시대에는 기자보다 편집자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고, 더 덧붙이자면 편집자보다 편집자 겸 경영자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봅니다. (...) 오늘날에는 동영상, 음성, 사진, 문자, 이벤트 등 무수한 편집 대상이 있습니다. 게다가 각 분야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져서 다양한 분야를 연결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편집자는 이 좋은 재료를 활용할 줄 아는 요리사가 되어야 하죠. (미디어, 사사키 노리히코)



그 시대에 적합한 건물을 만들지 않으면 건축은 힘을 잃습니다. 즉 동시대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건축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클라이언트가 명확하지 않은 건축은 예외 없이 잘되지 않습니다. (건축, 이토 도요)



제 생각에 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거든요. 그분들은 모더니스트입니다. 가라타니는 이제 전형적인 이와나미-아사히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시대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대표로 일컬어져 왔지만, 사실은 1970년대 후반에 일본이 고도 소비 사회가 되면서 무척 복잡한 사회가 된 것, 즉 정보의 유통 경로가 너무 많아지고, 대중이 와해되어서 소위 '분중(分衆)'이 되어가는 현상에 대응하지 않은 분들인 거죠. 

결국 "대중이 지금 원하는 것은 이겁니다" 하고 눈에 보이게 드러내면, 우리 사회는 그것을 정의처럼 취급해버리죠.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요. 대중의 생각은 정의도 정답도 아니거든요. 그들의 생각을 가시화한 다음에 그것과 어떻게 거리를 둘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인간은 대체로 변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통치 기구를 운영해 나가야 하는 겁니다. (사상, 아즈마 히로키)


세계 상위 8명과 하위 50퍼센트의 재산 규모가 같아요. (...) 요점은 경제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극화 상황이라는 겁니다. 

일본은 은둔형 외톨이 증후군에 걸려서 자본주의라는 학교에서 졸업하고 싶지 않다고 뗴를 쓰고 있어요. 

결국 '더 빨리, 더 멀리, 더 합리적으로'라는 근대 사회의 원리에서 벗어나 '더 느리게, 더 가까이'를 실현해야 화석 연료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경제, 미즈노 가즈오)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은 나약하다는 전제하에 제도 및 환경을 설계해야 한다는 게 예방 의학의 기본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 대해 체념하고 있다고 할까요. (건강, 이시카와 요시키)


우리 뇌는 60만 년 전부터 더 이상 커지는 걸 그만뒀습니다. 대신 인간은 1500cc정도 되는 작은 뇌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언어를 만들어냈죠. 주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기억을 외부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책에 정보를 전부 넣어두면, 사람은 기억할 필요가 없죠.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생각하는 힘, 혹은 응용하는 힘입니다. (...) 하지만 인공 지능이 나오면 생각과 응용까지 외부에 위탁하게 될지도 모르죠. 우리가 뭔가를 원할 때, '당신이 원하는 게 이거죠?' 하고 외부에서 알려주면,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되니 그저 버튼 클릭으로 물건을 사버리는 겁니다. (인류, 야마기와 주이치)









에도가와 란포의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문학과지성사)를 읽다. 전자는 중편, 후자는 단편 분량이다. 두 편 합해서 150쪽이면 끝난다. 

에도가와 란포(1894~1965)는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상의 이름으로 알려진 작가다. 필명은 란포가 좋아했던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한국 독자들이 일본 추리소설을 읽으며 에도가와 란포부터 시작하는 경우는 없는 듯하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현대 작가 아니면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마스모토 세이초 정도겠지.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151권으로 나왔다. 대산세계문학총서는 해외 문학 중에서도 문학사적 의미가 있으나 국내 번역은 잘 되지 않은 작품 위주의 목록을 꾸린 것으로 알고 있다. 추리소설이 이 시리즈로 나왔다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읽어보니, 역시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는 추리소설가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지만,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읽으면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파노라마섬 기담'은 지역의 거부가 어느 작고 외딴 섬에 자기만의 기괴한 세계를 만들려다가 완성 직전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정체가 불분명한 화자가 이 섬의 사연을 들려준다. 거부가 죽은 뒤 그와 얼굴이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대학 동문이 소식을 듣는다. 이 동문은 이루고자 하는 바는 있으나 의지는 없는, 그래서 졸업 이후 몇 년째 빈둥거리는 사람이다. 이 남자는 섬뜩하다기 보단 황당한 계획을 떠올린다. 무덤을 파서 죽은 거부의 옷을 꺼내입고, 그가 덜 죽은 채 묻혀서 가까스로 살아돌아온 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그 돈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계획이다. 다들 이 황당한 계획에 속아, 남자는 순식간에 거부가 된다. 단, 거부의 아내만이 그를 수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런 황당한 음모가 꾸며지거나 밝혀지는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1926년 발표된, 거의 100년전 소설이니 추리의 전개나 논리에는 위화감이 있다. 정작 란포가 말하려고 한 바는, 남자가 갑자기 손에 쥔 막대한 부를 이용해 외딴 섬을 가꿔나가는 과정이다. '파노라마 섬'의 묘사가 기괴하고 현란하다. 섬의 입구에서 중심부까지 지하로 난 유리 통로같은 것이 있어 신기하다기보다는 기괴한 해양생물들을 눈으로 관찰할 수 있고, 나체의 여인들이 식물인듯 동물인듯 노예인듯 살고 있으며, 거리 감각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설계로 방향과 위치를 혼란에 빠트린다. 란포는 남자가 범죄의 추리보다는 이 섬을 묘사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상상해낸 파노라마 섬의 묘사에 흐믓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작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래된 문예사조에서 따온다면 '탐미주의' 같은 말을 붙일 수도 있겠는데, 색깔은 눈이 아프고 향은 메스껍다.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같은 말을 지어내고도 싶다. 


에도가와 란포

'인간 의자'는 그보다 짤막하고 확실하게 변태적이다.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못생긴 남자가 주인공이다. 이 남자는 손재주가 좋아 그럴듯한 의자를 만드는 기능공이 된다. 어느날 남자는 외국인이 주문한 제법 큰 가죽 의자를 만든다. 남자는 그 의자 안에 들어가 외국인의 집으로 침입할 생각을 한다. 스프링 같은 부품을 일부 제거하고는 그 안에 들어가 앉는다. 그리고 의자 속에서 의자에 앉는 사람의 몸을 느끼고는 좋아한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좋아한다. 유럽 어느 강국의 대사가 앉았을 때는 가죽 뒤에서 칼로 푹 찌르고 싶다는 상상을 하고, 어느 유럽의 여자 댄서가 앉았을 때는 '이상적인 육체미의 감촉'을 느끼며 '예술품을 대할 때와 같은 경건한 마음'을 느낀다. (특히 서양 여자들의 육체에 대한 찬사가 가득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이 떠오르기도 한다. '미친 사랑'은 1947년에 나왔으니, 1925년 나온 '인간 의자'에 비하면 꽤 늦었다. 아니, 서양 여자의 육체에 대한 매혹은 일본 남성 소설가들의 전통 같은 것이라 해야 하나) 결국 '인간 의자'는 그 단편을 읽는 여성 소설가의 의자에 남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아이디어로 끝나는 척 하다가 안전 장치를 마련하는데, 김기영의 '하녀'가 마지막에 기묘한 영화에서 빠져나오는 척 하면서 관객을 놀리는 것 비슷한 효과다. 하고 싶은 변태적인 이야기는 다 했으니, 작가는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닌 듯 시치미를 뗸다. 

하긴, 조금이라도 추종자가 나오면 금세 낡아보이는 어정쩡한 소설보다는 무엇이든 색깔이 강한 글이 낫겠지. 그 색깔이 좀 이상하다 하더라도. 




***스포일러 있음

조지 R R 마틴의 '나이트플라이어'(은행나무)를 읽다. 이제 마틴은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로 더 유명하다. '나이트플라이어'는 '왕좌의 게임'을 쓰기도 전인 1985년 선보인 작품이다. '왕좌의 게임'은 서양 중세를 연상시키는 판타지물인데, '나이트 플라이어'는 미래의 우주선 내부를 배경으로 하는 호러SF다. 물론 두 작품 다 잔혹하다. 사실 '나이트플라이어'가 더 잔혹하다. 머리통이 갑자기 터지고, 레이저가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가르고, 처리되지 않은 뼈조각, 살점, 눈알 등이 무중력 상태의 우주선 안에 둥둥 떠다닌다.

몇 만 년동안 이동하고 있는 신비의 외계 종족 볼크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우주선 나이트플라이어에 오른 여러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초능력자가 주인공이다. 나이트플라이어에는 선장 로이드가 이미 탑승중인데, 그는 왠일인지 우주선 반쪽을 홀로 사용하면서 홀로그램으로만 탑승객들 앞에 나타날 뿐 실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로이드가 정체를 숨기며 대는 이런저런 핑계는 영 미심쩍다.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초능력자가 자꾸 근원이 명확하지 않은 불길한 예감을 말하다가 결국 머리가 터져서 죽는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남은 과학자들은 하나 둘씩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또 각자 잔혹한 방법으로 죽어간다. 그 와중에도 외계 종족 볼크린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고, 로이드의 정체는 여전히 미심쩍다. 

괴물 또는 살인마가 나타났을 때 문을 열고 어딘가로 멀리 도망가 버리면 공포영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도망칠 곳 없는 폐쇄 공간인 우주선은 그래서 공포물에 괜찮은 공간이다. '에이리언' 시리즈나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영화들은 밀폐된 우주선 내부의 공포를 잘 살렸다. '나이트플라이어' 역시 우주선을 배경으로 한 호러SF의 전형적 코드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로이드와 나이트플라이어호의 정체에 대해선 약간의 반전이 있다. 너무 놀란 정도는 아니지만, 기대치 못한 정도이기는 하다. 생전의 정신이나 마음을 데이터화해 기계 내부에 보존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아이디어가 '나이트플라이어'에 고유한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전 미치오 카쿠의 '마음의 미래'를 읽은 덕에 이것이 물리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니 좀 더 흥미로웠다. 물론 당장 쉽게 실현할만한 기술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로는 충분히 가능하고, 언젠가 누구나 쉽게 그 기술을 이용할만큼 보편화될 수도 있다. 과거엔 기술적으로 까다로워 매우 소수의 훈련받은 이들만 다룰 수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쉽게 다루거나 저렴한 비용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분야가 꽤 많다. 영화 촬영이나 편집이 그렇고, 사제 폭탄, 유전자 분석 같은 것도 그렇다. 인류의 통념과 윤리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소수의 극단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는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런 한 두 사람이 세상을 멸망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 현대 세계다.  

나이트플라이어의 비밀이 밝혀지는 대목은 그럴듯하지만, 볼크린과의 만남은 조금 얼버무린 것 같다. 아마 이 책이 근간하는 '천 개의 세계' 시리즈의 다른 책을 읽으면 좀 명확해질지도 모른다. 신비한 존재와의 만남이라고 해서 모호하게 서술해도 되는 건 아니다. 

마침 '나이트플라이어'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돼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도입부 10분을 본 뒤,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세상에는 영상물이 너무 많고, 볼만한 영상은 너무 적다. 초반에 확실한 각인을 주지 않으면, 더 이상 볼 의지가 사라진다. 





 




'중국계 미국인 SF 작가'를 말할 때 당연히 떠올리는 사람은 영화 '컨택트'의 원작자 테드 창이다. 하지만 이제 떠올리는 사람을 바꿔야할지 모른다. '종이 동물원'(황금가지)의 켄 리우다. 

예전에 테드 창의 단편집을 읽었을 때도 불만이 좀 있었다. '이건 보르헤스가 7쪽 정도로 쓸 글을 50쪽으로 늘려놓은 것 아닌가?' 사변이나 아이디어는 뛰어나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선 삐걱대는 관절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켄 리우는 다르다.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그걸 능숙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때론 너무 능숙해 '반칙'이란 생각도 든다. 표제작 '종이 동물원'이 그런 느낌이다. 낯선 땅, 낯선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 어머니를 무시하고 멀리하다가, 뒤늦게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 주인공. 이런 이야기를 읽고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불쌍한 엄마' 이야기를 자주 쓰면 안된다. 동화 속 주인공이 궁지에 몰렸을 때 꺼내드는 비밀 주머니처럼, 프로페셔널한 작가라면 평생 단 한 번만 써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종이 동물원'은 재미있지만 조금 미심쩍었다면, 이어지는 단편들은 훌륭하다. 예를 들어 '레귤러'는 퇴직한 중국계 여성 경찰이 주인공이다. 이 시대에는 '레귤레이터'라 불리는 장치가 개발돼 있다. 이는 중추 신경 어딘가에 이식하는 장치로, 감정적인 반응을 조절한다. 그러므로 경찰, 판사 등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한 이성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들이 필수적으로 이식해야 하는 장치다. 특정 직업군의 사람에게 분명 도움이 되는 미래의 가상 기계 장치지만, 작가는 이를 역으로 인물의 단점, 소설의 소재로 활용한다. 레귤레이터로 가질 수 있는 능력의 양가적 면모를 모두 드러냄으로써 작품 전체를 쥐락펴락한다. 깊이 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잘 읽히는 소설이다. 작가가 이 주인공을 향후 장편에 재등장시킬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게 한다.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이나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파'는 조금 더 사변적인 소설이다. 생명체의 존재 양상, 인지의 다양한 방법 등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살핀다. 순수한 지적 즐거움을 위한 소설이다. 반면 역사에 뿌리 박은 단편도 꽤 있다. '파자점술사'는 미국의 반공정책이 현대 대만에 미친 비극,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731부대와 위안부 문제를 다룬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는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와 뉴딜 정책에 대한 대체 역사 소설이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미국과 일본, 중국을 잇는 태평양 횡단 지하 터널을 제안하고, 이에 따라 2차 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한다. 물론 전쟁은 없었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착취는 그대로였고, 공산주의자 포로들과 식민지의 징용인들, 위안부들에 대한 인권 유린은 2차 대전이라는 분기점에 의해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묻혔다. '모노노아와레'는 애상에 젖은 일본적 미의식과 우주 공간에서의 영웅적 희생을 정밀하게 교차했는데, 하이쿠처럼 어느 한 부분 빼기 힘든 꽉 짜여진 소설이다. 켄 리우의 단편 선집과 장편이 조만간 나온다고 한다. 꾸준히 살필 예정이다.  





제임스 P 호건의 1983년작 SF '생명창조자의 율법'(폴라북스)을 읽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중세 지구 수준의 문명을 갖춘 로봇 생태계가 발견된다는 전제가 흥미롭다. 폰 노이만의 무한 자기복제기계 개념에 근거해 타이탄에서 스스로 진화하고 번식한 기계 생태계를 묘사하는 프롤로그가 얼마나 정확한지 궁금하기도 하다. 

발달한 지구인과 그에 뒤쳐진 기계의 구도는 제국주의 서구와 피식민지 비서구 구도의 명확한 패러디다. 제국주의 정책을 편 서구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적, 정치적 움직임이 있었듯, 지구인들 중에서도 '탈로이드'(타이탄의 기계 개체를 이렇게 부른다) 세계를 전적인 자원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이 있고 탈로이드를 독자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해야할 개체로 보는 이들이 있다. 지동설이나 훗날의 진화론이 종교 기득권층의 탄압을 받았듯, 탈로이드 세계에서도 실험과 관찰과 논리적 추론에 근거한 사유는 배척받는다. 억압적인 국가, 비교적 자유롭게 사상을 보장하는 국가, 과학자 탈로이드, 종교 탈로이드 등이 엮여 펼치는 갈등이 다른 한 축이다. 

다만 지구의 중세를 패러디한 탈로이드 세계의 묘사에는 패러디 이상의 새로운 통찰은 없어 보인다. 인간이 기계로, 지구가 타이탄으로 바뀌어 서술될 뿐이다. 모세가 십계를 받는 장면의 묘사도 조금 웃길 뿐이다. 기적과 영성을 믿고 경전의 문자적 해석에 치중하는 한 탈로이드가 결국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전개는 '역시 SF는 과학의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유리 겔라를 연상케하는, 심령술사를 자처하는 잠벤도르프를 지구인측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독특하다. 잠벤도르프는 물론 진짜 초능력을 가진 건 아니고, 유능한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피관찰자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많이 모으는 능력, 이를 대중 앞에 극적으로 연출하는 능력을 가진 엔터테이너다. 우주탐사 기업의 진짜 목적을 안 잠벤도르프는 탈로이드를 이해하고 그들을 도우려 한다. 작가는 초능력, 영성, 종교의 힘 등은 믿지 않는 대신, 이미지 연출이나 여론의 중요성은 강조하고 있다. 초능력자가 아니라 그 어떤 권위 있는 종교인이라도, 결국은 인간의 논리적 취약성, 결핍, 의존성을 이용하는 엔터테이너라고 여기는 듯하다. 





***스포일러 있음. 

SF 업데이트의 일환으로 중국 소설 '삼체'(류츠신, 삼체)를 읽다. 중국 SF로는 처음으로 2015년 휴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읽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접한 '삼체'라는 게임 공간의 묘사가 그렇다. '삼체'는 일종의 가상현실 게임인데, 세 개의 태양이 불규칙하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움직여 안정적인 기후기와 불안정한 기후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게이머는 이 공간의 규칙을 파악해 가급적 문명을 오래 지속시켜야 한다. 주왕, 복희, 코페르니쿠스, 뉴턴, 폰 노이만, 아인슈타인 등(의 아이디를 쓰는 게이머)이 등장해 세계의 규칙을 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그때마다 게임은 종료돼 새로운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 제왕과 학자가 얽혀 우주의 법칙을 논하는 상황을 따라가긴 역부족, 요령부득이었다.  

하지만 게임 공간 묘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흥미롭다. 왕먀오라는 물리학자의 눈 앞에 갑자기 카운트다운이 보이면서 시작한다. 왕먀오는 이 이상한 현상의 원인을 추적한다. 그리고 예원제라는 원로 물리학자의 삶을 접한다. 예원제는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역시 저명한 물리학자였던 아버지를 잃었다. 10대의 홍위병들은 빅뱅, 상대성이론 같은 '반동이론'을 가르쳤다며 아버지를 쳐죽였다. 살아남은 예원제는 한 미사일 기지에 배치되는데, 이곳은 사실 군사 목적이 아닌 외계인과의 교신을 위해 세워졌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연구에만 몰두하던 예원제는 어느날 외계인의 메시지를 받는다. 외계인은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전제한 뒤, 자신의 세계가 안정적인 환경을 가진 행성을 찾고 있으며, 만일 지구를 발견한다면 그곳을 점령하려 할 것이고, 그러니까 다시는 자신이 있는 쪽으로 메시지를 발신하지 말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지구의 위치가 노출될 것이고, 곧 자신의 행성인들이 지구를 점령하려 찾아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세상에 환멸을 느끼던 예원제는 곧바로 메시지를 보내 어서 와서 지구를 정복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후 예원제를 수장으로 하는 삼체 조직은 급진적 지식인 모임이자 종교 조직으로 진화한다. 구원자 외계인을 기다리는 종교적 열정과, 지구의 종다양성을 훼손하는 인간을 저주하는 극단적인 환경론 등을 아우르는 조직이다.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지구의 각 나라 정부는 삼체 조직을 일망타진하려 하지만, 삼체 행성에선 이미 지구 정복을 위한 우주선을 보낸 뒤였다. 거리가 멀기에,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하기까지는 400년이 남았다. 삼체 행성에선 지구의 문명이 자신들을 막아낼만큼 발달할 것을 우려해. 이미 양성자 2개를 지구에 쏘아보낸 상태였다. 이 양성자는 정확한 물리적 측정을 방해하기에, 지구에선 이제 실험에 근거한 물리학이 설 자리를 잃는다. 물리학을 발달시키지 못하면, 문명도 발달할 수 없다. 

문화혁명의 기과한 열정과 그에 대한 환멸, 이에서 파생된 인류에 대한 저주, 그 저주의 수신자가 되는 외계인, 400년 뒤의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구인. 현재의 상황, 과거의 오류, 미래의 전망을 연결시키는 솜씨가 능란하다. 400년 뒤라는 멸망 시점을 100년 혹은 50년 혹은 10년 뒤로 하면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혁명의 광기에 대한 성찰이 성숙하다(시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인가).  과학적 관찰을 문명 발달의 근원으로 삼는 작가의 인식이 확고한데,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넷플릭스 영화로도 제작된 '서던 리치' 시리즈 1권 '소멸의 땅'을 읽다가 '뉴 위어드'라는 장르 이름을 알게 됐다. SF의 하위 장르라고 하는데, 그냥 '위어드'의 원조는 러브크래프트라고 한다. 그러니 '뉴 위어드' 분위기가 대략 짐작이 됐다. 호러 같다가 판타지 같다가 SF 요소도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같지만 읽다 보면 끌리는, 그런 이야기인 것으로 마음대로 생각했다. 

내친 김에 '뉴 위어드'를 더 읽어보기로 했다. '서던 리치'의 제프 밴더미어와 함께 차이나 미에빌이 최근의 대표적 작가라고 한다. 그의 '이중도시'(아작)를 찾아 읽었다. 미에빌은 특이하게도 케임브리지대에서 사회인류학을 공부했고, 런던정경대에서 국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작가다. 톨킨류의 권선징악적 판타지에 대한 혐오를 여러 차례 표현했고, 소설이 길기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이중도시'는 다행히 한 권이지만, 그래도 576쪽에 이른다. 

원제는 'The City and The City'다. '이중도시'라는 번역제목은 고심을 거듭한 결과로 보여 정확한 것 같다가도, 소설의 미묘한 느낌을 못살렸다는 느낌도 든다. 왜냐하면 '이중도시'는 경찰, 테러리스트, 범죄조직이 등장하는 경찰 스릴러 구조를 갖고 있지만, 책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도시 자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셀, 울코마라는 두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도시의 존재 양상이 말못하게 이상하다. 이 도시의 기묘한 개념을 살리는 것이 '이중도시' 번역의 목표이며, 이 도시 설정에서 재미를 느껴야 책을 읽는 재미도 있다. 캐릭터나 서사는 도시 개념 자체만큼 흥미롭게 직조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책이 다소 길다는 생각도 든다. 개념 설정이 가장 중요하다면, 그 개념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예전에 테드 창의 단편들을 읽으며 보르헤스 소설을 10배로 늘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중도시'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100배쯤 늘린 책처럼 읽히기도 한다. 

베셀과 울코마는 가상 도시지만, 파리, 뉴욕 등의 지명, 맥도날드 같은 상품명도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중도시'는 일종의 평행세계를 다룬다. 베셀과 울코마는 인접 도시이자 과거 적대한 적이 있어 서로 앙심을 품은 도시인데, 이런 설명으론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베셀과 울코마는 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처음 읽으면서는 설정이 너무 이상해 같은 공간에서 유령처럼 두 도시가 겹쳐있다는 의미인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고 두 도시의 물리적 공간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설정이다. 쉽게 말해 앞마당은 베셀인데 뒤에 붙은 집은 울코마이고, 카페는 베셀인데 바로 옆의 관공서는 울코마다. 여기까지라면 그럴 수 있는데 웃긴건 이 두 도시가 서로를 못본채 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베셀과 울코마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안보는' 교육을 받는다. 베셀 사람이 길을 걷다가 울코마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그럴 조짐이 있으면 안보고 지나간다. 이런 훈련이 잘 돼있어 어느 순간 두 도시의 사람들은 상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같은 도로를 달려도 베셀 차와 울코마 차는 세심하게 서로를 피한다. 두 도시를 이동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검문소가 위치한 어느 터널에 가서 출국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렇게 출국 절차를 밟은 뒤 입국한 곳이 원래 자기가 사는 동네 주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법적, 심리적으로 이미 타국에 있기에, 한발만 내딛어도 들어설 수 있는 자기 동네에 갈 수가 없다. 만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상대 도시 영역에 들어간다면? 두 도시의 '침범' 행위를 감시하는 '침범국' 요원들이 나타나 그를 체포한다. 침범국은 양 도시 경찰의 힘을 뛰어넘은,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으로 그려진다. '이중도시'의 얼개는 베셀 경찰인 주인공이 두 도시에 모두 연루된 살인사건을 침범국에 넘기려다 실패하고, 결국 베셀과 울코마를 오가며 직접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이다. 

서구의 많은 독자들은 '이중도시'를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갈등, 에루살렘 같은 도시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모양이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하지만 미에빌은 소설 뒤편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독해시도를 거부한다. 

"어떤 이야기가 정말로 무언가 다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그 다른 뜻이란 걸 아주 직설적으로 완벽하게 함축할 수 있다면, 그냥 그걸 말해버리면 됩니다. 소설이란 건 에둘러 표현하며 넘치게 포장할 수도 있고 독특함을 부여할 수도 있기 떄문에 흥미로운 겁니다. 소설을 우화로 해독하는 행위는 이야기에서 너무 많은 것을 끌어내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너무 적은 걸 읽어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소설보다 인터뷰가 더 재미있었다. 





**스포일러 있음


영화를 본 김에 내처 조너선 에임즈의 소설 '너는 여기에 없었다'(프시케의 숲)까지 읽었다. 소설이 나온 건 2013년인데 4년만에 영화화됐으니 상당히 빨리 진척된 셈이다. 영화가 89분으로 짧았는데, 소설 역시 152쪽으로 짧다. 분량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복잡한 미스터리를 감추어 두었거나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는 일은 없다. 하드보일드하게 직선적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결말이 난다. 심지어 '이제 절정부로 가겠군' 하는 순간에 끝나버린다. 속편을 염두에 둔 듯한 구성인데, 실제 속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소설의 확장판이 2018년 나왔다고 하는데, 원판의 결말에서 더 나아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가 다른 부분은,


-주인공 조의 트라우마의 근원이 조금 더 드러난다. 그런데 이건 소설과 영화의 차이라고도 할 수 없긴 하다.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통상 생략과 축약을 거치니까. 그러니까 소설에선 조의 트라우마가 활자로 좀 더 구체화됐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영화에서의 짐작대로 조는 군인이었고, 이후 FBI에서 성매매전담 요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지독한 가정폭력범이었고, 아들 조를 떄리거나 아니면 아내를 때렸다. 

-영화 속 조가 시적인 킬러인 반면 소설의 조는 좀 더 실용적인 킬러다. 영화에서 조는 자신이 공격해 죽어가는 남자 옆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상당히 인상적인 장면), 어머니의 시신을 물에 떠내려보내기 위해 상복을 입고 강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소설에선 전자의 장면이 아예 없고, 어머니의 시신은 절벽 같은 곳에서 물에 던져버린다. 린 램지는 왜 조가 자기 총에 맞아 죽어가는 남자의 독백을 듣도록 했을까. 자기가 죽여놓고 종부성사를 하는 사제처럼 구는, 듣도보도 못한 살인자다. 

-무엇보다 피해자인 니나의 아버지 보토 상원의원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 소설 속 보토는 영화보다 훨씬 극악한 악당이다. 영화에선 딸의 성착취를 막아내지 못한 보토가 자살하지만, 소설에서 자살하는 것은 동료 상원의원이다. 오히려 보토는 정치적 야심을 위해 딸을 악당들에게 넘긴 것으로 드러난다. 아버지가 악당이었으면 더욱 극적이었을텐데, 굳이 제3의 악당을 설정한 램지의 선택의 이유는? 

-영화에서 니나는 악당의 목을 면도칼로 베어 스스로 죽인다. 경호원 몇몇을 처리한 뒤 도착한 조는 결국 이미 죽은 악당을 발견할 뿐이다. 그때까지 엄청난 액션을 선보인 주인공이 악당을 직접 처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존 영화의 관습을 어긴다. 하지만 소설에서 악당을 죽이는 것은 당연히 조다. 

-영화에서 구출된 니나는 조와 함께 낯선 식당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둘은 어딘가로 잠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 속 조는 아직 니나(소설에선 리사란 이름)를 구출하지 못했다. 보토 의원의 이마에 망치를 박아넣은 조가 리사를 데려간 조직을 처단하려는 의지를 다지면서 소설은 끝난다. 마치 결말을 내지 않은 채 끝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선 소설의 결말이 비전형적이다. 결국 영화와 소설은 각기 다른 부분에서 전형성과 비전형성을 보이는 셈. 









오래 전부터 제목을 들었던데다가 얼마전 독재자에 대한 소설을 읽은터라 비교해보려 손에 들었는데, 독재자 소설은 빼고 이 책만 언급해도 되겠다 싶었다. 중국 작가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아고라)는 오랜만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안긴 책이다. 조금 더 집중했다면 한 자리에서 350여쪽을 읽어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

가상의 고대왕국 섭국이 배경이다. 왕이 승하한 뒤 여러 명의 왕자 중 열네살의 단백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장자 단문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 모두가 예상했던 터였기에, 단백의 왕위 계승은 본인조차 놀란 일이었다. 마음도, 자질도 준비되지 않은 단백은 서로 사이가 나쁜 할머니와 어머니의 수렴청정 아래 무기력한 제왕으로서의 나날을 보낸다. 어린 섭왕은 선왕의 후궁들의 혀를 자르거나, 충성스러웠던 패장을 활로 쏘아 죽이거나 하는 식의 포악한 짓도 하지만, 이 제왕은 근본적으로 무력한 존재였다. 무해한 궁녀나 신하나 군인의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청년으로 자라난 섭왕은 유일하게 사랑했던 후궁과의 행복한 결혼도 이루지 못한 채, 쇠락하는 국가의 운명을 방관한다. 

3부에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방향을 튼다. 철지부심한 이복형제 단문이 군사를 몰고 돌아오자, 섭왕은 왕위에서 쫓겨난다. 새 섭왕 단문은 구 섭왕 단백을 죽이지 않고 평민으로 살아가도록 경성에서 쫓아낸다. 단백은 평소 동경하던 줄타기 광대의 길을 걷는다. 치국하고 평천하했으나 평화로운 사적인 삶을 누리지는 못한 늙은 제왕의 회고록을 생각하고 읽어나가던 나같은 독자는 어리벙벙했다. '왕이 광대가 됐다'는 급격한 전환이 어색하고 작위적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급커브 구간을 능숙하게 통과한 뒤 다시 액셀레이터를 밟는 레이서처럼, 광대로서의 삶도 흡입력있게 써나간다. 제왕의 옷이나 권력이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내심 생각해왔던 단백은, 고공의 줄 위에서 구경꾼들을 내려다본 뒤에야 비로소 손에 딱 쥐어지는 권력을 향유한다. 단백의 재능은 국가 경영이나 정치적 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데에 있었다. 물론 잔학하게 꿈틀대는 세상은 단백이 행복한 외줄 광대의 삶을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단백의 남은 반평생이 간략하게 정리된다. "나는 남은 절반의 생을 고죽산의 고죽사에서 지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논어'를 읽고 또 읽으며 무수한 밤을 보냈다. 나는 어떤 날은 이 성현의 책이 세상 만물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고 느꼈고, 또 어떤 날은 거기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느꼈다"로 끝난다. 연기처럼 무상한 삶이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요약된다. 단백은 로마의 현제가 아니어서, 인생이나 국가나 세계에 관한 어떤 지혜도 남기지 않지만, 그래서 어쩌면 '나, 제왕의 생애'는 "비 오는 밤에 놀라 깨어났을 때의 꿈결"같이 어지럽고 애처롭고 허무한 책이지만, 그런 몽환의 세계관에 빠졌다 나오는 것도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다. 난 더 보람있고 유익하고 능률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할 클레멘트의 1954년작 '중력의 임무'는 하드SF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교과서'란 표현에는 여러 함의가 있다. 학계 다수로부터 인정받은 주류 이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한다. 비관보다는 낙관에, 감성보다는 이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소 지루하다. 

적도 지름 7만7000km, 극 지름 3만km의 찌그러진 팬케이크 모양 외계 행성 메스클린이 배경이다. 자전 속도가 매우 빨라, 지구 시간으로 18분이면 하루가 지난다. 메스클린이 지구와 가장 다른 점은 중력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이다. 이 행성의 중력은 적도에서는 지구의 3배, 극지방에서는 지구의 700배에 달한다. 메스클린 행성의 엄청난 중력이 이 하드SF가 보여주는 트릭의 원천이다. 

이 행성에는 납작한 애벌레 모양의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다. 중력이 너무 강해 인간처럼 직립한 생명체가 진화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메스클린인들이 이 행성 탐사에 나선 지구인(그들에게는 외계인)과 조우한다. 지구인은 반중력장치 개발을 위한 연구 도중 로켓을 메스클린의 극지방에서 잃어버렸다. 지구인은 메스클린인에게 로켓을 회수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몇 가지 반대 급부를 약속한다. 지구로 치면 15세기 수준의 문명을 가진 메스클린인 탐험대와 문명이 앞선 지구인과의 교감이 소설의 핵심이다. 

워낙 중력이 강한 행성이기에, 메스클린인의 가장 큰 공포는 높이다. 비행은 상상할 수 없고, 무언가를 던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불과 몇 cm에서만 떨어져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에 조금만 높은 곳에도 올라갈 수 없다. 메스클린인들은 머리 위에 무언가 있는데 대해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낀다. 사실상 세계를 2차원으로 해석하던 메스클린인들이 지구인의 도움을 받아 3차원 세계에 적응해나간다. 물론 지구인은 선의가 아니라, 로켓 회수라는 큰 목적을 위해 메스클린인을 돕는다. 

작가 클레멘트는 공군 조종사로 2차대전에 복무했다. 퇴역한 뒤에는 대학 전공을 살려 메사추세츠주 작은 도시의 사립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교사로 일했다는 배경을 들으니 정말 책이 교과서 같다) 책 뒤편의 저자 후기에는 클레멘트가 메스클린 행성을 설계해나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실제로 관측된 백조자리 61 쌍성의 데이터를 근거로, 행성의 밀도, 중력, 질량, 자전속도 등을 설계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성에서 존재할만한 물질과 생명체의 가능성을 상상했다. 마치 건축가가 마천루를 설계하듯, 클레멘트는 천문학 데이터와 물리학 법칙을 근거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행성을 창조한 것이다. 클레멘트는 독자들에게 '게임의 규칙'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찾아보라고 제안한다. (난 물론 그걸 찾을 능력이 없다)

작품이 탈고된 1954년 미국의 상황을 생각해본다. 2차대전의 승리로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소련과의 냉전이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 물질문명, 소비문명은 나날이 풍요를 구가한다. 과학은 한계없이 발전할 것처럼 보인다. 클레멘트는 세계의 과학적 원리에 호기심이 많고, 배우고 발전하고 싶어하는 메스클린 선장 발리넌의 캐릭터 구축에 가장 집중한다. 발리넌은 로켓을 회수한 직후 대담하게도 지구인에게 새로운 계약 조건을 내민다. 지구의 과학 문명을 전수해달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로켓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 지구인은 '쿨'하게 응한다. 매우 삐딱하게 생각하면, 아마존의 원주민에게 수학이나 철자법을 가르치려는 선교사의 겉으로는 너그러운 사실은 오만한 자세처럼 보인다. 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소설에서 지구인은 결코 악당처럼 행동하지 않고, 자신들보다 낮은 수준의 문명을 가진 외계인들을 내리깔아 보지도 않지만, 과연 물질문명의 최강대국 미국의 작가가 아니라면 이런 시선의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물론 작가의 그러한 태도가 은연중 비친다고 해서, '중력의 임무'를 나쁘게 평하고 싶지는 않다. 이 시선은 64년전의 것이니까.   




마거릿 애트우드의 2015년작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원제 The Heart Goes Last, 위즈덤하우스)를 읽다. 전에 읽은 애트우드의 대표작 '눈먼 암살자'는 무언가 굉장히 복잡해서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 소설이었는데,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속도가 났다. 읽으면서 뭔가 빠트린게 있나 싶을 정도였다. 

경제 위기로 미국 사회가 '카드로 지은 집'처럼 붕괴한 근미래,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스탠과 샤메인 부부는 집도 직장도 없이 자동차에 의탁해 떠돌며 살아간다. 그런 부부가 흥미로운 광고를 접한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포지트론 프로젝트 광고다. 이 프로젝트는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됐다. 사람들은 한 달은 감옥에서, 한 달은 주민으로 살아간다. 한 사람이 한 집을 공유하며, 두 사람은 정확히 같은 날 입소하고 출소해 엇갈리게 살아간다. 

젊은 부부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일로 몰락해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모습은 굉장히 개연성있게 그려졌다. SF라고 할 것도 없이, 경제위기를 겪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벌어질만한 일들이다. 부부가 포지트론 프로젝트에 자원한 이후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 듯, 판타지적인 구성이다. 여기부터는 사실성보다는, 일종의 사고 실험을 추구한다. 

상황에 따라 쉽게 발현되는 인간의 가학 심리를 보여주는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연상케하는 설정이지만, 전개는 전혀 다르다.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는 의외로 제도적으로 구속된 부부의 마음 속 갈등과 욕망에 천착한다. 그리고 그 전개는 '막장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스탠과 샤메인 부부는 같은 집을 공유하는 다른 부부와 함께 일종의 스와핑 관계를 형성한다. 샤메인이 자발적이었다면, 스탠은 상대 여성에게 사실상 강간을 당했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스탠이 기계공학 엔지니어, 샤메인이 의료계종사자라는 점도 이야기의 전개에 한 발단이 된다. 스탠의 기계공학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는 섹스봇과 관련 있고, 샤메인의 의술은 장기밀매 혹은 임의의 사형집행으로 이어진다. 한 남자는 갓 주문한 섹스봇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흥분해 목을 물어뜯는 바람에, 로봇이 합선되어 섹스 자세 그대로 끼어있다가 겨우 구출된 뒤 남은 생을 불구로 살아갈 처지다. 뇌신경을 개조해, 수술 뒤 처음 마주친 사람과 무조건 사랑에 빠지게 하는 기술도 등장한다. 수술당한 한 여성은 남성이 적당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그만 옆에 놓여있던 테디베어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고 살아간다(상당히 기괴한 유머다). 디스토피아 SF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자극적인 소재들이 급박하게, 차례차례 등장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애트우드가 자기가 쓰면서도 재미있을 정도의 통속적인 활극을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시리즈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시녀 이야기'를 읽어볼까.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중 제3부인 '검의 폭풍'(A Storm of Swords)을 읽다. 과거에 번역이 된 적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요즘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나오고 있다. 4부는 2019년, 5부는 2020년 출간된다고 한다. 

이 책은 미드 제목인 '왕좌의 게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는 소설의 진도를 이미 앞지른 상태이며, 내년에 마지막 시즌이 방영될 예정이다. 작가가 쓰지 않은 내용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아마 드라마 제작진이 전개에 대해 작가와 긴밀한 협의를 거쳤을 것이다. 나는 이 텔레비전 시리즈의 팬이기에 이번에 읽은 '검의 폭풍'의 내용도 모두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다. 

'검의 폭풍'에는 드라마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지게 했던 몇 가지 이벤트들이 담겨 있다. 드라마가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피의 결혼식', 뜬금 없었던 조프리의 죽음, 역시 예상치 못했던 타이윈 라니스터의 죽음 등이 '검의 폭풍'에 담겼다. 이 이벤트들은 지금까지 7번에 걸친 '왕좌의 게임' 시즌 중에서도 손꼽힐만큼 강렬했으니, 서사의 급격한 굴곡만으로도 '검의 폭풍'은 재미있다.  

하지만 '검의 폭풍'의 독서가 즐거웠던 건 충격적 사건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줄거리는 알고 있다. 이미 본 영화, 드라마의 원작을 읽는 재미란, 영상으로는 간략하게 다뤄진 인물들의 관계나 감정을 매우 천천히 되새기면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 '얼음과 불의 노래'는 챕터 별로 특정한 인물이 중심이 돼 서술된다. 예를 들어 제이미 라니스터는 때로 주인공이 되지만, 그의 쌍둥이 남매이자 제이미 못지 않게 중요한 인물인 세르세이는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르세이의 행동이나 생각 등은 제이미나 그외 주변 사람들의 서술로만 이해할 수 있다. 작가가 어떤 인물을 택해 서술했는지에 따라 그 인물 주변의 관계도가 그려진다. 감정과 사건의 허브가 되는 인물을 배치한 후, 그 주변 은하계가 형성된다. 유장한 서사를 이끌면서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데 유용한 방식이라고, 사후적이고 결과론적으로 생각한다.  

'검의 폭풍'의 특징 중 하나는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의 기나긴 여정과 그 사이 싹트는 기묘한 우정, 사랑 등을 그린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제이미와 그를 킹스랜딩까지 호송하는 브리엔느의 관계. 브리엔느는 여러번 그 외모가 묘사될 정도로 인상적으로 추한 외형의 키 큰 여성이다. 브리엔느는 '아가씨'로 남아야 하는 그 시대의 관습을 벗어나 기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아무도 이 거대한 추녀를 '기사'라고 인정하지 않지만, 브리엔느는 고집스럽게 기사의 행동수칙을 지킨다. 브리엔느는 주군인 캐틀린으로부터 포로 제이미를 킹스랜딩까지 호송하고 그 대신 캐틀린의 딸인 산사와 아리아를 데려오라는 명을 받는다. 캐틀린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명이지만, 브리엔느는 주군이 지시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고 그 명을 따르려 한다. 이죽대던 제이미는 차츰 브리엔느의 고집스러운 기사도에 감화된다. '얼음와 불의 노래'의 그 많은 기사들 중에서 가장 기사같은 인물은 기사도, 남성도 아닌 브리엔느다. 어쩌면 제이미는 브리엔느에게서 한때 자신이 가졌을지 모르는, 그러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왕가의 역학 관계에 휘말려 잊어버렸던 충성, 정직, 희생 등의 가치를 다시 기억했는지도 모른다. 

또 아리아와 '사냥개' 산도르 클리게인의 관계. 킹스가드의 일원이었던 사냥개는 정치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탈영한다. 아리아는 밤마다 외는 살생부에 산도르의 이름을 넣어두었다. 산도르가 아리아의 친구를 죽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아리아를 붙잡은 사냥개는 그를 엄마 캐틀린 혹은 이모 라이사에게 데려다주고 돈을 받으려 한다. 살인을 일삼는데다가 술고래이며 돈만 아는 남자와 그를 죽이려는 귀족 소녀가 예기치 않게 동행한다. 아리아는 처음엔 몇 차례 탈출 기회를 노리지만, 후엔 포기한다. 어찌된 일인지 아리아는 동행 시간이 길어질수록 산도르를 이해하는듯 보인다. 산도르로부터 도망치려는 생각도, 그를 죽이려는 생각도 사라진다.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것이 아니라, 아리아는 어느덧 산도르를 그냥 하나의 가여운 인간으로서 보게 된다. 산도르가 큰 부상을 입고 죽음에 근접했을 때, 아리아는 그를 죽이지 않고 그냥 떠난다. 그 상황에서의 살인은 아리아에겐 복수가, 산도르에겐 자비가 될 것이었지만, 아리아는 그냥 말 없이 짐을 챙긴다.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못하는, 혹은 사랑하면서 증오하는 이상한 관계가 형성된다. 

혹은 드라마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인 티리온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 티리온은 난산 끝에 세상에 나왔는데, 그때 모친은 죽었고 티리온은 난쟁이로 자랄 운명이 되었다. 아버지 타이윈은 아내를 '죽인', 그리고 세상에 나와서도 말썽만 피우는 티리온을 인정하지 않는다. 티리온이 지독한 외모 컴플렉스와 그에 따른 방탕한 행동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티리온은 라니스터 형제 중 누구보다 영리하고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심지어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여성에 대한 관점도 결과적으론 로맨틱하다. 티리온이 냉철한 아버지, 사악한 누나, 그래도 인간적인 형, 정의와 돈을 저울질하는 용병,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하는 아내, 헌신적으로 보이는 잠자리 파트너와 맺는 관계들은 한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경험하는 여러 인간 관계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4부 언제 나옵니까. 

 




 


리사 프라이스의 '스타터스'(황금가지)를 읽다. SF라고 알고 읽었는데 사실은 로맨스다. 사실 '스타터스'가 SF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저 내가 잘못 알았을 뿐이다.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황금가지의 '블랙 로맨스 클럽'의 일환으로 나왔다. 그러니 'SF가 아니라 SF적 설정이 있는 로맨스였다'고 통탄해봐야 내 잘못이다. 

미래 어느 시기, 태평양 양쪽 국가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나 생물학 무기가 투하된다. 그 때문에 미국에는 '엔더스'라 불리는 노인들과 '스타터스'라 불리는 청소년, 어린이만 살아남는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과학적 설명은 생략돼있다) 엔더스는 부유하고, 부모가 없는 스타터스는 가난하다. '스타터스'인 '나' 켈리는 큰 돈을 벌기 위해 잠시 위험한 아르바이트에 응한다. 이 아르바이트는 젊은 몸을 갖고 싶은 엔더스에게 일정 기간 동안 몸을 빌려주는 일이다. 엔더스의 의식이 스타터스의 몸으로 들어간 사이, 원래 스타터스의 의식은 어딘가에서 쉬고 있다. 물론 스타터스의 몸을 렌트한 엔더스는 기간 동안 몸에 흠집을 내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 얼마간 몸을 렌트해준 스타터스는 목돈을 만질 수 있다. 

'청년을 착취하는 노년'이란 알레고리가 너무나 확연하다. 확연한 것은 재미가 없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제몫을 인정받지 못하고 기성세대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의 청년들이 읽으면 더욱 실감을 느낄텐데, '스타터스'의 목적은 세대간 착취의 폭로가 아니라 로맨스다. 

켈리를 둘러싸고 두 남자가 경쟁한다. 물론 둘 다 멋지다. 거리에서 생활할 때 만난 마이클은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인데 다정다감하고 생활력이 강하다. 켈리의 몸이 렌트된 뒤 만난 블레이크는 부유하고 로맨틱하다. 블레이크 앞에서 켈리는 '신데렐라'가 된다. 심지어 '신데렐라'처럼 벗겨진 구두를 블레이크가 줍는 에피소드까지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안해도 신데렐라인줄 아는데) 그리고 블레이크의 정체에는 한 가지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이 켈리와의 로맨스를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든다. 성실한 남자와 로맨틱한 남자. 그 사이의 순진무구한 소녀. '엑스맨'의 울버린과 사이클롭스,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처럼, 작은 디테일만 바뀌는 굵직한 로맨스의 구도다. 

이 세상에서 엔더스는 대체로 막대한 부를 누린다. 그 부에 따른 물질세계의 묘사가 또 한 축이다. 켈리가 입는 아름답고 비싼 옷들, 착용하는 장신구들, 입안에서 녹는 음식들이 자주 묘사된다. 켈리를 씩씩하고 보호본능강하며 정의로운 소녀로 묘사한 것도 이 책의 독자층을 위한 설정이다. '헝거 게임'의 캣니스 에버딘들이 여기저기 출몰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핵심은 켈리와 블레이크의 로맨스. 아래와 같은 대목은 '스타터스'의 인장과도 같다. 


"블레이크는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는, 나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또 키스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 이상 좋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로도 그랬다. 나는 그 애의 목을 감싸 쥐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 애가 내 허리 부근을 안았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이 막힐 듯한 기분과 약간의 아찔함을 느끼면서 그 애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 애의 이마에 내 이마를 기댔다." 


아니면 이런 부분. 


"말 위에 앉아 있는 블레이크를 힐끗 바라보다가 그 애를 향해 미소 지었다. 블레이크 역시 미소로 답했다. 석양에 물들어 한쪽 얼굴이 붉어진 채 그 애는 그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블레이크로부터 나에게로 보이지 않는 따뜻한 광선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만약 이게 에어스크린 게임이었다면, 우리 사이에 조잡한 하트 아이콘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베껴쓰면서 손을 조금 떨었다. 요즘 초콜렛을 너무 많이 먹었나. 로맨스는 이렇게 쓰는 것이었군. 나는 3번쯤 환생해도 쓸 수 없는 문장이다. 



 


타계를 추모하는 혼자만의 의식으로 필립 로스의 2007년작 <유령 퇴장>(문학동네)을 뒤늦게 읽다. 국내에는 2014년 출간됐는데, 언젠가 입수했다가 회사 책상 앞 책꽂이에 꽂아놓은 뒤 읽지 않고 두었다. 알다시피, 책은 한 번 읽을 시기를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로스의 책을 몇 권 읽어나갔을 때 <유령 퇴장>은 제 순서를 맞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난 로스의 책에 조금 지쳤고, 그렇게 <유령 퇴장>을 방치했다. 그래도 책을 치워버리지는 않아서 몇 번 자리를 옮기면서도 줄곧 눈에 보이는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그 사이 <유령 퇴장>은 100년전부터 거기 있었던 정물처럼 놓여있었다.


'나'는 70대의 유대계 미국 소설가 네이선 주커먼이다. 주커먼은 1974년 로스의 책에 처음 나온 뒤, <유령 퇴장>까지 모두 9번 등장했다.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등 로스의 대표작이 그 9편에 속한다. <유령 퇴장>은 주커먼이 등장한 마지막 책이다.  주커먼은 로스의 '소설적 자아'라 할 수 있다. 


필립 로스(1933~2018)


<유령 퇴장>에서 주커먼은 11년간 은둔해있던 버크셔 산골을 떠나 뉴욕으로 온다. 전립선암의 후유증인 요실금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로스의 다른 책을 읽었다면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병이 깨끗이 낫고 오랜만의 도시 나들이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시골로 평화롭게 돌아가 다시 멋진 소설을 쓰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진 않는다. 의사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오줌은 계속 새어나와 안전 팬티 속을 가득 채운다. 늙은 주커먼을 괴롭게하는 건 육체의 쇠락만이 아니다. 주커먼은 여러가지 혼란한 사건과 맞딱드린다. 존경하는 선배 작가 로노프의 연인으로 한때 자신도 마음에 두었던 에이미가 뇌종양 수술을 받아 머리카락이 절반은 없는 가난한 노파가 된 모습을 목격한다. 주커먼은 충동적으로 1년간 집을 바꿔 살기로 한 작가 지망생 부부를 만나는데, 그중 아내 제이미에게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주커먼은 이미 여성과의 육체적 사랑을 할 수 없는 처지임에도 말이다. 가장 큰 난관은 로노프의 전기를 쓰겠다고 달려드는 젊은 저널리스트 클리먼이다. 클리먼은 에너지가 넘치는, 하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야심만만한, 하지만 야심을 점잖치 않게 발산하는 남자다. 클리먼은 거의 잊혀진 로노프의 삶과 문학을 다시 미국인의 정신사적 궤적 속으로 돌려놓겠다는 포부를 밝히지만, 이를 위해선 죽은 로노프의 명예가 훼손되고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다. 주커먼은 클리먼을 막기 위해 모든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미 주커먼에겐 그럴만한 기력이 없다. 

주커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반유대적인 협박 메시지 때문에 시골로 도피한 것으로 되어있다. 협박이 멈추었다면 뉴욕으로 돌아와야겠지만, 주커먼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철저한 은둔과 사회로부터의 망각을 택했다. 아니, 주커먼이 먼저 사회를 망각했다. 대중은 빠른 사회의 변화에 일희일비하겠지만, 오랜 세월 미국을 지켜본 주커먼은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견딜 수도 없고 바꿀 힘도 없는 모든 일에 대해 아예 귀를 닫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달리 무슨 이유로 내가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듣고 텔레비전을 보는 걸 포기했겠는가? 나는 더는 실망으로 곤두박칠 일이 없는 곳에서 살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겪는다. 어제의 뉴스가 오늘의 뉴스로 잊혀지고, 오늘의 뉴스는 또 내일 잊혀진다. 처음 들었을 땐 충격적인데, 하루 지나면 최초의 충격도 사라진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결국은 조금씩 형태를 달리해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제이미 부부는 아들 부시의 당선에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주커먼은 그러지 않는다. 그의 지친 눈빛은 모든 일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예전 같으면 그런 파당 정치의 대립을 지켜보면서 초연할 수 없었겠지만, 거의 한 세기의 4분의 3에 이르는 세월을 미국이라는 나라에 홀린 채 살고 나니, 더는 사 년마다 어린애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아야겠다고 작정하게 되었다. 어린애 같은 감정과 어른의 고통에 말이다."

역시 신랄한 대목은 쇠락한 육체에 대한 묘사다. 로스는 74세에 집필한 이 소설에서 한때 쓸만했을 듯한, 하지만 지금은 볼품없어진 주커먼의 성기를 아래처럼 묘사한다. 주커먼은 40세 연하의 여성 제이미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마 에너지가 정신과 육체에 두루 뻗쳐있던 시절을 경험한 사람만이 이런 실망감을 표현할 수 있겠지. 

"한때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성기가 달려 있던, 방광조임근도 완벽하게 제어되고 충분히 제 기능을 다하던 성기가 달려 있던 두 다리 사이에 이제는 쭈글거리는 살덩어리에 불과한 수도꼭지를 달고 있는 남자에게는 결코 무해할 리 없는 절망적인 사랑이 열병이 휘두르는 무자비함에 즉시 굴복한 채. 한때는 단단한 생식기였던 그것은 이제, 저 어딘가에 삐죽 튀어나와 우리 눈에 띄는 파이프의 끄트머리, 어느날 누가 밸브를 한 바퀴 더 조여 빌어먹을 물줄기를 완전히 잠가야 한다는 걸 기억해낼 때까지 물을 질질 흘리는, 종종 왈칵 뿜기도 하고 콸콸 쏟아내기도 하는 아무 의미 없는 파이프 한 토막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령 퇴장>은 <에브리맨> <휴먼 스테인> <울분>처럼 서사에 몰입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실험적인 기법과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커먼의 생각들이 불쑥불쑥 끼어들어 난삽하다는 느낌까지 주는 책이다. 물론 그 난삽함이란 '노인의 현명함'과는 거리가 먼듯한, 오히려 '노인의 자기혐오'라 부르는 편이 좋을 듯한, 하지만 정말 신랄하고 철저하고 까끌까끌해서 책을 읽어나가기 아슬아슬해지는 생각과 감정의 조각들의 모음이다. 로스의 명복을 빈다. 






'세계 종교의 역사'(소소의 책)를 읽다. 원제는 'A Little History of Religion'이다. '리틀 히스토리'라 한 것은 책 분량이 적다는 뜻이 아니라, 각 종교를 간략하게 설명한다는 뜻인 듯하다. '세계 종교의 이해'같은 타이틀의 대학 교양 시간에 교재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학교수인 역자가 이 책을 그러한 용도로 추천하고 있다. 역자니까 당연히 자신의 책이 좋다고 하겠지만, '옮긴이의 말'의 찬사는 의례적인 수준을 뛰어넘는다. '탁월' '두려움' '질투' '감사' 같은 어휘가 사용된다. 난 해당분야 전공자가 아니니까 그런 느낌은 아니지만, 책에 대한 찬사에는 많은 부분 동의한다. 

저자 리처드 할러웨이는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에딘버러 주교를 역임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책이 '기독교와 그외 세계종교 해설'에 그치진 않는다. 모세에서 시작해 동서양을 아우르며 종교의 흐름과 관습들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각 종교의 방대한 때로 난삽한 교리를 단정한 언어로 정리했다. 물론 '너무 정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략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정리하지 않았다면 이 책은 400여쪽 한 권이 아니라 수십 권의 시리즈로 나와야 했겠지.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불교의 흐름이야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지만, 덜 알려진, 그래서 이상하거나 때로 감동적인 작은 종교들도 소개한다. 내게 흥미로운 건 그런 '작은' 종교들이었다. 몇 가지 예로 들면


-자이나교 : 영혼이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자기부정의 길을 선택한다. 자이나교의 최고 이상은 수행자들이 굶어죽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죽이거나 해치지 말고, 어떤 것도 탐내거나 갈망하지 말라. 비폭력의 계율은 자이나교에서 절대적이다. 육식은 물론이고, 사냥, 낚시도 안된다. 모기가 뺨을 물어도, 벌이 목을 쏘아도 죽이면 안된다. 집 안에 거미가 줄을 치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잡아 집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길을 걸을 때 벌레를 밟지 않도록 가벼운 깃털로 만든 빗자루로 길을 쓸면서 걷는다. 혹시 숨을 들이쉴 때 입 안으로 곤충이 들어오지 않게 마스크를 쓰는 이도 있다. 식물도 죽이면 안된다. 오직 떨어진 과일만 먹어야 한다. 물론 수행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자이나교는 정신적 영역에서도 비폭력을 추구한다. 인간은 누구든 사물의 전체를 보지 못하기에, 사물을 보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해야 한다. 자이나교의 '정신적 겸손함'은 종교 역사에서 매우 보기 드물다. 


-시크교 : 1469년 태어나 1539년 죽은 구루 나나크가 창시했다. 시크교는 믿음을 감독하는 사제, 중재자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도 종교의 개신교'라 할만하다. 나나크는 '함께 먹기'를 중시했다. 대부분의 종교가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계층을 구분하거나 여러 개의 식사 금기를 두지만, 시크 공동체는 공동 식사의 관습을 도입했다. 시크교 사원에는 부엌이 건물의 다른 부분만큼 신성하다. 시크교 사원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다. 이는 모든 방문자에게 열려있음을 뜻한다. 시크교도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터번을 쓴다. 시크교는 인종적 정체성을 중시하고, 포교에 힘쓰지 않는다. 다만 그들 종교에 합류하길 원하는 사람은 기쁘게 받아들인다. 


-퀘이커교 : 17세기 영국인 조지 폭스에서 유래했다. 구두제작자의 도제였던 폭스는 신부, 설교자, 의례, 예복, 교회같은 공간이 필요없다고 여겼다. 조용히 앉아서 성령이 마음 속에서 말걸기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신의 빛은 이미 그들 각자 안에서 불타고 있었다'. 여자, 남자, 노예, 자유인 등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고 여겼다. 성서는 쓰여진 당대의 문화를 반영하기에 노예제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았다. 퀘이커교는 놀랍게도 이같은 성서의 해석에 도전했다. 심지어 도망 노예들을 돕는 단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퀘이커교는 역사적, 비판적 성서 연구의 초석을 닦았다. 성서에 끼친 신의 영향력을 인정하되, 성서의 인간적인 요소를 구분한다. '퀘이커'(quaker)란 폭스가 '내가 유일하게 몸을 떨면서 겁내는 권위를 가진 분은 오직 신'이라고 밝힌데서 유래한다.  


-모르몬교 :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일명 모르몬교는 1805년 미국 버몬트 소농의 아들인 조셉 스미스에게서 유래했다. 스미스는 25살이 되었을 때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 4세기쯤 모르몬이라는 사람이 경전을 새긴 황금판을 뉴욕주 팔미라 산에 묻었다는 것이었다. 스미스는 황금판을 파내 영어로 번역하고 이를 '모르몬경'이라고 불렀다. 기독교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하듯, 모르몬교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모르몬교는 예수가 부활한 지 몇 달 후 아메리카 대륙을 방문해 당시 북미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보살폈다고 믿는다. 스미스는 고대 이스라엘식 믿음의 회복을 주장했기에, 일부다처라는 성서적 관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스미스는 40명에 이르는 아내를 얻었다. 스미스는 감옥에서 살해당했지만, 그를 이은 브리검 영이 조직을 재정비했다. 영은 수천 명의 신도와 함께 서부의 인적 드문 유타에 자리잡았다. 영은 훗날 유타 초대 주지사가 됐고, 모르몬교는 유타에서 안전을 확보했다. 다만 국가제도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일부다처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몬교 남성 교인은 국내 또는 국외에서 2년간 선교 활동을 해야 한다. 담배, 약물, 술, 차, 커피, 도박, 문신, 피어싱은 허용되지 않는다. 가족생활을 중시해 많은 자녀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기에 부를 쌓은 이들이 많다.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 : 종교는 많은 결함이 있지만, 미덕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세속적 인본주의는 종교라 하기 어렵지만, 종교의 좋은 아이디어를 빌려 왔다.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종교가 부과한 원칙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든 원칙으로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종교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기념하는 의식의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결혼식, 장례식, 신생아 명명식 등 주요 의식을 집전하도록 돕는다. 아울러 세속 영성(secular sprituality)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종교의 예배가 만남과 교류의 장이 됨을 알아채고, 자신들만의 일요 집회를 만들었다. 





 


장강명 작가의 추천으로 제임스 M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민음사)를 읽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권'이니 '명작' 맞겠지? 그런데 내용은 정말 통속적이다. 어느 고속도로변 간이 식당에 우연히 흘러들어온 건달 프랭크가 식당 주인 여자 코라와 눈이 맞아 주인 남자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한다. 둘은 노련한 변호사의 변론으로 살인혐의를 벗고 남편이 들어놓은 거액의 보험금을 받아낸다. 하지만 프랭크와 코라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 둘은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서로에게 묶어둔다. 임신한 코라가 아파 프랭크가 서둘러 차를 몰고 돌아오는 중에 교통사고가 난다. 코라는 앞 유리창 너머로 튕겨나가 죽어버리고, 프랭크는 여자의 살인 누명을 쓴 채 교수대에 오른다. 끝. 

여자의 죽음은 남자가 의도하지 않았기에, 그 살인 혐의를 쓰는건 억울하다. 그러나 여자의 남편을 죽인데 대한 죄값을 치르지 않았으므로, 넓은 인생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마찬가지. 억울해 가슴칠 일도 없고, 운좋다고 기뻐할 일도 없다. 죽으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이 책을 '통속적'이라고 했지만, 그건 비난이 아니다. 난 통속적인 걸 좋아하니까. 통속적인 것은 흔하다는 얘기인데, 어떤 이야기가 흔하게 들리는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세상의 이야기 패턴이라는 건 많지 않은 듯하다. (아마 문창과에 가면 금방 배울 것 같다) 몇 가지 이야기 패턴을 어떻게 변주하는지, 얼마나 잘 다루는지가 관건일 뿐이다. '마담 보바리'는 얼마나 통속적인가. 나보코프의 '어둠 속의 웃음소리'는? '안나 카레니나'도 빼놓을 수 없고. '안나 카레니나'에서 잘 읽히는 건 레빈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집요한 계몽성이 아니라, 안나의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불륜담 아닌가. 



잭 니콜슨, 제시카 랭이 주연한 영화. 영화를 보고 싶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 중 하나는 대사다. 마치 시나리오처럼, 둘의 건조하고 짤막한 대화가 핑퐁핑퐁 오간다. 자세히 읽지 않으면 대사의 발화자를 놓치기 쉽다. 그런데 이야기를 쓸 때 이런 대사를 구사할 수 있는 건 축복받은 재능 같다. 머리 속의 생각을 50페이지에 걸쳐 풀어놓기는 잘해도, 두 세 줄 대사는 못쓰는 작가도 많다. 장강명 작가에 따르면 케인은 이 소설을 쓰면서 8만 단어였던 초고를 3만5000 단어로 압축했다고 한다. 짧은 글을 길게 늘리면 듬성듬성해지지만, 긴 글을 짧게 압축하면 쫄깃쫄깃하다는 건 글을 만져본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레이먼드 카버의 신비로운 단편들도 편집자가 글을 엄청나게 쳐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건달 프랭크의 배경을 알려주지 않은 채 다자고짜 시작하는 도입부도 마음에 들었다. 프랭크는 소설이 시작한 지 불과 10줄만에 작품의 주된 배경인 '쌍둥이 떡갈나무 선술집'에 들어온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는 살해당하는 조연이, 그 다음 페이지에는 프랭크의 공범자가 되는 미녀가 등장한다. 빠르다. 난 이런 '다짜고짜'가 좋다. 









'설레발은 필패'라는 옛 명언이 있지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의 첫 20페이지를 채 읽지 않았을 때, 난 이 소설을 오래 기억하리라는 걸 알았다. '스토너'는 1965년 발간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나, 50년쯤 지난 뒤 재발견됐다. 물론 작가는 1994년 향년 72세로 죽은 뒤였다. 존 윌리엄스의 삶은 소설 속 윌리엄 스토너처럼, 영광스럽지도 그렇다고 굴욕스럽지도 않은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윌리엄 스토너의 삶을 한 문단 정도로 요약한 뒤 시작한다. 189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19세에 미주리 대학에 들어간 뒤 영문학을 전공해 그곳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1956년 사망하기 전까지 모교 강단에 섰다. 스토너는 평생 조교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고, 학생이나 동료 교수에게 뚜렷하게 기억되지도 않았다. 마치 그가 정성을 다해 썼으나 많이 팔리지 않았고 학계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책처럼, 스토너의 삶은 지구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처럼 망각될 것이다. 


그렇게 평범하고 인상적이지 않은 스토너의 삶을, 작가는 정확하면서도 아름다운데다가 간결한 문장으로 담아낸다. 오며가며 10분씩 끊어서 독서를 하기도 했지만, 직전에 읽은 내용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평생 농부로 살줄 알았던 스토너는 아버지의 결심으로 인해 대학에 진학해 농학을 전공한다. 하지만 정작 대학에 들어간 스토너를 사로잡은 것은 농사 짓기에 대한 심화된 기술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였다. 듣도보도 못한 소네트에서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낀 스토너는 문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아들을 손에서 떠나보낸 아버지는 스토너의 선택을 무기력하거나 담담하거나 조금 당황스럽게 지켜볼 뿐이다. 


무기력, 담담함, 약간의 당황. 이것은 '스토너'를 지배하는 정조 중 하나다. 스토너의 삶은 마치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한귀퉁이의 부품처럼 흘러가버린다. 물론 스토너는 살면서 몇 차례 선택하고 결단했다.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고, 아내 이디스에게 과감히 구혼했다. 친구들과 함께 참전하는 대신 학교에 남았고, 자신의 학생과 연애했다. 같은 과 교수 중 한 명과 숙적이 돼서 수십년간 반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토너 인생의 흐름을 높은 상공에서 살펴보면, 그리 굽이치지 않는 평탄한 시냇물 같을 것이다. 스토너는 그러한 삶을, 마치 지구 반대편 어느 평범한 서민의 삶에 대해 전해듣듯이 담담하게 살아냈다. 어쩌면, 참전해서 훈장을 받을 정도로 용맹하게 싸웠거나, 학계에 오래 남을 중요한 책을 썼거나, 세상이 떠들석한 연애를 했을지라도 마찬가지다. 높은 상공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도 스토너와 그리 다르지 않은 궤적을 그릴 것이다. 누구나 살다가 언젠가는 죽는다. (거의) 대부분 사람의 삶은 스토너처럼, 위대하지도 비굴하지도 않다. 스토너는 연애 상대인 캐서린의 논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작스럽게 이런 말로 위로한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그건 스토너 자신의 삶에 대한 요약이기도 했다. 


스토너는 정년연장 옵션을 사용해 학교에 더 남아있으려 하지만, 암에 걸려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스토너는 절망하지도, 피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스토너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병상의 스토너는 자문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나. 어떤 기대라도 우리 삶 속에서 충족되는 일은 거의 없고, 그래서 기대는 허망한 것이며, 그렇다고 우리 삶을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음을, '스토너'는 들려준다. 







열린책들에서 야심차게 콜렉션을 내놓은, 하지만 판매실적은 신통치 않다는 풍문을 전해들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유문화사)을 읽다. 볼라뇨는 "스탈린과 딜런 토머스가 죽은 해"인 1953년 칠레에서 태어났고 2003년 대작 '2666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1996년 발간됐는데, 비평계에서는 찬사를, 독자로부터는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은 제목만 알고 있었는데, 일 때문에 접촉한 모 소설가의 추천으로 손에 들게 되었다. 그 소설가는 연재를 타진하기 위해 샘플 원고를 보내왔고 나는 그 원고가 좋았으나, 여러가지 사정상 게재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매체에서라도 소설가의 후속 작업을 읽었으면 좋겠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북미, 남미에서 20세기 이후 활동했던 극우 작가의 인명 사전 형식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물론 이 작가들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 인물이지만, 이들의 삶과 문학은 실제의 역사, 문학과 교묘하게 교차되어 있다. 볼라뇨는 '극우'의 스펙트럼을 폭넓게 사용한다. 한국적 관점에서 '극우'라 보기 어려운 이들도 이 사전에 포함시킨다. 예를 들어 에델미라 톰슨 데 멘딜루세(1894~1993)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류사회의 귀부인으로 목가적이며 종교적인 시와 에세이를 쓰는 이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글을 쓴 적은 드물었으나 오히려 정치적으로 공허하고 무뇌의 글을 썼다는 점에서 영예의 극우 문학인 사전에 등재된다. 이탈로 스키피아노와 아르헨티노 스키피아노 형제는 축구팀 보카 주니어스의 극렬한 서포터였는데, 평생 축구장과 관련한 폭력, 그리고 이를 선동하는 글을 발표하며 살고 죽어 이 기묘한 사전에 올랐다. 


전체적으로는 풍자적이고 블랙코미디적인 서술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접근하는 척 하면서도 결국은 엉뚱하고 통렬하다. 예를 들어 '작가는 평생을 이 프로젝트에 매달렸으나 돌아온 반응은 거의 없었고, 그의 수천페이지짜리 소설은 결국 허풍이거나 허섭쓰레기였다'는 투의 서술이다. 어처구니 없는 작가들의 삶이 간략하게 나열돼 있지만, 바로 그 어처구니 없음의 스케일 때문에 키득거리며 읽게 되는 것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다. 



1966년 미국 알래스카주 아다크 섬에서 태어난 작가 데이비드 밴의 인터뷰 중 발췌. 격월간 문예지 '악스트' 15호에 실림. 작가가 13살 때 아버지가 자살. 국내에는 '자살의 전설' '고트 마운틴' '아쿠아리움' 등이 출간.



"대부분의 작가는 (적어도 초기작에서는) 개인사와 가족 이야기를 끌어다 쓴다. 그 소재에는 무게와 진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 나는 학생들에게 "가족을 제단에 올려놓고 도끼를 휘두르라"라고 말한다. 나는 그리스 비극을 쓰는데, 그리스인들은 가족이 우리를 만들고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현대의 치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해서 망가졌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시 온전해질 수 없다."


"역경은 품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일부러 역경을 선택하는 것은 피학적일 것이다. 차라리 품성을 덜 발달시키고 편하게 사는 편을 택하겠다."


"(소설의 소재를 어디서 찾는지 질문에) 나도 알았으면 좋겠다. 소재를 찾을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저절로 떠오르거나 안 떠오르거나 둘 중 하나다."


"미국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며 바보들의 나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편집자, 발행인, 에이전트, 서평가, 사서 등 문학을 홍보하는게 일인 사람들조차 새로운 문학 작품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저 행운을 빈다. 번역 시장도 민망한 수준이다. 미국인들은 바깥 세상에 관심이 없으며 다른 나라의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


"비극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말은 옳다. 어느 정도는 고통이 우리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관점을 바꾸는데, 관점이야말로 문학의 핵심이다. 경험을 통해 인물의 관점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문학의 본질이다."


"글쓰기를 위해 무엇이든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다른 무엇도 글쓰기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누이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당신과 엄마, 내 아내를 사랑하지만 -당시는 이혼하기 전이었다- 글쓰기를 더 좋아하며 나 자신보다 글쓰기가 더 좋다고 말이다. 좋게 들리지는 않지만, 글쓰기는 언제나 나의 모든 것이었다. 글쓰기는 내게 종교의 대체물이 되었다."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2000년작 '눈먼 암살자'(민음사)를 읽다. 작가가 61세에 집필한 작품이다. 한국 번역본으로 두 권, 900쪽에 육박하는 묵직한 분량이다. (덕분에 추석 연휴 전에 시작해 지금까지 읽었다) 분량만으로만 봐도 작가 후반부의 역량이 집대성된 작품이라 여겨진다.  


액자 안 액자 소설 구조다. 82세의 아이리스 체이스 그리픈이 말한다. 아이리스는 유복한 단추공장 사장의 손녀로 태어났다. 하지만 참전군인이었던 아버지대에 이르러 사업은 조금씩 쇠락기에 접어든다. 아이리스는 결국 10대 후반의 나이에 신흥 사업가인 리처드와 일종의 정략 결혼을 했다. 부와 함께 명예를 중시하던 아버지와 달리, 리처드와 그의 여동생 위니프리드는 속물적인 졸부였다. (애트우드는 이 남매의 한심한 행각을 신나게 놀린다) 타협적인 아이리스와 달리, 동생 로라는 리처드의 속물성에 반항한다. 스페인 내전, 2차대전 등을 거치며 사업은 부침을 겪고, 아이리스와 로라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정 안팎의 파고에 맞서 나간다. 이 이야기 안에는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요절한 로라가 남긴 소설 '눈먼 암살자'가 포함돼 있다. 로라는 이 소설 한 편으로 당대에는 논란이 됐고, 후대에는 불멸의 작가가 됐다. '눈먼 암살자'는 부유층 여성이 노동운동가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는 내용이다. 노동운동가는 여성에게 우주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SF를 들려준다. 여성은 때로 이 SF의 이야기를 이어 자신만의 이야기로 꾸며낸다. 이것이 액자 안 액자 소설이다. 





마거릿 애트우드(1939~)



이 복잡한 구조는 매우 지적이고 정교하다. 액자와 액자의 이음새가 잘 보이지 않고, 간혹 삽입되는 가상의 신문 기사는 사건의 전후맥락을 건조하게 안내한다. 신흥부자이자 속물적 허영을 가진 남편과 전통부자이자 귀족적 정신을 가진 아내의 불화로 가득찬 결혼생활 묘사는 익숙해서 새롭지는 않다. '눈먼 암살자'가 나온지 17년밖에 안된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액자 가장 바깥의 이야기는 상당히 고풍스럽게 읽힌다. 


20대에 요절한 로라는 물론, 숙적 같던 리처드와 위니프리드가 모두 죽은 뒤, 노년의 아이리스는 차분히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제 리처드와 위니프리드에겐 입이 없기에, 역사의 주도권은 아이리스에게 있다. 소설은 노년의 아이리스가 걷거나 먹거나 하는 일상생활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몇 차례나 묘사하지만, 기억하고 말하는 능력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다. 일생을 힘겹게 살아왔을지언정, 적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아이리스는 승자다.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권력이나 돈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아이리스의 특권이기에, 아이리스는 그것을 마음껏 누린다. 


물론 특권은 남용되선 안된다. 그리고 내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끝없이 하는, 그러면서 그 말에 과도한 확신을 담은 노인들이 자꾸 떠오른다. '눈먼 암살자'도 그런 소설일까. 아이리스는 불특정다수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종반부에 가면 청자가 특정돼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래서 '눈먼 암살자'의 이야기는 한껏 부풀었다가 겸손하게 수그러든다. 난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청자, 넓게는 후속세대에 대한 아래와 같은 나지막한 조언도 좋다. 


부자, 가난뱅이, 거지, 성자, 수십 개의 출신 국가, 수십 개의 취소된 지도, 수백 개의 파괴된 마을들, 네 마음대로 고르렴. 그로부터 네가 물려받은 유산은 무한한 추론의 영역이다. 너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단다





어니스트 헤밍뭬이 말년의 인터뷰들을 묶은 '헤밍웨이의 말'(마음산책)을 읽다. 소문난 플레이보이이자 낚시광, 사냥꾼, 투우애호가, 기자, 작가였던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쿠바의 거처에서 글을 썼는데, 좀처럼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1954년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중의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의 건강은 이후 쇠퇴일로였다. '헤밍웨이의 말'에 실린 인터뷰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헤밍웨이가 나이보다 늙어보인다는 점이었다. 비행기 사고로 인한 부상 때문에 그럴 것이고, 에너지를 젊은 시절에 모두 쏟아부어버렸기 때문에도 그럴 것이다. 7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2시간 공연을 거뜬히 소화하는 믹 재거 같은 괴물이 있긴 하지만, 사람이 한평생 쓸 수 있는 정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말년의 헤밍웨이는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글쓰는데 쏟기로 한 뒤,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친교는 자제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사람들은 헤밍웨이를 가만 두지 않았다. 4편의 인터뷰 중 2편이 허락 없이 불쑥 찾아가 얻어낸 것들이다. 나도 기자지만, 어휴, 기자놈들. 그래도 이런 기자들 덕분에 헤밍웨이 말년의 생각과 태도들을 전해들을 수 있으니 기쁜 반면, 원치 않은 유명세에 시달렸을 헤밍웨이가 가엽기도 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헤밍웨이가 유명세를 지겹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유명세 덕에 누린 이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헤밍웨이는 젊은 시절 기자로 일했는데, 자기 인생에 별 도움이 안되는 명사의 사생활을 캐물어야 하는 인터뷰가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말에서 내가 인터뷰 기사를 늘 힘들어하는 근거를 대려고 애썼다. 하지만 난 헤밍웨이도 아니고 어찌 됐든 일을 해야 하니 명사 인터뷰 거리가 있으면 한다. 마침 오늘 그런 기자회견이 있는데, 지독히도 가기 싫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직업상 책무에 속하니 간다.   


'헤밍웨이의 말'에 대해 쓰려다가 딴 얘기만 썼다. 





김훈의 신작 '공터에서'(해냄)를 읽다. 작가는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의 인상과 파편들을 엮은 글"이라며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뒤고 쓸 수밖에 없었다"고 후기에 썼다. 소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차세의 삶은 실제 작가의 삶과 많은 부분 겹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마동수 일가 4인의 삶이 각 장마다 시점을 달리하며 제시돼있다. 일제강점기에 유년 시절을 보낸 마동수는 중국,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해방후 귀국했다. 피난지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해 마장세, 마차세 2남을 두었으나, 집에 발붙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았다. 간혹 집에 들어올 때 고등어나 쌀을 가져와 며칠 쉰 뒤 다시 사라지는 식이었다.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은 함흥 철수 때 남편, 그가 안고 있던 젖먹이 딸과 헤어졌다. 피난지 부산에서 만난 마동수와 살림을 차렸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도순의 삶은 여전히 신산했다. 이도순의 말년은 요양원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과 싸우면서 사그러졌다. 마장세는 월남전에 파병됐다가 현지에서 전역한 뒤 귀국하지 않고 미크로네시아 일대에서 고철 사업체를 차렸다. 서울에 며칠 돌아온다 해도 가족과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마차세는 형이나 아버지에 비해선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다. 전역후 복학하지 않고 바로 취직을 했으며, 미대를 나온 여성과 결혼했고, 병이 깊어가는 노부모를 돌봤다. 밥벌이가 끊긴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아내가 학원 강사일을 해 돈을 벌었다. 마차세는 앞으로도 그렇게 한국의 가장으로 살아갈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마차세의 처 박상희의 이야기가 살짝 끼어든다. 


'공터에서'를 "소설판 '국제시장'" 혹은 "거꾸로선 '국제시장'"이라고 하면 이상할까. 지근거리에서 보며 자랐지만 이해하기 힘들었던 아버지(세대), 그래도 마침내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아버지(세대)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제시장'에서 코믹한 기운을 모조리 뺀 뒤, 김훈 특유의 비장미가 섞였다고 하겠다. 거기에 '국제시장'에 비해서는 아버지 세대와 조금 더 거리를 두려는 의식이 강하다고 하겠다.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연고지 없는 열대의 섬을 떠도는 마장세처럼. 그러나 마장세조차 기이한 우연과 그 자신의 과오로 인해, 결국 한국땅으로 소환되고 만다. 우리는 아버지 세대, 우리가 발 딛고 선 문화적 터전, 과거로부터 온전히 놓여날 수는 없다고 결국 작가는 수긍하고 있다. 마차세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고, 평생 치러보지 않은 부모 제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그의 아내 박상희다. 소설에서 박상희는 이상적인 아내, 좀 더 과감히 말해 구원의 여신처럼 그려진다.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는 문장은 책 뒤 표지, 그리고 신문의 책 광고에도 나온다. 세상살이의 엄혹함, 밥벌이의 고단함은 김훈 소설의 주된 정조이기도 하다. '국제시장'을 봐도, '공터에서'를 읽어도 아버지 세대에게 그런 정조는 뿌리 깊은 것 같다. 광복 이전부터 전쟁 이후까지 마동수의 삶, 베트남전에 참전한 마장세의 삶이야 당연히 그렇다 하더라도, 경제성장기의 한국에서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아간 마차세의 삶도 무척이나 고되다. 입사 3개월만에 문 닫은 경제잡지에서 나온 마차세는 수차례의 면접에서 떨어진 뒤 오토바이 수송일을 하는데, 육중한 트럭 사이, 여름철 녹아내려 달라붙는 아스팔트 자국을 끌며 배달을 하는 묘사가 그럴싸하다. 단지 나의 성장배경이나 현재의 생활환경은, 이렇게 고단한 삶의 묘사에 대해, 적자생존의 잔혹함을 다룬 잘찍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이상의 이입을 허락하진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고단함을 강조하는 작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긴 어려웠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를 읽다. 2011년 나왔고, 2017년 1월 개정신판이 나왔다. 그 사이 유시민은 직업 정치인에서 전업 작가가 됐고, '이명박 정부 3년차'에서 '박근혜 탄핵 이후'가 됐다. 바뀐 시대 상황이 일부 포함됐지만, 유시민은 "초판본을 읽은 독자라면 개정신판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드린다"고 '개정신판 서문'에 적었다. 전업작가로서 이런 태도는 훌륭하다. 표지와 제목만 바꾼 개정판을 슬쩍 내면서 신간처럼 시치미 떼는 출판사가 많아서 더욱 그렇다. 


홉스, 스미스, 마르크스 등의 국가론을 정리하는 초반부를 읽으면 "이 사람 공부 정말 잘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각 분야의 전공자가 보면 오류를 발견하거나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한 방식으로 본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리가 정말 잘돼있다. 각 이론가들의 핵심 저서를 읽고 이 정도로 정리해낼 수 있으면, 그 어떤 시험도 문제가 없겠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유시민은 '머리 속에 차곡차곡 서랍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100% 객관'은 없다. 이 정리 작업에도 당연히 저자의 주관이 들어간다. 유시민은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등을 언급하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지향을 내비친다. 국가주의 국가론에 대한 거부감이야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고, 한국의 좌파에 대해서도 은근히 조롱한다. 여전히 혁명의 꿈을 꾸는 좌파들을 '고독한 블로거' 정도로 묘사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표현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종반부에 이르러서는 저자의 국가관, 정치관을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 정치인이 따라야할 도덕법에 대해 말하는 마지막 장이 대표적이다. 이 장에서는 아예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보수 정당, 자유주의 정당, 진보 정당이 치른 선거 결과를 분석하면서,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의 연합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 정당이 각자 나설 경우, 보수정당의 승리는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의 결과"이기에 그렇다. 그러면서 노무현 집권 당시 진보파들의 비판에 대해 섭섭함을 드러내고, 정치인은 '신념윤리'가 아니라 '책임윤리'에 더 많은 가중치를 둬야 한다고 말한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지만, 반발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반발에 다시 날선 비판을 하는 것보단, 어떻게든 결과를 만드는 것이 '책임윤리'에 충실한 정치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