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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 지식 소매상, '바디: 우리 몸 안내서' 빌 브라이슨의 '바디: 우리 몸 안내서'(까치)를 감탄하면서 읽다. 브라이슨은 생물학자도 의사도 아닌데, 피부와 털에서 시작해 뇌, 심장, 뼈, 소화기관을 거쳐 생식기, 질병, 현대 의학의 문제까지 우리 몸과 관련된 온갖 상식들을 흥미롭고 알기 쉽게 풀어낸다. 가끔 '평균적인 인간이 평생 내놓는 똥의 양은 6톤' 같이 '굳이 이런걸 알아야 하나' 하는 지식도 있지만, 저 지식을 내가 책을 들추지 않고 적을 수 있는데서 알 수 있듯 이 지식들은 기억에 남을만큼 재미있다기도 하다. 수많은 책을 살피고, 수많은 전문가를 만나 취재한 공력이 고스란히 담겼다. '지식 소매상'이란 말은 이 정도 글을 쓴 뒤에 자칭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몸에 대해 500페이지 이상 서술한 이 책을 읽은 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더보기
페더러와 조코비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오랜만에 글 자체에 감탄하고 집중하면서 읽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바다출판사)이다. 10대 때부터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아 각종 항우울제 복용, 전기치료 요법을 병행하면서 살았고, 섹스, 마약, 술 등 온갖 것들에 중독된 적이 있으며, 결국 약이 듣지 않아 46세에 자살한 작가. 월리스는 미완성 유고를 포함해 단 세 편의 장편을 남겼으며, 평생 이런저런 매체의 청탁을 받아 취재하고 글을 작성했다. 이 책 역시 그런 에세이들의 편역본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에서 "넌더리가 날 정도로 강박적인 자기 관찰, 삶이 진부하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에 대한 또렷한 혐오, 심원한 존재론적 감수성에 촌스러운 비장함이 더해지는 것을 막는 냉소적 재치, .. 더보기
어제는 한 방울 정액, 오늘은 시신 '메멘토 모리' 영국의 고전 학자 피터 존스의 '메멘토 모리'(교유서가)를 읽다.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로마인의 지혜'라는 부제가 붙었다. '지혜'에 방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초반부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로마의 사회학적, 통계적 사실이 먼저 제시된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 로마에서 사람이 태어나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은 현대보다 훨씬 낮았다. 10만명이 동시에 태어난다고 가정하면, 다섯 살에는 5만명만 살아있다. 마흔 살까지 사는 사람은 3만명, 예순을 넘기는 사람은 1만3000명, 일흔살까지 사는 사람은 5500명 정도다. 전체 인구의 50%가 20세 이하로 추정된다. 그러니 고대 로마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축복, 사회적 행운이었다. 가부장 사회였던 로마에서는 아버지인 가장이 가.. 더보기
가족극의 진화 '프라이빗 라이프' 가족은 픽션의 주요한 테마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도 따져보면 가족극이다. 햄릿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비슷한 배우가 비슷한 가족 역할을 연기한 영화를 찍어 대가로 인정받는 사람도 있다. 오즈 야스지로다. (요즘 바탕 화면에 오즈 야스지로 묘비 사진을 깔아두었다. 원래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유전에서 불 뿜어나오는 장면이었는데, 그게 요즘 주변 상황 같아서...) 넷플릭스에서 '프라이빗 라이프'를 봤다. '코미디'라고 돼있긴 한데, 거의 웃지 못했다. 오히려 영화 속의 상황과 감정이 너무 인텐스해서(영화 속에서도 '인텐스'라는 표현이 몇 번 나온다), 어젯밤 반을 보고 오늘 오전 나머지를 봤다. 요즘 내 감정적 체력은 이런 인텐스한 영화를 두 시간 보아낼 수 없는가보다. 40대에 접어든 뉴욕의 극작가 리처드.. 더보기
SF와 역사소설, '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 북'(열린책들)을 읽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로 이어지는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2054년이 배경이다. 하지만 책이 1992년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2020년의 독자에게는 작은 당혹감이 생긴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만 빼놓으면 많은 부분의 과학기술이 2020년에 뒤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유선 전화로 한다! 화상을 볼 수 있는 데, 별로 유용한 것 같지는 않다. 비상사태가 벌어져 서로가 서로에게 급박하게 연락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전화를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그것도 회선이 적은지 잘 터지지 않는다.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에 살다보.. 더보기
IT에 의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피드 **스포일러 있음 닉 클라크 윈도의 '피드'(구픽)를 읽다. 대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핵전쟁, 기후위기, 바이러스의 창궐이 아닌, '피드'라 불리는 IT 기기의 고장으로 인한 종말이 그려진다. 신체에 피드를 이식하면 별도의 디바이스 없이도 인터넷에 접속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피드를 통해 즉시 필요한 지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피드가 갑자기 다운되고, 이후 잠이 든 사람들이 깨어나면서 다른 인격체가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잠이 들면 누군가가 반드시 그를 지켜보면서 다른 인격이 되는 순간을 보는 즉시 죽여줘야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문명은 파괴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남아 중세로 돌아간 듯한 삶을 이어간다. '피.. 더보기
시네마란 무엇인가, '아이리시맨' **스포일러 있음 마틴 스콜세지는 마블 영화를 두고 "시네마가 아니다"라고 했다. 스콜세지의 '시네마'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신작 '아이리시맨'이 시네마인줄은 알 것 같다. 스콜세지는 이 영화를 제발 스마트폰에서는 보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난 넷플릭스에서 공개하기 이틀 전 시네큐브에서 '아이리시맨'을 보고, 넷플릭스에서 공개 후 다시 봤다. 상영시간이 3시간30분에 달하니, 며칠 사이 7시간을 이 영화에 투입한 셈이다. 며칠 후 또다른 3시간30분을 써도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트럭 운전사 프랭크(로버트 드니로)가 갱스터 러셀(조 페시)를 만나 '궂은 일'을 맡으며 성장하는 대목, 프랭크가 전설적인 트럭노조 지도자 지미 호파(알 파치노)를 만나 친분을 쌓는 .. 더보기
'겨울왕국2'의 안티클라이막스 ***'겨울왕국2'의 스포일러가 있음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순간 정말 끝났다. '겨울왕국2'는 한국에서도 1000만 관객을 노리는 글로벌 콘텐츠지만, 대중영화의 익숙한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안티 클라이막스'라고 해야할까. 클라이막스에 이르지 않고 영화가 끝나는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 대목이 클라이막스로 짐작되는데, 다시 생각해도 클라이막스가 해소되는 순간의 쾌락을 의도한 것 같지 않다. '겨울왕국2'에는 적(악당)이 없다. 강력하든 우스꽝스럽든,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악당이든 나름의 현실적 이유가 있는 악당이든, 가족 영화에는 악당이 필요하다. 하지만 '겨울왕국2'에서는 엘사와 안나 자매가 누구와 맞서 싸우는지 모호하다. 엘사가 목숨을 걸고 찾아간 곳에도 악당은 없다. 엘사가 최종 목적.. 더보기
묘비 대신 교향곡,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미국 작가 M T 앤더슨의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돌베개)을 읽다. 흥미진진한 서술, 뚜렷한 관점, 이것들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자료의 측면에서 모범적인 논픽션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삶에 대한 책이자, 2차대전 전쟁사이며, 소비에트 정치 비판서다. 546쪽에 이르는데, 책을 무겁지 않게 만든데다가 번역이 매끄러워 수월하게 읽힌다. 책 초반부는 간략하게 요약된 쇼스타코비치의 성장기, 1920~30년대 소비에트의 분위기와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다. 쇼스타코비치가 10살이던 1917년 러시아엔 레닌이 주도하는 혁명이 일어났고, 여느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쇼스타코비치 일가 역시 혁명의 흐름에 발을 담근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가 작곡가로서 입지를 넓혀가던 시절 등장한 지도자는 '강철 인간'이란 뜻의 스.. 더보기
하드SF 이후의 SF, '에스에프 에스프리' '모든 SF팬들의 필독서'라고 하면 출판사도 민망해서 사용하지 않을 책 띠지 문구 같지만, 셰릴 빈트의 '에스에프 에스프리'(아르테)엔 그런 수식을 붙이고 싶다. SF 비평서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통시적인 관점과 공시적인 관점에서 이 책은 모두 충실하다. Science Fiction의 측면과 Speculative Fiction의 측면을 두루 살피면서, 좋은 작품에 대한 가이드 역할도 한다. 'Science Fiction: A Guide for the Perplexed'라는 원제의 느낌보다는 조금 더 아카데믹한 서술이라 읽기가 마냥 수월하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다코 수빈의 '인지적 소외' 개념이 흥미롭다. 수빈은 "작가의 현실 속에서, 그리고/또는 그가 몸담은 문화의 과학.. 더보기
자매 갈등은 어떻게 공적 의무와 충돌하는가, '더 크라운' 1년 전쯤 넷플릭스 '더 크라운'을 몇 편 보다가 접어두었다. 공들인 '웰메이드' 시리즈인줄은 알겠으나, 전개가 지지부진한데다 캐릭터들의 고뇌에 온전히 빠져들기 어려웠다. 예기치 않게 일찍 왕위에 오른 20세기 중반의 영국 여왕 이야기는 나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배우를 교체해 시즌 3이 방영될 예정이라는 소식에 보다 만 지점에서 다시 관람을 시작했다. 이번엔 좋았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시리즈의 분위기에 좀 싫증이 나기도 한 터였다.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세 줄짜리 시놉시스와 예고편을 보면 대단히 독창적이지만 막상 본편은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은 작품들이 많았다('하이 컨셉'이라 해야 할까). 그러다보니 넷플릭스를 뒤지며 뭘 볼까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관람패.. 더보기
어느 위대한 작가의 전처 비난, '사실들: 한 소설가의 자서전' 필립 로스(1933~2018)가 1991년 펴낸 '사실들: 한 소설가의 자서전'은 작가의 분신 주커먼이 표현하는 대로 "내 전처는 쌍년이었다"라고 말하는 글이다. 그리 길지 않은 글의 초반 3분의 1은 유대계 미국인으로서 작가의 성장기를 다룬다. 아버지는 유대계에 대한 은근한 멸시와 차별을 굳건한 의지로 이겨낸 남자였다. 로스는 그런 가정에서 모나지 않은 삶을 살다가 대학에 진학한다. 여기까진 부드럽게, 애상 어리면서도 적당히 진지한 분위기의 글이다. 그러다가 로스가 조시라는 여성을 만나는 대목부터 글의 분위기가 급변한다. 연상의 조시는 유대계가 아니었고, 다소 난폭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며, 이혼한 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웨이트리스였다. 단편 작가로 데뷔했고, 이제 남은 삶을 문학에 바치겠다고 다짐하.. 더보기
위대하고 진정한 관심사를 찾아라, '오늘부터, 시작' 영국 시인 테드 휴즈(1930~1998)의 '오늘부터, 시작'(비아북)을 읽다. 휴즈가 BBC 프로그램 '듣기와 쓰기'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은 시작법에 대한 책으로 현지에선 1967년 출간됐다. 한국에 1990년 해적판으로 출판됐는데 이후 절판돼 중고서점에선 고가에 거래됐다고 한다. 이번에 매끈한 번역과 깔끔한 편집으로 단장돼 출간됐다. 52년 전 출간된 책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휴즈는 사냥에 대한 어린 시절의 열정을 돌이키고, 오소리, 파리, 달팽이, 여우, 안개, 바람을 관찰하고 시 쓰는 방법을 소개한다. 인용하는 시인도 D H 로렌스, 실비아 플라스, T S 엘리엇 같은 옛 시인들이다. 휴즈가 살아서 올해 책을 냈다면 전혀 다른 소재의 시와 최근의 시인들을 소개할 수 있었겠지. 솔직히 여우를 .. 더보기
불만과 혼란의 영화, '조커' *스포일러 있음. 불만과 혼란의 영화. '조커'는 그런 영화다. 조커는 DC코믹스에서 배트맨의 숙적이다. 잭 니컬슨, 히스 레저 등이 조커를 연기해왔다. 조커는 돈도 없고, 가문도 없고, 초능력도 없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면서도 질서를 추구하는 배트맨을 괴롭히지만, 왜 괴롭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돈 때문도 아니고 세계 정복을 위해서도 아니고, 복수 때문도 아니다. 왜 나쁜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커는 무섭다. 우스꽝스러운 광대 놀음을 하는 것 같지만, 우스꽝스러운 일이 허용되지 않을 법한 순간에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이기 떄문에 무섭다. 조커는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려 한다. 하지만 혼란 이후의 헤게모니 같은 것을 노리지도 않는 것 같다. 그저 세계가 혼란에 빠지는 걸 즐길 뿐인듯하다. 그래서.. 더보기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 '포퓰리즘' 카스 무데,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포퓰리즘'(교유서가)을 읽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왔다. 200쪽 정도의 길지 않은 책이지만, 포퓰리즘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사례를 적재적소에 제시했다. 교과서적으로 명료하다. 역자는 친절하게도 라클라우와 무페, 슈미트, 베버 등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참고할만한 책도 제시해주었다. 편집의 센스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다. 그들(포퓰리스트) 주장의 핵심은 실제 권력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즉 포퓰리스트에게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림자 .. 더보기
한 영화팬의 애도와 추억,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스포일러 있음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영화관에 들어갔지만, 기대치 이상의 감정으로 나왔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매우 이모셔널한(감상적, 감정적이라는 표현보다 왠지 '이모셔널'이 적절하다고 느낀다) 영화고, 그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이 들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어쩌면 이 두 가지 관점은 결국 연결된다. '할리우드'는 60을 바라보는 타란티노가 이모셔널하게 돌아보는 추억, 역사, 소망, 꿈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할리우드'는 미국 문화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라 할만한 '찰스 맨슨 패밀리'의 샤론 테이트 살해 사건을 다룬다. 찰스 맨슨의 사주를 받은 3명의 불한당이 1969년 8월 8일 배우 샤론 테이트-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집에 침입해 임신 8개월의.. 더보기
백색의 두 가지 방향, '눈'과 '흰' 지난해 김민정 시인은 인터뷰하는 자리에 넓직한 교정지를 들고 왔다. 무슨 책이냐 물어보니 곧 나올 막상스 페르민의 '눈'(난다)이라고 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인 책이라고 자랑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작가 한강에게 이 책을 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페르민은 처음 듣는 작가라 이름만 기억했다. 인터뷰 다음 달 '눈'이 출간됐으나, 곧바로 집어들만큼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여름 막바지가 돼서야 챙겨두었던 '눈'을 펼쳤다. 1999년 출간된 책이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124쪽에 불과하고, 게다가 행간이나 여백이 넓어 텍스트는 더욱 적다. 마음 먹으면 1시간 이내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책을 '마음 먹고' 읽을 이유는 없다. 책에 여백이 많다는 건 그만큼 독서에도 여백.. 더보기
모든 병사의 죽음, '전쟁의 재발견' 마이클 스티븐슨의 '전쟁의 재발견'(교양인)을 읽다. 오랜만에 읽은 흥미진진한 논픽션. 원제는 'The Last Full Measure: How Soldiers Die in Battle'이다. 말 그대로 고대 전투 서사시 '일리아스'부터 현대 베트남전, 이라크전까지 전쟁에서 군인들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 그린다. (번역제목을 좀 점잖고 심심하게 달았다.) 이런 설명만 들으면 흔하고 말초적인 미시사 서술 같은데, 막상 읽으면 방대하게 수집돼 적절하게 배치된 자료에 감탄하고, 자료를 관통하는 저자의 안목에 또 감탄한다. 분량이 648쪽이라 들고 다니며 읽기는 좀 버거운데, 그래도 오래 걸리지 않아 완독했다. 청동기부터 무기가 조금씩 발달하면서 죽음의 방식도 달라지는 양상을 서술한다. 1대1의 전투를 선호하던 .. 더보기
자연에 끼어든 초자연, 스티븐 킹의 '아웃사이더' 스티븐 킹의 신작 '아웃사이더'(황금가지)를 읽다. 72세의 킹은 여전히 다산이다. 꽤 두꺼운 장편을 별다른 공백기 없이 매년 펴낸다. '아웃사이더'는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됐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올해도 또다른 장편이 예정된 모양이다. 내년엔 '아웃사이더' 중반부에 등장하는 홀리 기브니를 내세운 또다른 소설이 나온다. 예전에 미국의 장르 소설 작가는 이름을 내세운 기업처럼 작동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혹시 스티븐 킹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자료를 조사해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소도시의 리틀 야구단 코치이자 교사가 끔찍한 소년 성폭행 살해범으로 백주에 체포된다. 경찰들은 그를 범인으로 확신해 야구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는 .. 더보기
테드 창과 김초엽 두 권의 SF를 잇달아 읽다. 테드 창의 신작 '숨'(엘리)과 김초엽의 데뷔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딱히 비교해 읽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테드 창의 작품을 다 읽어가는 시점에 김초엽의 책이 손에 들어왔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세간의 평만큼 좋게 읽지는 않았다. 어떤 작품은 너무 길다고 느꼈다. '보르헤스가 5페이지에 쓸 이야기를 50페이지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영화 '컨택트' 덕분에 뒤늦게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주목받기도 했지만, 난 여전히 아서 클라크에 더 끌리는 사람이다. '숨'을 읽은 뒤에는 '보르헤스 비교'는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아지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의 훌륭한 업데이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 더보기
줌파 라히리의 세계 줌파 라히리의 책 두 권을 잇달아 읽다. 사실 다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라히리에 대해 몇 자라도 적어놓고 싶다. 먼저 읽은 책은 신간 '내가 있는 곳'(마음산책)이었다. 인도계 영국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라히리는 어느날 갑자기 이탈리아어를 배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곤 한다는데, '내가 있는 곳'이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장편소설이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했지만,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낯선 도시에 머물며 얻어낸 짤막한 이야기들이 '보도에서' '길에서' '사무실에서' '수영장에서'와 같은 제목을 단 채 이어진 연작 형태다. 감각적이고 투명하고 단순한 문체로 삶의 감각을 전한다. 작가가 모어보다 덜 익숙한 이탈리아어로 썼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스타일이 그러한지 알 수는 없었다. 어떤 부분에선 한때 내.. 더보기
일과 삶이 엮이는 순간, '본딩' 넷플릭스 시리즈 '본딩'을 봤다. '러시아 인형처럼' 이후 오랜만에 끝까지 본 넷플릭스 시리즈였다. 일단 끝까지 보기에 부담이 없다. 편당 15분 안팎, 총 7편으로 구성돼 있다. 시리즈 전부를 봐도 2시간 정도라는 얘기다. 모바일폰 환경,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매체 환경이 이런 분량의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게이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인 피트가 오랜 친구 티프의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극이 시작된다. 티프의 직업은 '도미나트릭스'다. 생소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성적으로 지배적인 여성'을 뜻한다. 티프는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 간지럼을 태워달라거나, 펭귄옷을 입고 씨름을 한다거나, 막말을 들을 때 성적으로 흥분된다는 남자들이 티프를 찾아온다. 티프는 고분.. 더보기
과격한 보헤미안 랩소디? '더 더트'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영화의 기획부터 제작까지 석 달만에 해낼 순 없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넷플릭스에서 본 음악영화 '더 더트'는 '보헤미안 랩소디'와 유사한 궤적을 가진다. 물론 좀 더 과격하긴 하다. 그건 퀸과 머틀리 크루의 음악, 태도적 간극에 기인한 것이기도 할테고. 프레디 머큐리가 성적, 인종적 소수자이긴 했지만, 퀸의 다른 멤버들은 비교적 '정상가족'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머큐리의 떠들석한 파티를 묘사했지만, 그런 행동이 당대 록커들의 태도에 비해 그다지 튄다고 볼 수도 없다. 영국의 록 신은 이미 섹스 피스톨즈 같은 '개쌍놈'의 음악이 휩쓸고간 뒤였으니까. 하지만 머틀리 크루는 차원이 다르다. 어느 록커들의 삶에 견주어봐도 떠들.. 더보기
고통스러운 삶에 익숙해지기, '부서지기 쉬운 삶' 미국의 철학자 토드 메이의 '부서지기 쉬운 삶'(돌베개)을 읽다. 원제는 'A Fragile Life: Accepting Our Vulnerability'다. 쉽게 말해 '철학 에세이'이라 할 수 있지만, 흔히 한국 출판계에서 '철학 에세이'라는 명명이 주는 어감보다는 무거운 책이다. 저자는 철학이 이론의 전개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메시지여야 한다고 말한다. 강단의 학자들이 까다로운 개념어로 세심하게 다루는 '철학'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철학'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모두 삶의 메시지를 전했다. 메이는 해탈하지 못한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 상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색한다. 메이는 '희박하나마 고통을 끝낼 수 있.. 더보기
이것저것 섞여 더럽지만 아름다운 강물, '아사코' **스포일러 있음어제 오전에 극장에서 다섯명 쯤의 관객과 함께 '아사코'를 봤다. 영화가 너무너무 이상한데, 바로 그런 이유로 흥미진진했다. 서사는 종잡을 수 없었지만, 감정은 정확히 묘사됐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이 주요 소재라는 점에서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까지 본 멜로 영화는 아니다. 이상한 흐름이 자꾸 생각나고, 왜 그리 이상하게 찍었는지 궁금하고, 스스로 해명해보고 싶다. 훌륭한 영화라는 뜻이다. 줄거리만 요약해도 이상하다. 오사카의 아사코는 어느 사진전에서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말도 안되게 급작스럽게 시작한 사랑이이었다. 하지만 바쿠는 안정적이기보단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저녁에 빵 사러 간다고 나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돌아오는 사람이다. 빵 사러 갔다가 동네 목욕탕에 들렀.. 더보기
군주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실존인물인 영국 앤 여왕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어딘지 실제 이야기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아마 영화의 양식이 지금까지의 시대극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여왕이 중심인 영화야 많았지만, 그의 측근들까지 모두 여성으로 그린 영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여왕과 두 여성 측근에 의해 조종되는 말에 불과하다. 권력있는 신하들조차 여왕 하녀의 술수에 놀아난다. 세습군주국가의 많은 왕이 그러했겠지만,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은 꽤나 이상하다. 군주로서의 의무감으로 국정을 억지로 수행하지만, 이웃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국가를 운영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안아픈 데가 없어서 회의에 불참하는 일이 잦고, 변덕이 죽 끓듯 하고, 기괴한 컴플렉스까지 갖고 .. 더보기
80일간의 어둠, '극야행' 가쿠하타 유스케의 논픽션 '극야행'(마티)을 읽다. '극야'란 말이 낯설었는데, 대략 '백야'의 반대말이다. 북극 지역에서 해가 뜨지 않고 몇 달이고 밤만 계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논픽션 작가이자 탐험가인 가쿠하타는 북극 지역의 극야를 홀로 걷기로 하고 4년에 걸쳐 차근차근 준비한다. 부분적으로 직접 걸어 지형을 익히고, 곳곳의 창고에 식량과 물품을 저장한다. 100여년 전에야 북극점, 남극점에 가장 먼저 도달하려는 경쟁들이 있었지만, 이제 지구 표면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고, 지구에 기록되지 않은 곳도 없다. 이제 탐험가는 어디를 가야할까. 가쿠하타는 극야행의 의미를 다음처럼 정의한다. 탐험은 요컨대 인간 사회 시스템 바깥으로 나오는 활동입니다. 옛날에는 탐험의 목적이 지도의 공백을 채우는.. 더보기
인사이트 있는 교양서, '앞으로의 교양' 스카쓰케 마사노부의 '앞으로의 교양'(항해)을 읽다. 일본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의 의뢰로, 편집자인 스가쓰케가 미디어, 디자인, 건축, 경제, 문학, 생명 등 12개 분야의 명사와 월 1회 대담을 했고, 그 중 11개를 묶어서 책을 냈다. 11명 중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건축가 이토 도요,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정도였다. 각 대담의 분량이 길지 않고, '일본책은 정리를 잘한다'는 인상이 있어, 우연히 입수하고 얼마 뒤 읽기 시작했다. 대담이 2016년 9월~2017년 9월 진행됐으니, 비교적 최근의 양상과 흐름에 대한 정보를 기대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의외로 인사이트가 있었다. 각 대담자 당 길지 않은 분량이다보니 간략하고 단정적이라는 인상도 없지 않았지만,.. 더보기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 에도가와 란포의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문학과지성사)를 읽다. 전자는 중편, 후자는 단편 분량이다. 두 편 합해서 150쪽이면 끝난다. 에도가와 란포(1894~1965)는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상의 이름으로 알려진 작가다. 필명은 란포가 좋아했던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한국 독자들이 일본 추리소설을 읽으며 에도가와 란포부터 시작하는 경우는 없는 듯하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현대 작가 아니면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마스모토 세이초 정도겠지.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151권으로 나왔다. 대산세계문학총서는 해외 문학 중에서도 문학사적 의미가 있으나 국내 번역은 잘 되지 않은 작품 위주의 목록을 꾸린 것으로 알고 있다... 더보기
'왕좌의 게임' 작가의 호러SF, '나이트플라이어' ***스포일러 있음조지 R R 마틴의 '나이트플라이어'(은행나무)를 읽다. 이제 마틴은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로 더 유명하다. '나이트플라이어'는 '왕좌의 게임'을 쓰기도 전인 1985년 선보인 작품이다. '왕좌의 게임'은 서양 중세를 연상시키는 판타지물인데, '나이트 플라이어'는 미래의 우주선 내부를 배경으로 하는 호러SF다. 물론 두 작품 다 잔혹하다. 사실 '나이트플라이어'가 더 잔혹하다. 머리통이 갑자기 터지고, 레이저가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가르고, 처리되지 않은 뼈조각, 살점, 눈알 등이 무중력 상태의 우주선 안에 둥둥 떠다닌다.몇 만 년동안 이동하고 있는 신비의 외계 종족 볼크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우주선 나이트플라이어에 오른 여러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초능력자가 주인공이다. 나이트플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