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685건

  1. 모범적 지식 소매상, '바디: 우리 몸 안내서' (1)
  2. 페더러와 조코비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3. 어제는 한 방울 정액, 오늘은 시신 '메멘토 모리'
  4. 가족극의 진화 '프라이빗 라이프'
  5. SF와 역사소설, '둠즈데이 북'
  6. IT에 의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피드
  7. 시네마란 무엇인가, '아이리시맨' (1)
  8. '겨울왕국2'의 안티클라이막스 (2)
  9. 묘비 대신 교향곡,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10. 하드SF 이후의 SF, '에스에프 에스프리'
  11. 자매 갈등은 어떻게 공적 의무와 충돌하는가, '더 크라운'
  12. 어느 위대한 작가의 전처 비난, '사실들: 한 소설가의 자서전'
  13. 위대하고 진정한 관심사를 찾아라, '오늘부터, 시작'
  14. 불만과 혼란의 영화, '조커' (4)
  15.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 '포퓰리즘'
  16. 한 영화팬의 애도와 추억,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17. 백색의 두 가지 방향, '눈'과 '흰'
  18. 모든 병사의 죽음, '전쟁의 재발견'
  19. 자연에 끼어든 초자연, 스티븐 킹의 '아웃사이더' (4)
  20. 테드 창과 김초엽
  21. 줌파 라히리의 세계
  22. 일과 삶이 엮이는 순간, '본딩' (1)
  23. 과격한 보헤미안 랩소디? '더 더트'
  24. 고통스러운 삶에 익숙해지기, '부서지기 쉬운 삶'
  25. 이것저것 섞여 더럽지만 아름다운 강물, '아사코'
  26. 군주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1)
  27. 80일간의 어둠, '극야행'
  28. 인사이트 있는 교양서, '앞으로의 교양'
  29.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
  30. '왕좌의 게임' 작가의 호러SF, '나이트플라이어' (1)

빌 브라이슨의 '바디: 우리 몸 안내서'(까치)를 감탄하면서 읽다. 브라이슨은 생물학자도 의사도 아닌데, 피부와 털에서 시작해 뇌, 심장, 뼈, 소화기관을 거쳐 생식기, 질병, 현대 의학의 문제까지 우리 몸과 관련된 온갖 상식들을 흥미롭고 알기 쉽게 풀어낸다. 가끔 '평균적인 인간이 평생 내놓는 똥의 양은 6톤' 같이 '굳이 이런걸 알아야 하나' 하는 지식도 있지만, 저 지식을 내가 책을 들추지 않고 적을 수 있는데서 알 수 있듯 이 지식들은 기억에 남을만큼 재미있다기도 하다. 수많은 책을 살피고, 수많은 전문가를 만나 취재한 공력이 고스란히 담겼다. '지식 소매상'이란 말은 이 정도 글을 쓴 뒤에 자칭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몸에 대해 500페이지 이상 서술한 이 책을 읽은 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모른다'는 말이다. 수많은 인체 기관의 용도, 역할에 대해 우리는 아직 많이 모른다. 최근에야 그 역할이 밝혀진 기관도 있고,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짐작만 하는 기관도 있고, 아예 왜 그런지 모르는 기관도 있다. 우리는 왜 딸국질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왜 하품을 하는지도 모른다. 왜 다치면 치명적인 고환이 인체 바깥에 돌출해있는지도 모른다. 왜 만성 통증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뜨거운 불에 데었거나 가시에 찔렸을 때 급성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몸을 보호할 수 없다. 즉 급성 통증은 '좋은 통증'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이 몇날 며칠간 사라지지 않는 만성 통증은 '몸의 보호'와 상관 없다. 대부분의 암 통증은 나타나는 시기가 너무 늦어 암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죽어가는 암 환자를 오랫동안 괴롭힐 뿐이다. 

 

마취 기술이 거의 없었고 각 장기의 기능에 대해 현대보다 훨씬 무지하던 시대에 행해진 각종 수술과 시술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은 너무 끔찍해 몸서리가 처졌다. 존 에프 케네디의 여동생 로즈 메리 케네디가 23살 때 받은 이마엽 절개술은 직전에 읽은 '살갗 아래'(아날로그)에도 나와 있어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의학적 처치는 대부분 실패해 환자를 죽게 했지만 간혹 성공해 의학의 신기원을 열기도 했다. 환자가 아니라 자기 몸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실험을 한 과학자, 의사도 많았다. '영웅적'이라 해도 될 것이다. 

 

몸에 대한 책의 결말이 '죽음'인 건 자연스럽다. 현대인의 사망 원인 중 암이 손꼽히는 건, 옛날 사람들은 암에 걸릴만큼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령 모든 암을 완치시킬 방법이 나온다 해도, 인류 전체의 기대수명은 단 3.2년 늘어난다. "가려서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해도, 어쨌든 죽는다." 생명체가 죽는 이유에 대해 여러 과학자들이 알아내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미진하다. (예를 들어 염색체 끝에 있는 텔로미어라는 특수 DNA 가닥은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짧아지는데, 정해진 길이에 이르면 세포는 죽거나 활성을 잃는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것을 막는다면 노화를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텔로미어는 노화 과정의 일부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늙으면 방광은 탄력을 잃어 화장실을 자주 찾아야 하고, 혈관은 더 쉽게 터져 멍이 잘 들고,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뿜어내는 혈액의 양도 줄어든다. 난자가 여전히 남아있어도 폐경은 찾아온다.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너무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라 화이자 같은 거대 제약회사도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 연구를 거의 포기했다. 알츠하이머병의 치료에 대해서는 한 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마찬가지 수준이다. 말기질환자의 50~60%가 죽음을 앞두고 강렬하지만 마음 편하게 해주는 꿈을 꾼다는 건 작은 위안이다. 죽은 뒤 봉인된 관 속에 묻히면 5~40년간 부패한다. 친지들이 무덤을 찾는 기간은 평균 15년이니, 세상에서 잊힌 뒤에도 시신은 여전히 지구에 남는다. 만일 화장한다면 재는 2킬로그램 정도다. 브라이슨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것이 우리가 남기는 전부이다. 그러나 삶이란 살아볼 만하지 않았던가?

오랜만에 글 자체에 감탄하고 집중하면서 읽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바다출판사)이다. 10대 때부터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아 각종 항우울제 복용, 전기치료 요법을 병행하면서 살았고, 섹스, 마약, 술 등 온갖 것들에 중독된 적이 있으며, 결국 약이 듣지 않아 46세에 자살한 작가. 월리스는 미완성 유고를 포함해 단 세 편의 장편을 남겼으며, 평생 이런저런 매체의 청탁을 받아 취재하고 글을 작성했다. 이 책 역시 그런 에세이들의 편역본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에서 "넌더리가 날 정도로 강박적인 자기 관찰, 삶이 진부하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에 대한 또렷한 혐오, 심원한 존재론적 감수성에 촌스러운 비장함이 더해지는 것을 막는 냉소적 재치, 이 모든 것을 정확히 담아낼 문장을 쓰는 데 쏟았을 장인적 열정"을 읽어냈다. 난 여기에 세상 모든 사태에 대한 비범한(실은 괴팍한) 시선, 인간사에 대한 혐오와 열망의 극단적 대비, 타인에 대해 생각한 그대로 혹은 더 신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도 들겠다. 첫번째는 정말 부럽고, 두번째는 저런 심성을 가진 누군가를 관찰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지만 난 갖고 싶지 않으며, 세번째는 훌륭한 저널리스트에게 필요한, 하지만 내겐 없는 덕성이다. 

 

역시 이 책의 핵심은 표제작이기도 한 에세이다. 잡지 하퍼스의 의뢰로 취재해 1996년 1월호에 실린 에세이인데, 월리스의 대표 에세이로 꼽힌다고 한다. 월리스는 취재 의뢰를 받아 카리브해 호화 유람선을 1주일 탑승한 후 이 에세이를 썼다. 심각하게 심사가 꼬인 인간인 월리스는 유람선에 탑승하기 위해 대기하는 시간에서부터 1주일 후 내리는 시간까지 탁월한 관찰력과 대담한 취재력과 '인간이 왜 저런 생각을...'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황당한 생각을 갖고 유람선 구석구석을 누빈다. 30분간 방을 비우면 이름은 알지만 얼굴은 본 적이 없는 메이드가 방을 청소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29분 비웠다가 돌아오거나 34분 비웠다가 돌아오는 등 이상한 실험을 해보는 식이다. 배의 선원이든 선장이든 승객이든 아주 비트는데까지 비틀어서 다크 시트콤의 가장 다크한 캐릭터처럼 묘사한다. '랍스터를 생각해봐'는 요리 잡지 고메의 의뢰로 쓴 글이다. 고메는 '메인 랍스터 축제'의 취재를 맡겼는데, 월리스는 요리 잡지에 랍스터를 산 채로 물에 넣어 끓이면 얼마나 괴로울지 생각해보라고 제안하는 글을 쓴다. 가재가 느낄법한 고통을 동물권 논쟁의 핵심적인 주제, 논변을 인용해가며 들려준다. 이 글이 동물권 잡지가 아니라 요리 잡지에 실렸다는 것 역시 중요 포인트다. 

 

하지만 월리스가 그렇게 꼬인 글만 쓰는 작가는 아니라는 것은 9.11 직후 미국 한 시골 마을의 풍경을 그린 '톰프슨 아주머니의 집 풍경'과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에 대한 예찬 '페더러,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에서 알 수 있다. 특히 후자와 같은 글을 헌정받을 수 있는 페더러는 얼마나 기쁠까. 이 글을 읽은 얼마 후 호주 오픈이 열려 일부러 페더러와 조코비치의 경기 중계를 봤다. 안타깝게도 이전 경기에서 잇달아 풀세트를 치르고 온 페더러는 절정의 힘과 기세를 가진 조코비치에게 맥없이 지고 말았다. 조코비치의 결승전도 기다렸다가 보았다. 조코비치의 여덟번째 호주 오픈 우승. 인간적인 페더러에 비하면 승리 로봇 같은 조코비치에 대한 헌사는 내가 쓰고 싶지만, 당장 월리스처럼 쓸 자신은 없다. 

 

영국의 고전 학자 피터 존스의 '메멘토 모리'(교유서가)를 읽다.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로마인의 지혜'라는 부제가 붙었다. '지혜'에 방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초반부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로마의 사회학적, 통계적 사실이 먼저 제시된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 로마에서 사람이 태어나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은 현대보다 훨씬 낮았다. 10만명이 동시에 태어난다고 가정하면, 다섯 살에는 5만명만 살아있다. 마흔 살까지 사는 사람은 3만명, 예순을 넘기는 사람은 1만3000명, 일흔살까지 사는 사람은 5500명 정도다. 전체 인구의 50%가 20세 이하로 추정된다. 그러니 고대 로마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축복, 사회적 행운이었다. 가부장 사회였던 로마에서는 아버지인 가장이 가족에 대한 모든 권리를 통제했다. 아들이 성인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심각한 부자 갈등이 생기지 않은 이유는, 아들이 성인이 될 때쯤이면 많은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을 '행운'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현대의 의학, 반노화 산업에 비교했을 때 고대 로마인이 신체의 노화에 대응할 방안은 전혀 없었다. 노인의 육체는 종종 혐오스럽고, 비참하고, 가혹하게 묘사됐다. 호라티우스는 "청년은 행동하고, 전성기의 사내는 논의하며, 노인은 기도한다"고 표현했다. 기도밖에 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어느 도시를 습격한 군인들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늙어빠져 죽을 때가 된 남녀들을 끌고나왔다. 전리품으로는 가치가 없을지언정 한바탕 웃음거리로 삼기엔 충분했으니까."

 

고대 로마에서는 죽음에 대해 당당한 태도가 칭송받았다. 질병이나 노화로 인한 죽음은 물론, 타의에 의한 죽음도 피하지 않고 맞이하는 태도를 중히 여겼다. 검투사 경기에 투입된 한 야만인은 적을 찌르라고 받은 창을 자기 목에 쑤셔박았다. '웃음거리가 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죽음을 끌어당긴 것이다. 네로의 자결 명령을 받은 세네카는 손목을 그은 뒤 비서들을 모아 구술했고, 그래도 숨이 끊이지 않자 김이 피어오르는 욕조로 가서 죽었다. 카이사르와 맞섰던 소 카토는 패색이 짙어지자 "그 압제자가 저지른 범죄를 봐주는 대가로 그자에게 뭔가를 빚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며 자살을 결심했다. 노예가 가져온 칼끝이 날카롭게 벼려있는 것을 본 뒤 "이제야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로군"이라고 말했다. 할복을 했으나 좀처럼 죽지 않았고, 놀란 의사가 달려와 내장을 넣고 상처를 꿰매려 하자 다시 손으로 배를 찢어 죽었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파나는 아들이 자신을 죽이라고 보낸 군인들에게 자기 자궁을 가리키며 "여길 찔러라!"라고 외쳤다. 

 

오래 남는 비문은 로마인들의 생사관을 살필 수 있는 증거다. 인상적인 몇 가지를 옮긴다. 

 

내 고향은 티부르, 내 이름은 플라비우스 아그리콜라요. 그렇소. 지금 나는 살아 있을 때 만찬장에 누웠던 자세 그대로 바로 여기에 누웠소. 나는 운명의 여신이 허락한 세월 동안 늘 자신을 잘 돌보았고 포도주를 실컷 마셨소. (...) 이 글을 읽는 벗들이여, 내 조언은 다음과 같소. 포도주를 준비하시오. 머리에 화환을 두르고 술을 드시오. 아름다운 여자들과의 잠자리를 거부하지 마시오. 죽으면 흙과 재가 다른 모든 것을 삼키리니. 
자연이 준 것을 자연이 되찾아갔다. 
이 집은 영원하나니, 나는 여기에 누웠고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으리라. 
나를 잃었다고 어째서 한탄합니까? 운명의 질서는 어지럽지 않습니다. 인간의 일은 사과열매와 같으니 무르익어 저절로 떨어지거나 누군가 너무 이르게 따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날 그 시간을 위해 사시오.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없소. 
목욕, 음주, 섹스는 우리 몸을 타락시킨다. 하지만 목욕, 음주, 섹스는 삶을 아주 좋은 것으로 만든다. 

 

로마인들은 자연에 맞서지 않았다. 늙으면 늙음을, 죽을 때가 되면 죽음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건 불명예로 받아들여졌다. 다음 같은 인용이 로마인들의 생사관을 잘 보여준다.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기왕 태어났으면 떠나온 곳으로 되도록 빨리 돌아가는 것이 차선이라네.(소포클레스)
삶이란 얼마나 하찮은가. 어제는 한 방울의 정액이었고 오늘은 시신 아니면 재다. 그러니 너는 이 덧없는 순간들을 자연이 너에게 의도한 대로 쓴 다음 흔쾌히 쉬러 가라. 때가 된 올리브 열매는 자신을 잉태한 대지를 축복하고 자신에게 생명을 준 나무에게 감사하며 땅으로 떨어진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가족은 픽션의 주요한 테마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도 따져보면 가족극이다. 햄릿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비슷한 배우가 비슷한 가족 역할을 연기한 영화를 찍어 대가로 인정받는 사람도 있다. 오즈 야스지로다. (요즘 바탕 화면에 오즈 야스지로 묘비 사진을 깔아두었다. 원래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유전에서 불 뿜어나오는 장면이었는데, 그게 요즘 주변 상황 같아서...)

 

넷플릭스에서 '프라이빗 라이프'를 봤다. '코미디'라고 돼있긴 한데, 거의 웃지 못했다. 오히려 영화 속의 상황과 감정이 너무 인텐스해서(영화 속에서도 '인텐스'라는 표현이 몇 번 나온다), 어젯밤 반을 보고 오늘 오전 나머지를 봤다. 요즘 내 감정적 체력은 이런 인텐스한 영화를 두 시간 보아낼 수 없는가보다. 

 

40대에 접어든 뉴욕의 극작가 리처드, 작가 레이첼 부부가 주인공이다. 부부는 아이를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만 매번 성공하지 못한다. 입양을 하려다가 사기를 당하고, 의학적인 시술은 여자 혹은 남자 쪽의 문제로 매번 실패한다. 부부는 건강한 난자 기증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의붓조카 세이디를 떠올린다. 청년 예술가로서의 야심을 가진 세이디에게 뉴욕의 예술가 부부 리처드와 레이첼은 롤모델이다. 세이디는 다소 답답한 윤리관과 세속적 세계관에 붙잡힌 친모보다, 뉴욕의 삼촌, 숙모를 더 가깝게 느낀다. 리처드와 레이첼은 난자 기증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데, 세이디는 의외로 흔쾌히 승락한다. 이들 부부가 아이를 갖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해준 그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물론 친모는 노발대발하지만, 이미 성인으로서 결정을 내린 딸을 말리진 못한다. 

 

'프라이빗 라이프'에서 표현되는 가족 사이의 감정은 사실 매우 전통적이다. 중년의 부부는 서로를 존중하며 살지만, 더 이상 로맨틱한 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든 아이를 가져 전통적인 핵가족을 만들려는 사람들에 가깝다. 엄마를 미워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썩 좋아하지도 않는 세이디와 딸에게 조금 더 많은 성취를 요구하는 엄마의 관계도 많은 모녀 갈등 드라마에서 목격된다. 리처드와 레이첼 부부가 경험하는 의학 과정(심하게 말하면 출산 산업)의 문제가 끼어들면서 전통적 가족극에는 트위스트가 생긴다. 환자 대기실에서 완전히 침묵한 불임 부부들이 가득 앉아있는 모습은 우울하지만, 그렇다고 불임의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린 SF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인물들은 근대 이후의 많은 가족들이 겪어온 보편적 감정을 드러내고 그 감정들 중 무엇도 개연성 없거나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이 감정들이 현대의 발전한 의학 기술과 가족관의 미묘한 변화를 거치면서 흥미로운 변이를 만들어낸다. 제목의 '사적인 삶'이 병원이라는 공적 공간에서의 임신과 출산 과정에 노출되면서, 부부는 때론 희망을 느끼고 때론 모욕을 겪는다. 혈연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제도로는 이어진 의붓조카의 난자를 기증받는다는 설정이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가족극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창작자의 사고 실험으로 이해한다. 세이디에게 조금 더 넓은 세상을 찾아주려는 이해심과 능력은 친모가 아니라 의붓 친척에게 있었다. 

 

연출과 대본을 맡은 이는 50대 후반의 여성 타마라 젠킨스. 몇 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간혹 연기도 했다고 한다. '프라이빗 라이프'의 전작 '세비지스'는 2007년작이다. '프라이빗 라이프'가 '원 히트 원더'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 영화의 만듦새를 보면 오히려 지난 10여년간 젠킨스의 재능이 빛을 보지 못했다는 추정이 더 설득력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한국영화에서도 좀 더 괜찮은 가족극을 만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엄마 불쌍해, 아빠도 힘들어, 그도 아니면 우리집은 콩가루야, 라고 말하는 그런 영화들 말고. 

 

 

리처드와 레이첼 부부.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 북'(열린책들)을 읽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로 이어지는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2054년이 배경이다. 하지만 책이 1992년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2020년의 독자에게는 작은 당혹감이 생긴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만 빼놓으면 많은 부분의 과학기술이 2020년에 뒤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유선 전화로 한다! 화상을 볼 수 있는 데, 별로 유용한 것 같지는 않다. 비상사태가 벌어져 서로가 서로에게 급박하게 연락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전화를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그것도 회선이 적은지 잘 터지지 않는다.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에 살다보니 좀 이상한 설정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뉴트로인가. 

 

14세기 영국 시골마을로 가 중세 생활상을 관찰하려는 역사학도 키브린과 21세기에 남은 그의 지도교수 던워디가 중심이다. 던워디의 온갖 걱정을 뒤로 하고 키브린은 과거로 향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정체모를 병을 앓고 쓰러진다. 같은 시각 영국에서도 질병이 퍼져 학교 주변 도시가 격리되는 비상사태가 벌어진다. 키브린은 중세 사람들의 간호 끝에 정신을 차리지만, 이후엔 중세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병에 걸린다. 두 시대에 퍼진 병의 원인을 밝히려는 추리와 이에 대응하는 키브린, 던워디의 노력이 800쪽 넘는 이야기를 추동한다.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갈등구도, SF적 설정 등을 소개하는 초반부를 지나 키브린과 던워디가 상황을 파악하고 적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반부로 간다. 솔직히 중반부에선 읽는 속도가 잘 붙지 않는다. 코니 윌리스 소설 속 사람들이 그렇다고는 하는데, 좀 수다스럽고 쓸데 없는 일들을 많이 한다. 장르 영화에는 관객 모두가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그런 일을 해서 복장을 터지게 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곤 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그렇다. 주인공 중 한 명인 키브린이 대표적이다. 굳은 고집과 의지로 중세에 가겠다고 한 건 키브린인데, 어찌된 일인지 막상 중세에 도착해서는 소풍 갔다가 길을 잃은 유치원생처럼 응석을 부리고 짜증을 낸다. 병을 앓아 몸과 마음이 약해진 상태에서 한 행동이라고 소명이 되긴 하지만, 주인공이 줄곧 이렇게 행동하니 좀 답답하다. 

 

중세에 퍼진 질병이 페스트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종반부에서 속도가 붙었다.  키브린은 페스트가 퍼지기 전으로 가기로 돼 있었지만, 조작 실수로 인해 페스트가 한창 번지던 시기에 도착한 것이다. 키브린은 항체가 형성돼 페스트에 걸리지 않지만, 중세 사람들은 속수무책이다. 작가가 중반부까지 공들여 빚어냈던 등장인물들이 속수무책 죽어나간다. 혐오스러운 인간도 죽지만, 무고한 소녀도 죽는다. 고집스러운 시어머니가 죽고, 하인에게 연정을 품었던 며느리도 죽는다. 무엇보다 라틴어 기도문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마을의 유력자들로부터 냉대받지만, 사실 누구보다 신실하고 종교적인 로슈 신부까지 병마에 쓰러진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페스트가 중세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머릿속에 잘 구축됐던 마을이 병에 완패하는 모습은 생생하고 박진감있다. 페스트를 다룬 논픽션에서는 느끼기 힘든 생생함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굳이 시간여행SF가 아니라 중세 역사소설이어도 상관 없지 않은가. 

 

인터넷 서점에 가니 열린책들 판은 없고, 아작에서 새로 나온 판본만 있음. 그래서 내가 읽은 책을 직접 찍음. 

**스포일러 있음

 

닉 클라크 윈도의 '피드'(구픽)를 읽다. 대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핵전쟁, 기후위기, 바이러스의 창궐이 아닌, '피드'라 불리는 IT 기기의 고장으로 인한 종말이 그려진다. 신체에 피드를 이식하면 별도의 디바이스 없이도 인터넷에 접속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피드를 통해 즉시 필요한 지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피드가 갑자기 다운되고, 이후 잠이 든 사람들이 깨어나면서 다른 인격체가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잠이 들면 누군가가 반드시 그를 지켜보면서 다른 인격이 되는 순간을 보는 즉시 죽여줘야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문명은 파괴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남아 중세로 돌아간 듯한 삶을 이어간다. 

 

'피드'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묘사에서 새로운 건 없다. 그간의 지식은 모두 피드에 의존했기에, 피드가 다운된 이후 사람들은 지식을 얻을 길을 잃어버린다.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이 소규모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거나, 유랑인이 돼 문명의 잔해를 뒤지며 살아가거나, 날강도가 돼 약탈을 하며 삶을 잇는다. 여성이나 아이라고 안전이 보장되진 않는다. 톰과 케이트 부부는 피드 붕괴 이후 태어난 여섯살 딸 베아를 잃어버린 뒤, 아이를 찾아 세계를 헤맨다. 문명 붕괴 이후 세상을 떠도는 외톨이들의 모습은 코맥 맥카시의 '더 로드'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라스트 오브 오스'에서도 잘 재현됐다. '피드'의 묘사가 그것들보다 탁월하거나 독창적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처절한 풍경 자체에는 설득력이 있다. 

 

소설의 반전은 잠이 들었다가 깨어날 때 바뀌는 인격체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나온다. 잠이 든 사이 낯선 이의 몸에 스며든 인격체는 외계인이나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닌, 미래 인류의 정보화된 인격이었다. 브레이크 없는 문명 발전으로 지구의 환경은 파괴되고, 살아남은 인류는 지하로 파고들어가 세대를 이어간다. 이들은 피드로 전해진 조상들의 정신(인격, 영혼 등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에 침투하는 방식으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간다. 조상들을 움직여 지구 파괴를 막기 위해서다. 그렇게 해서 환경 위기는 벗어났다. 대신 인류 문명이 파괴된다. 작가는 과거 중요한 사건에 영향을 줌으로써 또 하나 갈래의 역사가 생기는 개념을 채택했다. 그런 의미에서 '피드'는 시간여행+대체역사물이다. 시간여행의 방법이 거대한 허브에 다운로드된 정신에 대한 해킹이라는 점이 새로울 뿐이다. 물리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는데,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해 다소 얼버무린다. 

 

미국에서 2018년 나온 책이다. 환경 위기에 무심한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를 연상시킨다. 주인공 톰의 아버지가 피드 개발자라는 설정, 톰의 오이디푸스 여정은 쓸모없는 장치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피드 개발자가 톰의 아버지이든 아니든 이야기 전개는 크게 바뀌지 않기 떄문이다. 아마존에서 10부작 시리즈로 만들어 방영했는데, "'블랙 미러'에 대한 아마존의 응답'이란 제목의 기사를 봤다. 

 

 

 

 

**스포일러 있음

 

마틴 스콜세지는 마블 영화를 두고 "시네마가 아니다"라고 했다. 스콜세지의 '시네마'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신작 '아이리시맨'이 시네마인줄은 알 것 같다. 스콜세지는 이 영화를 제발 스마트폰에서는 보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난 넷플릭스에서 공개하기 이틀 전 시네큐브에서 '아이리시맨'을 보고, 넷플릭스에서 공개 후 다시 봤다. 상영시간이 3시간30분에 달하니, 며칠 사이 7시간을 이 영화에 투입한 셈이다. 며칠 후 또다른 3시간30분을 써도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트럭 운전사 프랭크(로버트 드니로)가 갱스터 러셀(조 페시)를 만나 '궂은 일'을 맡으며 성장하는 대목, 프랭크가 전설적인 트럭노조 지도자 지미 호파(알 파치노)를 만나 친분을 쌓는 과정, 수감 뒤 돌아온 호파가 노조 위원장 자리를 되찾으려 하다가 프랭크에 의해 살해당하는 대목이다. 사실 두번째 대목은 조금 느슨하다. 갱스터의 활약보다는 호파와 그의 라이벌들의 투쟁 과정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갱스터와 노조의 세계에 한 발씩을 걸친 프랭크는 본의 아닌 중재자, 메신저 역할을 맡는다. 프랭크는 망설임 없이 러셀의 '부탁'을 처리하는 과감한 인물이지만, 질주하는 호파와 그를 우려하는 갱스터들을 중재하려는 협상가이기도 하다.

 

위의 세 대목이 세 가지 시간대로 엇갈려 구성된다. 프랭크와 러셀이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을 동반해 미 대륙을 가로지르며 자동차 여행하는 시간대, 프랭크가 러셀, 지미 호파와 친분을 맺어가며 미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간대, 주요한 모든 사건이 끝나고 한때 위세 등등했던 노조 지도자와 갱스터는 죽고 프랭크만 요양원에 남아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대다. 

 

알 파치노, 조 페시, 하비 케이틀이 나오긴 하지만, 역시 스콜세지의 페르소나는 프랭크 역을 맡은 로버트 드니로다. 영화는 노인 프랭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가장 궁금한 건 프랭크가 대체 누굴 향해 말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카메라가 복도를 이동하며 요양원의 모습을 비춘다. 노년의 프랭크는 휴게실에 앉아있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다. 프랭크는 카메라를 직접 바라보며 말한다. 프랭크의 눈 앞에 죽음이 다가온 것 같이 보이지만, 그는 자신의 죄악, 동료의 죄악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젊은 신부에게 무언가 말을 하다가 멈추고, 지미 호파 실종사건의 진실을 밝히러온 수사관들에게도 입을 다문다. 프랭크는 수사관들에게 자신의 변호사를 찾아가보라고 한다. 수사관들은 변호사는 물론 프랭크 주변 인물 모두가 죽었다고 답한다. 수사관들은 지미 호파의 유족이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프랭크마저 죽으면 유족들은 지미 호파의 최후를 알 길이 없다. 그래도 프랭크는 입을 다문다. 프랭크는 영화 속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던 진실을 카메라를 향해 털어 놓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르지만, 관객만이 안다. 이 관객이야말로 스콜세지가 적통을 이은 20세기 갱스터 장르 영화, 시네마 공동체의 구성원이라 할 수 있을까. 

 

프랭크는 갱스터로서의 직업 윤리, 지미 호파와의 인간적 인연, 가족에 대한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한다. 울거나 술을 마시거나 소리 지르진 않지만, 드니로는 어떻게든 프랭크의 내면을 표현한다. 조직의 논리와 인간적 연민 사이에 낀 프랭크는 입을 다문 채 짐을 짊어진다. 그 사이 가족은 프랭크를 외면한다. 딸 페기(안나 파킨)는 프랭크의 모든 악덕을 눈치챈 듯하다. 지미 호파의 실종 이후, 페기는 프랭크와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 프랭크는 감내한다. 신부에게도, 수사관에게도, 가족에게도 하지 못한 고백을 프랭크는 관객에게 한다. 그것이 스콜세지의 '시네마'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사인, 사망 시각 등을 낱낱이 알려준다. 처음 등장했을 때 '몇년 몇월 며칠, 몇 세 나이로 부엌에서 머리에 총을 세 발 맞고 사망' 하는 식의 자막을 보여준다. 킬러에 의해 죽든, 감옥에서 병사하든, 암으로 죽든,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주요 인물 중 오직 프랭크만이 요양원에 가만히 앉아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신부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은 "문을 조금 열어둔 채 나가달라"는 것이다. 스콜세지는 올해 77세다. 10년, 20년전만 해도 '아이리시맨'은 전혀 다른 영화가 됐을 것 같다. 남자들의 일과 쓸쓸한 끝을 이렇게 그려낼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거다. 

 

 

***'겨울왕국2'의 스포일러가 있음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순간 정말 끝났다. '겨울왕국2'는 한국에서도 1000만 관객을 노리는 글로벌 콘텐츠지만, 대중영화의 익숙한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안티 클라이막스'라고 해야할까. 클라이막스에 이르지 않고 영화가 끝나는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 대목이 클라이막스로 짐작되는데, 다시 생각해도 클라이막스가 해소되는 순간의 쾌락을 의도한 것 같지 않다. 

 

'겨울왕국2'에는 적(악당)이 없다. 강력하든 우스꽝스럽든,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악당이든 나름의 현실적 이유가 있는 악당이든, 가족 영화에는 악당이 필요하다. 하지만 '겨울왕국2'에서는 엘사와 안나 자매가 누구와 맞서 싸우는지 모호하다. 엘사가 목숨을 걸고 찾아간 곳에도 악당은 없다. 엘사가 최종 목적지에서 마주한 것은 정체가 모호하고 초자연적인 존재다. 이 존재는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그저 세상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할 뿐이다. 원래 상태를 훼손해 현재 상태로 바꾼 것은 인간이기에, 문명을 일군 인간의 입장에서 이 존재는 악일 수 있다. 반면 자연의 입장에서 이 존재는 선일 수 있다. 

 

물론 굳이 지목하려면 '겨울왕국2'에도 악당이 있다. 과거 아렌델 왕국을 다스렸던 엘사와 안나의 할아버지 루나드 왕이다. 할아버지 루나드 왕은 북쪽의 노덜드라 숲에 사는 원주민과 화친을 맺고 있었는데, 이는 사실 그들을 멸망시키고 아렌델을 풍요롭게 하려는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계략이었다. 루나드는 노덜드라 숲에 댐을 지어주었다. 이 댐이 문명의 덫이었다. 노덜드라 원주민들이 상상할 수 없는 앞선 기술력으로 만든 댐이지만, 이 댐은 원주민을 길들이고 아렌델에만 풍요를 가져다주는 도구였다. 루나드 왕은 '겨울왕국2'에서 유일하게 악의를 보이는 인물임에도 전통적인 악당으로 보기 쉽지 않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으며, 매우 적은 분량의 플래시백으로만 등장할 뿐이다. 그러므로 '겨울왕국2'에서 악당을 꼽자면,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정신과 유산 그 자체라고 해야한다. 

 

환경주의의 측면에서 '겨울왕국2'의 메시지는 '아바타'보다는 급진적이다. '아바타'는 나비족의 생활 터전으로서의 환경을 말하지만, '겨울왕국2'는 노덜드라 족의 거주지를 넘어서는, 자연 그 자체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넌지시 말한다. 물론 결말은 절충적이다. 엘사가 댐 파괴 이후 쏟아지는 물길을 막아내 아렌델의 수몰을 막아낸다. 아렌델이 파괴되고 아렌델 사람들이 새 터전을 찾아 떠났다면 한층 흥미로운 텍스트가 됐을 것이다. 

 

전편과 비교해 가장 큰 변화를 겪는 인물은 역시 엘사다. 안나, 크리스토프, 올라프의 성격이나 외모는 전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한데, 엘사는 여러모로 변화한다. 엘사의 마법은 전편에선 얼음 조각을 하거나 자칫 주변 사람을 다치게 하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집채만한 파도를 뛰어넘거나 한 도시를 구할 정도로 강해진다. 엘사는 더 이상 '이웃집 소녀'나 '우리나라 공주님'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서면 두려움을 느낄법한 초자연적 존재가 된다. 엘사의 외모도 여왕이라기보다는 엘프에 가깝게 변한다. 엘사를 극단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것도 인간계를 벗어난 엘사의 능력치와 연관될 것이다. 이렇게 된 엘사가 아렌델 왕국에 머물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인간이 아닌 정령으로서 엘사는 세속의 소소한 즐거움들을 버린 채 자연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이 일이 외롭고 힘들다는 것은 분명하다. '겨울왕국2'는 해피엔딩인가. 

 

*크리스토프의 '로스트 인 더 우즈' 대목은 1980~90년대 보이그룹(엔싱크, 웨스트라이프 등)의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했는데, 내가 관람한 상영관에서는 거의 아무도 웃지 않아 나도 웃지 못했다. 

 

엘사 외모의 변화. 인간일 때 모습. 
홀로 엄청난 고난의 여행을 떠난 엘사

미국 작가 M T 앤더슨의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돌베개)을 읽다. 흥미진진한 서술, 뚜렷한 관점, 이것들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자료의 측면에서 모범적인 논픽션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삶에 대한 책이자, 2차대전 전쟁사이며, 소비에트 정치 비판서다. 546쪽에 이르는데, 책을 무겁지 않게 만든데다가 번역이 매끄러워 수월하게 읽힌다.  

 

책 초반부는 간략하게 요약된 쇼스타코비치의 성장기, 1920~30년대 소비에트의 분위기와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다. 쇼스타코비치가 10살이던 1917년 러시아엔 레닌이 주도하는 혁명이 일어났고, 여느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쇼스타코비치 일가 역시 혁명의 흐름에 발을 담근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가 작곡가로서 입지를 넓혀가던 시절 등장한 지도자는 '강철 인간'이란 뜻의 스탈린이었다. 1920~30년대 프랑스가 그러했든, 소련으로 다시 태어난 러시아에서도 구습을 하루 아침에 벗어던진 새로운 예술이 일제히 나타났다. 지금 들어도 전위적인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비롯해, 마야코프스키의 미래파 시, 말레비치의 기하학적 회화가 등장했다. 불과 5년 전에 접했던 그 어떤 음악, 시, 회화와도 다른 작품들이 시민들의 감각을 폭격했다. 하지만 레닌은 혁명에는 능숙하지만, 경제계획에는 서툰 사람이었다. 이전의 모든 예술과 전혀 다른 예술을 받아들일만큼 열려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마야코프스키는 권총을 들고 자신의 심장을 쐈다. 그는 "제 손으로 건설은 거든 세상에서 더는 참고 살 수 없었다." 소비에트의 전위적인 예술가들은 "자신이 세운 미래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레닌의 뒤를 이은 스탈린은 한층 강력한 독재자였다. 이미 소비에트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고, 서방 세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러시아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여겨진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성공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미래는 창창해 보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 작품을 관람하다가 중간에 나가면서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긴다. "음악이 아니라 혼란이다." 어제까지 쇼스타코비치를 칭송하던 비평가와 언론과 친구들은 하루 아침에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불협화음'이고 '노래 대신 비명'이며, 인민이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라고 비판했다. 전위적인 곡은 어렵다고, 달콤한 곡은 얄팍하다고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친구, 지인들이 하나 둘씩 알 수 없는 이유로 비밀경찰에게 끌려갔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언제 끌려갈지 몰라 매일 밤 여행용 가방을 챙겨두고 잠이 들었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비밀경찰에게 소환돼 혹독한 심문을 받을 위기에 놓였으나, 자신을 조사하기로 한 조사관 역시 체포되는 '행운' 덕에 살아남았다. 

 

책의 중후반부는 나치 독일의 소비에트 침공과 그에 이은 레닌그라드 포위를 그린다.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살았고 언제나 이 도시를 사랑했던 쇼스타코비치는 피난갈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도시를 지킨다.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 의해 완전히 둘러 쌓여 872일동안 봉쇄된다. 포위 초기에 식량 창고가 불타고, 도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근에 빠졌다. 책에는 식량을 구하기 위한 별 이상한 방법이 다 나오는데, 짐작할 수 있게도 최종적으로는 인육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시신을 매장하지조차 않는 일이 벌어졌기에, 허벅지와 엉덩이살은 누군가 베어가곤 했다. 그나마 시신의 살이라면 다행이고, 적발돼도 가벼운 벌을 받았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런 고향의 처지를 위해 7번 교향곡을 만든다. 일부 테마가 전쟁 이전에 작곡됐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튼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은 고향의 수난과 곧 다가올 승리에 대한 염원으로 만들어졌다. 이 교향곡은 2차대전 당시 소비에트 인민의 사기를 높였고("보라, 이렇게 혹독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토록 복잡하고 위대한 교향곡을 만든다!"), 악보가 미국, 영국 등으로 수송돼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기도 한다(미국 초연은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NBC 오케스트라가 연주). 봉쇄된 레닌그라드에서도 결국 곡이 연주됐다. 하지만 레닌그라드에 남은 소수의 연주자는 이 길고 복잡한 곡을 소화할 상황이 아니었다. 연주하다가 쓰러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의지를 발휘해 연주했고, 소비에트 군은 불 켜진 콘서트홀이 독일군의 표적이 되는 걸 막기 위해 공연 시작전 독일군 쪽으로 집중 포격을 했다. 

 

7번 교향곡은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조국의 영웅이 됐지만, 국가는 그를 편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후에도 쇼스타코비치는 당국과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쇼스타코비치는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교향곡은 대부분이 묘비다." 

 

 

'모든 SF팬들의 필독서'라고 하면 출판사도 민망해서 사용하지 않을 책 띠지 문구 같지만, 셰릴 빈트의 '에스에프 에스프리'(아르테)엔 그런 수식을 붙이고 싶다. SF 비평서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통시적인 관점과 공시적인 관점에서 이 책은 모두 충실하다. Science Fiction의 측면과 Speculative Fiction의 측면을 두루 살피면서, 좋은 작품에 대한 가이드 역할도 한다. 'Science Fiction: A Guide for the Perplexed'라는 원제의 느낌보다는 조금 더 아카데믹한 서술이라 읽기가 마냥 수월하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다코 수빈의 '인지적 소외' 개념이 흥미롭다. 수빈은 "작가의 현실 속에서, 그리고/또는 그가 몸담은 문화의 과학적 패러다임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는 하나의 '실제 가능성'"을 강조하는 하드SF의 태도를 벗어나, "전제 그리고/또는 결과가 내부적으로 모순되지 않는, 개념적이거나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강조한다. "인지와 소외는 우리가 작품 속 이야기의 세계를 인식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이상하게 바라보게 하고, 텍스트의 세계와 우리 자신의 세계 사이의 차이에 대해 창의적으로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촉구하면서 SF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마치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처럼, SF를 통해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수빈의 이러한 태도는 과학적 실현 가능성을 강조하는 하드SF보다는 지금, 여기가 아닌 대안적인 사회, 역사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사변 소설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빈트는 '아바타'보다는 '디스트릭트9'을 호평한다. 전자가 "단순히 이쪽 세상 또는 저쪽 세상에 있거나, 꿈을 꾸거나 깨어 있을 뿐"이라면, 후자는 "영화 속 허구의 세계와 관객의 세계 사이의 변증법"을 노린다. '아바타'의 관객은 판도라와 연결되지 않은 현실로 돌아가지만, '디스트릭트9'의 관객은 일상에서도 '인지적 치환'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아울리 빈트는 SF, 판타지 등이 공유하는 허구의 배경, 비유, 이미지, 관습 등을 받아들이는 메가텍스트성, 팬덤의 적극적인 참여가 강조되는 실천공동체로서의 특징, 페미니즘, 퀴어 등 신념을 강조하는 SF들에 대해 논한다. 아지모프, 클라크, 하인라인의 SF 팬들에게는 생경한 책이겠지만, 그 이후의 뉴웨이브와 페미니스트와 21세기의 SF를 이해하는데는 훌륭한 책이다. 

 

**'에스에프 에스프리'란 번역 제목을 어떻게 붙였는지 궁금하다. 왠지 책 출간을 앞두고 연 브레인스토밍 회의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생각해둔 '에스에프 에스프리'란 제목을 언제 써먹을까 하고 간직해두었다가 이번에 붙인 것이 아닌가 한다. 

 

1년 전쯤 넷플릭스 '더 크라운'을 몇 편 보다가 접어두었다. 공들인 '웰메이드' 시리즈인줄은 알겠으나, 전개가 지지부진한데다 캐릭터들의 고뇌에 온전히 빠져들기 어려웠다. 예기치 않게 일찍 왕위에 오른 20세기 중반의 영국 여왕 이야기는 나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배우를 교체해 시즌 3이 방영될 예정이라는 소식에 보다 만 지점에서 다시 관람을 시작했다. 이번엔 좋았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시리즈의 분위기에 좀 싫증이 나기도 한 터였다.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세 줄짜리 시놉시스와 예고편을 보면 대단히 독창적이지만 막상 본편은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은 작품들이 많았다('하이 컨셉'이라 해야 할까). 그러다보니 넷플릭스를 뒤지며 뭘 볼까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관람패턴을 보이는 것이다. 1. 예고편에 이끌려 두어 편을 봤지만 더 볼 동력이 생기지 않아 나머지는 남겨둔다(데이브레이크, 리빙 위드 유어셀프 등). 2. 예고편을 보고 내용에 궁금증이 생기지만 봐도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영화는 아예 인터넷을 뒤져 결말을 읽고 넘어간다(일라이, 상처의 해석 등). 수많은 컨텐츠가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넷플릭스에서 유저의 시선을 끌기 위해 간략하지만 자극적인 예고편과 시놉시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위와 같은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더 크라운'은 다르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했기에 별다르게 내세울 컨셉이 없다. 드라마가 다루는 에피소드는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도 전말을 상세히 알 수 있다. 게다가 드라마 속 인물들이 대부분 살아있기에 명예훼손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심지어 주인공은 강대국의 여왕이다. 

 

그러므로 '더 크라운'은 배우들의 연극적이면서도 능숙한 연기, 우아한 촬영과 편집, 많은 돈을 쓴 흔적이 역력한 미술 등 고전적 요소들로 승부한다. 시즌 1 후반부에 들면서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대본의 질이다. 왕위에 익숙하지 않던 엘리자베스는 점차 자리에 대한 자신감을 찾는다. 그러면서 왕으로서의 의무가 남편, 여동생 등 가족과의 사적 인연과 갈등한다. 에피소드 8에서 여왕과 동생 마거릿이 군주의 역할을 두고 나누는 설전, 에피소드 9에서 처칠과 그의 초상화가가 노화와 은퇴 시기를 두고 나누는 설전, 에피소드 10에서 여왕이 대중으로부터 환영받지만 정부와 교회가 반대하는 마거릿의 결혼을 두고 고민하는 대목은 교과서적으로 잘 쓰여진 대사들로 구성됐다. 아무리 영국의 여왕과 총리라 해도 현실에서 그렇게 문어적이고 철학적이며 함축적인 대사를 틱탁틱탁 팽팽하게 연극적인 어조로 내뱉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즐기는 것이 드라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엘리자베스는 '노잼'이다. 사적 인연보다는 공적 의무에 충실하다. 드라마의 주인공으로는 당연히 재미없다. 그래서 제작진은 그의 빛나는 여동생 마거릿을 부각한다. 재치있고 활기넘치며 왕가의 규율을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마거릿과 근엄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언니 엘리자베스가 대비돼, 극적 재미를 준다. 제작진이 이 구도를 성격 다른 두 자매의 다툼 정도로 축소시키지도 않는다. 자매의 캐릭터가 공적인 의무, 규율, 전통에 스며들고 충돌하는 광경을 적절하게 묘사한다.

 

비록 영화에서는 그리 빛나지 못한 듯하지만, '더 크라운'의 클레어 포이는 훌륭하다. 여기 나오는 모든 배우가 훌륭하다. 시즌 3에서는 중년의 배우로 교체된다고 한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올리비아 콜먼이 여왕, 헬레나 본햄 카터가 마거릿이다. 기대된다. 

 

 

 

 

 

필립 로스(1933~2018)가 1991년 펴낸 '사실들: 한 소설가의 자서전'은 작가의 분신 주커먼이 표현하는 대로 "내 전처는 쌍년이었다"라고 말하는 글이다. 그리 길지 않은 글의 초반 3분의 1은 유대계 미국인으로서 작가의 성장기를 다룬다. 아버지는 유대계에 대한 은근한 멸시와 차별을 굳건한 의지로 이겨낸 남자였다. 로스는 그런 가정에서 모나지 않은 삶을 살다가 대학에 진학한다. 여기까진 부드럽게, 애상 어리면서도 적당히 진지한 분위기의 글이다.

 

그러다가 로스가 조시라는 여성을 만나는 대목부터 글의 분위기가 급변한다. 연상의 조시는 유대계가 아니었고, 다소 난폭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며, 이혼한 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웨이트리스였다. 단편 작가로 데뷔했고, 이제 남은 삶을 문학에 바치겠다고 다짐하는 즈음의 로스는 "평생 노골적으로 여자를 유혹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왜 그런지 그날따라 조시에게 다가가는 모험을 한다. 그건 로스에게 '심리적 결단'이었다. 그 결단이 이후 로스의 삶에 미칠 영향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이 책의 나머지 3분의 2는 조시와 사귀고, 가짜 임신 소식에 속아 결혼하고, 조시의 과대망상을 가까스로 견디고, 천박하고 몰상식한 조시와 헤어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가까스로 별거했지만 이혼에 성공하지는 못하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조시의 협박과 모욕에 시달리는 과정을 그린다. 조시가 1968년 5월, 마틴 루터 킹과 바비 케네디의 죽음 사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조시의 부음을 듣고도 로스는 무슨 사악한 장난처럼 여긴다. 로스는 조시가 타다가 죽은 자동차를 몬 사람을 자신의 '해방자'로 여기고, 조시의 죽음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자동차 사고로 갑자기 제거되는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급기야 이렇게까지 말한다. "내가 죽이지 않았는데 그녀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로스는 이제 조시와 수입을 나눌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조시의 장례식장으로 가면서 택시를 탄다. 로스가 조시의 죽음에서 느끼는 건 '무한한 안도감'으로 요약된다.

 

여러 장편들에서 접한 로스의 문체는 현란했다. 길고 긴 한 문장에도 여러 가지 생각과 의미를 담는다. '자서전'에서 로스는 서른 아홉의 나이로 죽은 전처를 현란한 표현으로 욕한다. 느낀 점은 이렇다. 작가는 전처 욕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작가는 아무리 나쁜 인연이었다 하더라도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간 전처를 공개적으로 비방할 정도로 대담해야 하는구나. 그 정도로 자신의 캐릭터와 인격을 세상에 까발려야 하는구나. 물론 조시가 정말 나쁜 아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튼 조시에겐 입이 없다. 그녀는 작가가 아니었고, 세상에서 책을 낼만큼 유명하지 않았고, 게다가 죽었으니까. 스스로 변호하지 못하는 상대를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로스는 옳고 그름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든 하고 싶은 말은 하는 것이 작가니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면 된다. 로스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픽션에도 작가의 삶이 녹아있을 것이다. 픽션의 형식으로 전처 욕을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전처 욕에 따른 윤리적 비방을 하고 변명할 구석은 없다. 로스는 그걸 다 감당한다. 

 

작가의 분신이자 몇 편의 소설 주인공이었던 주커먼이 로스에게 보내는 편지로 글이 마무리된다. 주커먼은 책을 출간하지 말라고 권한다. 죽은 전처를 비방하는 문제의 윤리적 복잡함 외에도, 소설가가 '사실'을 전한다고 선언했을 때의 난점까지 언급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소설에 대해 말할 때보다 사실들에 대해 말할 때 자신들이 더 확고한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느낄까? 사실들이 훨씬 더 다루기 힘들고 결론도 잘 나지 않으며, 상상력이 일깨우는 탐구심을 죽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지금까지 자네의 일은 사실들에 상상력을 엮어 꼬는 것이었는데, 이 책에서 자넨 그것들을 풀어서 뜯어내고 있군. 
자네는 근본적으로 허구적인 인물들에 광적인 모습을 투사해 세상에 내보냄으로써 공공연히 자신에 대한 오해를 초래했네. 하지만 일부 독자들이 그걸 곡해하고 자네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고 해서 굳이 자네가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아줄 필요는 없다고 보네. 그와는 반대로 -그들에게 그런 믿음을 갖게 한 것을 성공이라고 여기게. 그게 이른바 소설이 하는 일이니까. 현상태에서 자네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거나 나의 커다란 가치를 알지 못해-진짜 내면의 내가 어떤지 아무도 몰라!"라고 소리 내어 웅얼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못할 게 없네. 소설가에게 그런 고충은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이니까. 

아무튼 로스는 책을 냈고, 그 책은 타언어권의 독자가 읽기 좋게 번역까지 됐다. 이 책은 내가 읽은 가장 이상한 자서전이다. 

영국 시인 테드 휴즈(1930~1998)의 '오늘부터, 시작'(비아북)을 읽다. 휴즈가 BBC 프로그램 '듣기와 쓰기'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은 시작법에 대한 책으로 현지에선 1967년 출간됐다. 한국에 1990년 해적판으로 출판됐는데 이후 절판돼 중고서점에선 고가에 거래됐다고 한다. 이번에 매끈한 번역과 깔끔한 편집으로 단장돼 출간됐다. 

 

52년 전 출간된 책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휴즈는 사냥에 대한 어린 시절의 열정을 돌이키고, 오소리, 파리, 달팽이, 여우, 안개, 바람을 관찰하고 시 쓰는 방법을 소개한다. 인용하는 시인도 D H 로렌스, 실비아 플라스, T S 엘리엇 같은 옛 시인들이다. 휴즈가 살아서 올해 책을 냈다면 전혀 다른 소재의 시와 최근의 시인들을 소개할 수 있었겠지. 솔직히 여우를 생각하며 시를 쓸 수 있는 요즘 사람은 매우 드물겠다. 

 

그래도 휴즈의 글에는 시대를 넘는 보편성이 있다. 자연 현상을 관찰하는 방법, 사람들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이유, 자기 가족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기를 그칠 수 없는 이유, 독자의 시선을 끄는 소설 서두 등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작가가 가족사에 대해 쓰면 '사연팔이 아닌가' 하고 탐탁지 않게 생각할 때가 있지만, 휴즈는 이렇게 얘기한다. 

 

감정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쓸 수 없어요. 흥미롭거나 가슴을 뛰게 하는 것, 혹은 삶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별로 할 말이 없거든요....여러분도 특이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세상에서 가족만큼 잘 알게 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어떤 누구나 어떤 것보다도 감정적으로 깊이 묶여 있죠. 따라서 작가 대부분이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차고 넘친답니다. 

물론 가족 이야기를 그대로 쓰란건 아니다. 단지 가족으로부터 파생된 감정과 아이디어를 활용해 쓸 수 있다는 제안에 가깝다. 그러므로 작가가 '아버지'를 묘사할 때, 그 아버지는 실제 작가 부친, 친구의 부친, 어디선가 들은 부친의 특징을 골고루 갖출 수 있다. 

 

소설을 쓰는 방법에 대한 조언도 흥미롭다. 소설은 재미있게 써야 한다. 어떻게? 휴즈는 "정답은 자신이 진심으로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만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다"고 답한다. 

 

글을 쓰면서 작가가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쓰려고 하면 글쓰기도 재미없고 지루해집니다. 예를 들어, 거대한 쥐의 습격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재미있게 쓰려면 거대한 쥐의 등장에 흥분하는 작가가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찾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묘사하는데 온몸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발자크는 등장인물의 고뇌를 상상하면서 침대보를 조각조각 물어뜯어 놨다고 한다. 연기에 비유하면, 글쓰기에도 메서드 액팅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이 쓰는 글과 멀찌감치 떨어져 편하게 팔짱 낀 채 관망할 수는 없다는 것. 내겐 동물이나 식물, 자연현상을 묘사하는 구체적인 테크닉보다는, 이러한 휴즈의 창작 태도가 더욱 흥미롭게 읽혔다. 

 

 

 

이상한 춤을 추는 조커

 

*스포일러 있음. 

 

불만과 혼란의 영화. '조커'는 그런 영화다. 조커는 DC코믹스에서 배트맨의 숙적이다. 잭 니컬슨, 히스 레저 등이 조커를 연기해왔다. 조커는 돈도 없고, 가문도 없고, 초능력도 없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면서도 질서를 추구하는 배트맨을 괴롭히지만, 왜 괴롭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돈 때문도 아니고 세계 정복을 위해서도 아니고, 복수 때문도 아니다. 왜 나쁜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커는 무섭다. 우스꽝스러운 광대 놀음을 하는 것 같지만, 우스꽝스러운 일이 허용되지 않을 법한 순간에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이기 떄문에 무섭다. 조커는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려 한다. 하지만 혼란 이후의 헤게모니 같은 것을 노리지도 않는 것 같다. 그저 세계가 혼란에 빠지는 걸 즐길 뿐인듯하다. 그래서 조커는 무섭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에서도 조커는 언제나처럼 고담시에 산다. 고담시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가 그러했든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됐다. 고담이란 이름을 지우고 '80년대 뉴욕'이라 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지만, 부유한 엘리트 정치인들은 그 불만을 감지하지 못한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은 고담시 시장 출마를 준비한다. 토마스 웨인은 공감 능력 부족한 엘리트의 전형이다. 소외계층의 불만을 '루저들의 불평' 정도로 해석한다. 도시의 질서를 회복하고 경제를 일으키면 자연스럽게 상황이 좋아지고 불만도 사라지리라 생각하는, 낙수효과의 신봉자다.

 

훗날 조커가 되는 아서 플렉은 파티 광대다. 광대 옷을 입고 상점을 홍보해주거나, 아동 병동에 가서 춤을 춘다. 아서는 그 일을 즐기지만,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서의 유머 감각은 기괴해서, 웃음보다는 불편을 준다. 게다가 상황에 상관 없이 웃음이 터지는 신경질환을 앓고 있다. 웃지 않아야 될 순간에 웃는 아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아서는 언젠가는 텔레비전 쇼를 진행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을 꾼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란 것은 관객 모두가 안다. 

 

아서는 꿈에 근접하기는커녕 조금씩 나쁜 상황으로 빠져든다. 알고 싶지 않았던 가족사에 얽힌 불편한 진실도 알게 된다. 그의 불행은 사소한 실수, 성격적이며 신체적인 결함, 주변 사람의 악의, 사회의 모순이 결합된 결과다. 어느 부분 하나에서도 난국을 돌파할 기색이 안보인다. 아주 예전에 보았던 만화 '이나중 탁구부'엔 그런 대사가 나온다. "아무렇게나 돼버려." 아서도 점점 그런 생각으로 빠지는 것 같다. 

 

아서는 우연히 사람을 죽인다. 지하철에서 만난 월스트리트 양복쟁이들이 아서를 집단 폭행하자, 우발적으로 총을 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아서는 고담시의 혼란을 증폭시킨다. 빈자들 사이에서 아서는 재수없는 양복쟁이들을 죽인 영웅이 된다. 본인은 의도치 않았지만, 아서는 카오스의 중심이 된다. 한국의 시위대는 이념이 어찌됐든 명목상으로는 '새로운 나라'를 꿈꾼다. 시위를 통해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지리라 믿는다. 하지만 고담시의 시위대는 그렇게 믿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오늘의 질서를 파괴하고 싶을 뿐이다. 내일 고담시가 멸망한다 해도 상관 없다. 고담시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조커와 그를 추앙하는 시위대가 벌이는 행동은 혁명이라기보단 폭동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그린 테러보다도 훨씬 무질서하다. 미국에선 '조커'가 총기 난사 같은 문제를 촉발할까봐 노심초사한다고 한다. '조커'가 하층민의 분노와 그로 인한 질서의 파괴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영화긴 하지만, 이런 영화 때문에 실제 혼란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사회는 얼마나 취약한가. 물론 담배 꽁초 하나도 거대한 산불을 일으킬 수 있다. 건기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됐다면. 

 

아이슬란드 첼리스트 힐두르 구드나도티르의 음악이 '조커'의 지분 4분의 1은 차지한다.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에서 이미 실력을 입증했다. 앞으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창작자는 일단 구드나도티르를 떠올릴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도 꽤 큰 몫을 차지한다. 난 메소드 액터를 좋아하지 않지만, 피닉스의 연기를 보는 것이 흥미진진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저렇게 연기하는 배우의 몸과 마음이 온전할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들기도 한다. 

 

웃어서 불편하게 하는 조커

 

카스 무데,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포퓰리즘'(교유서가)을 읽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왔다. 200쪽 정도의 길지 않은 책이지만, 포퓰리즘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사례를 적재적소에 제시했다. 교과서적으로 명료하다. 역자는 친절하게도 라클라우와 무페, 슈미트, 베버 등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참고할만한 책도 제시해주었다. 편집의 센스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다.
그들(포퓰리스트) 주장의 핵심은 실제 권력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즉 포퓰리스트에게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림자 같은 모종의 세력이 불법적 권력을 보유한 채 민중의 목소리를 억누른다는 것이다....포퓰리즘의 '피해망상적 정치 스타일'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실례다. 
포퓰리즘에서 말하는 일반의지 개념은 공공 영역에서 합리적 과정을 거쳐 구성되기보다는 '상식'에 기반한다....'일반의지' 개념은 권위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포퓰리즘은 우세한 정치 세력이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충분히 제기하지 않고 있는 사회적 불만을 감지하고 정치 쟁점화하는 데 능하다. 
포퓰리즘은 국민주권과 다수결은 단호히 옹호하지만, 소수자 권리와 다원주의에는 반대한다....포퓰리즘은 국민주권을 지지하되 사법 독립이나 소수자 권리처럼 다수결을 제약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에든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일부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의 거울상보다는 민주주의의 (께름칙한) 양심에 더 가깝다. 
포퓰리즘이 대개 옳은 질문을 하고 틀린 답을 내놓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저자들은 포퓰리즘은 '얇은' 이데올로기라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한다고도 지적한다. 남미에선 사회주의(차베스)와, 유럽에선 인종주의(르펜)와 결합하는 식이다. 포퓰리즘은 좌파 ,우파로 가를만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중의 의지'를 강조하는 포퓰리즘이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국가 장치들을 무시하고 파괴하려한다는 지적은 중대한 교훈이다. 세계의 수많은 포퓰리스트들이 언급되는데, 한국에선 노무현을 사례로 들었다.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포퓰리즘에 비판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포퓰리즘에 단호히 적대하기보다는 포퓰리즘이 배양된 환경을 살피고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관리의 방법이란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베일에 쌓인 엘리트 기구의 결정 과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스포일러 있음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영화관에 들어갔지만, 기대치 이상의 감정으로 나왔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매우 이모셔널한(감상적, 감정적이라는 표현보다 왠지 '이모셔널'이 적절하다고 느낀다) 영화고, 그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이 들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어쩌면 이 두 가지 관점은 결국 연결된다. '할리우드'는 60을 바라보는 타란티노가 이모셔널하게 돌아보는 추억, 역사, 소망, 꿈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할리우드'는 미국 문화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라 할만한 '찰스 맨슨 패밀리'의 샤론 테이트 살해 사건을 다룬다. 찰스 맨슨의 사주를 받은 3명의 불한당이 1969년 8월 8일 배우 샤론 테이트-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집에 침입해 임신 8개월의 테이트와 그 친구들 등 5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폴란스키는 영화 촬영을 위해 해외에 있었다) 살인자와 테이트 일행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맨슨은 테이트 집의 이전 거주자와 인연이 있었고, 왜 그런지 지금 거기 사는 사람들을 잔혹한 방법으로 죽이라고 지시했다. 촉망받는 여배우가 끔찍하게 살해됐고, 살인자들이 '악마'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시대의 상징이자 트라우마였다. 타란티노는 영화에서 이 살인자들을 당시 끝물이었던 히피즘의 추종자들로 묘사한다. 

 

'할리우드'의 주인공은 한물간 액션 스타 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스턴트 대역 겸 매니저 클리프(브래드 피트)다. 릭은 50년대 텔레비전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이제 전쟁영화, 서부영화의 악역으로 배우 경력을 간신히 이어간다. 릭의 일이 줄어드니 클리프의 일도 줄어든다. 클리프는 주로 릭을 촬영장으로 데려다주거나 그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정도의 일만 한다. 날이면 날마다 근사한 신인 배우들이 등장하므로, 릭에겐 산업과 대중의 시선 뒤편으로 조금씩 사라져 가는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할리우드'의 초중반부는 느리다. '느리다'기보단 사건이 거의 전개되지 않는다. 릭을 중심으로 1969년 할리우드 풍경을 인류학적으로 재현하려는 목적으로 찍은 것 같다. 세트장과 촬영 장면이 재현되고, 감독, 배우, 스태프들의 관계가 묘사되며, 영화 사조의 흐름을 알려준다. 미국 서부극의 흐름이 쇠퇴하자, 이탈리아에서 수정주의 서부극,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이 나온다. 한 제작자(알 파치노)는 릭에게 수차례 이탈리아 영화에 출연할 것을 제안한다. 릭은 자기 삶의 중심이었던 할리우드에서 밀려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아 하지만,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오르기도 한다. 릭은 간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가 다음날 대사를 완벽히 외우지 못해 스스로 자책하고, 그러다가 다시 배우로서의 소명을 깨달아 일생일대의 연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릭은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것 같지만, 인간적으로 나쁘다기보단 스타로서의 적당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스타로서의 위치가 위협받고 더 이상 세상이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때, 릭은 좌절하고 다시 노력하고 결국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릭을 옆에서 지켜보는 클리프는 트레일러에서 애견과 단둘이 산다. 있을 건 있는, 하지만 세련되진 않은 삶이다. 클리프는 릭의 관찰자로서, 한 스타의 전성기와 몰락을 함께 느낀다. 타란티노는 황혼기에 접어든 할리우드 사람들을 풍자하거나 비틀지 않고, 애상을 담아 그려낸다. 

 

끝물 히피 혹은 가장 끔찍하게 왜곡된 히피라 할 수 있는 맨슨 패밀리는 조롱하고 뒤튼다. 이들은 처음에는 캘리포니아 이곳저곳을 히치하이킹하며 다니는 천진난만한 젊은이처럼 보이지만, 기념비적인 악역을 만드는데 일가견 있는 타란티노 영화답게 곧 마각을 드러낸다. 한 농장주를 구워삶아 농장을 사실상 점거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죽어가는 쥐가 그대로 남아있을만큼 더럽게 산다. 무엇보다 참전용사이자 구시대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 클리프에게 비겁하게 굴다가 얻어맞는다. (여기서 피트는 멋있는 '옛날 남자'를 잘 연기한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안테나 고치다가 뜬금없이 상의 탈의하는 모습도 선보인다.) 영화 하이라이트인 테이트 집 습격 사건에서도 자기들끼리 우왕좌왕하고, 왜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멍청한 인간들로 묘사된다. 그럼 점에서 '할리우드'의 악역은 인상적이지만, 다른 타란티노 영화의 악역만큼 매력적이진 않다. 

 

무엇보다 타란티노의 트위스트는 맨슨 패밀리가 습격하는 곳이 테이트 집이 아니라 릭의 집으로 변경되는 대목이다. 무고하고 천진난만하며 자신이 나온 영화를 기쁨에 차서 관람하고 신나 하는 임신 8개월의 배우 테이트는 적어도 이 영화에선 안전하다. 대신 맨슨 패밀리는 클리프와 그의 잘 훈련된 개에게 끔찍하게 척살된다. 어쩌다 릭의 집 수영장으로 떨어진 용의자 중 한 명은 릭의 화염방사기를 맞고 새카맣게 구워진다. 이 대목은 타란티노의 전매특허와 같은 B급 영화 감성이다. 아무리 화염방사기를 사용한 영화에 출연했다 하더라도, 배우가 그걸 집에 뒀을 리는 없지 않은가. 죽음 묘사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산탄총을 맞고 죽은 악당같고, 영화에서만 가능한 대안 역사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히틀러 암살 성공 묘사 같다.

 

그렇게 영화에서만 가능만 상상과 무리를 해서라도 타란티노는 테이트와 친구들을 구해내고 추모한다. 아내가 개와 함께 잠들고, 부상을 입은 클리프는 병원으로 실려간 뒤 릭은 홀로 남는다. 그때 현실에서는 죽었지만 영화에서는 살아남은 옆집의 테이트 친구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릭이 상황을 설명하자, 인터폰으로 테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릭은 평소 테이트, 폴란스키와 친해보려 했으나 인사조차 나누지 못해 아쉬워하던 참이다. 놀랍게도 테이트는 릭이 옆집에 산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릭이 테이트의 초대를 받아 그 집으로 올라가 이웃과 인사를 나누면서 영화는 끝난다. 타란티노 영화 중 가장 따뜻한 결말이다. 

기쁨에 찬 배우 샤론 테이트는 현실에서 죽었지만 영화에서는 산다. 

지난해 김민정 시인은 인터뷰하는 자리에 넓직한 교정지를 들고 왔다. 무슨 책이냐 물어보니 곧 나올 막상스 페르민의 '눈'(난다)이라고 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인 책이라고 자랑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작가 한강에게 이 책을 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페르민은 처음 듣는 작가라 이름만 기억했다. 인터뷰 다음 달 '눈'이 출간됐으나, 곧바로 집어들만큼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여름 막바지가 돼서야 챙겨두었던 '눈'을 펼쳤다. 

 

1999년 출간된 책이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124쪽에 불과하고, 게다가 행간이나 여백이 넓어 텍스트는 더욱 적다. 마음 먹으면 1시간 이내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책을 '마음 먹고' 읽을 이유는 없다. 책에 여백이 많다는 건 그만큼 독서에도 여백을 주라는 지침일 것이다. 

 

프랑스 작가의 소설이지만 19세기 후반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하이쿠와 눈을 사랑하는 청년 유코 아키타가 주인공이다. 유코가 승려나 군인이 되길 원하는 아버지는 시인이 되겠다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아버지가 말하자 아들이 답한다.

"시인은 직업이 아니야. 시간을 흘려보내는 거지.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흘러가는 물이다. 이 강물처럼 말이야."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눈을 좋아하는 유코는 눈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서만 시를 쓰겠다고 결심한다. 봄이 오면 벚꽃 잎의 향을 맡고 ,여름이 되면 숲에서 꿀 향기를 맡고, 우기에는 버섯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겨울이 되면 눈에 관한 하이쿠를 썼다. 그러던 중 유코의 집에 궁정 시인이 찾아온다. 궁정 시인은 유코가 서예, 회화, 춤에 대해 무지하고, 유코의 시에 색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더욱 수련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유코는 내키지 않았지만 궁정 시인의 권유에 따라 남쪽의 소세키 선생을 찾아나선다. 

 

여기까지가 도입부고, 이후엔 유코와 전직 무인이자 현직 예술가인 소세키, 소세키와 프랑스 출신 곡예사 여성의 사랑, 유코가 예기치 않게 둘의 운명에 개입하는 과정, 유코가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솔직히 도입부 이후는 도입부만큼 인상적이지 않았다. 책의 이미지나 부피에서 조금 더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이야기를 기대한 것 같다. 소세키와 곡예사의 사랑은 동화적으로 그려지는데, 시의 본질이나 눈에 대한 탐구를 그린 도입부와 잘 접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친 김에 한강의 '흰'(문학동네)도 사서 읽었다. 이 책의 편집자 역시 김민정이다. 내가 구입한 건 지난달 나온 2판 6쇄다. 2판엔초판에 없던 '작가의 말'이 실려 있다. 그리고 '작가의 말'은 책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흰' 역시 '눈'처럼 시적이고 짤막한 소설이다. ('흰'은 196쪽이다.) 물론 흰 색을 소재로 한다는 점을 빼고 둘은 크게 다른 소설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하얀'과 '흰'을 구분한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작가는 '흰' 책을 쓰기로 하고 소재의 목록을 만들어간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수의...

 

픽션에서 작가의 자전적 삶을 읽어내는 건 부질없고 무용하겠지만, '흰'에는 작가의 경험담이 크게 들어있는 것 같다. 추정컨대 작가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한동안 머물며 이 책을 썼다. 그곳은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본보기 절멸 도시로 지적돼 95%가 파괴됐다. 조금 스산하고 한적한 도시에서 작가는 두통에 시달리며 글을 쓴다. 무엇보다 그 글은 작가의 어머니가 스물 네살 때 혼자 있다가 조산한 큰 딸, 두 시간 동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속삭였지만 끝내 떠난 아기에 관한 것이다. 어머니는 이듬해 두번째로 낳은 사내 아기를 또다시 잃었고, 그로부터 3년이 흘러 '나'를, 또 4년이 흘러 남동생을 낳았다. 앞선 두 생명이 살았다면, 화자와 그의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어머니도 임종 직전까지 "그 부스러진 기억들을 꺼내 어루만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에게 죽은 언니는 일종의 빚이고, 화자는 죽은 언니 대신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작가의 말'에서 전한 것처럼, '흰'은 죽음과 애도에 대한 글이다. 하지만 꺼이꺼이 통곡하지는 않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상을 살면서 문득 생각하고 애도한다. 낯선 동유럽의 도시를 산책하면서, 조금씩 춥고 어두워지는 도시의 분위기에 침잠하면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두통을 견뎌내면서 애도한다. 순진하게 예쁜 '하얀'이 아니라, 먹먹한 '흰' 글을 쓴다. '흰'은 한강의 전작보다 조금 더 개인적인 글이겠지만, 거창하게 말하면 존재의 부채의식을 드러낸다. 우리의 삶이 거저 주어진 것,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누군가의 희생이나 죽음에 기반한다는 인식, 개인적이라고 사소하진 않다. 

 

마이클 스티븐슨의 '전쟁의 재발견'(교양인)을 읽다. 오랜만에 읽은 흥미진진한 논픽션. 원제는 'The Last Full Measure: How Soldiers Die in Battle'이다. 말 그대로 고대 전투 서사시 '일리아스'부터 현대 베트남전, 이라크전까지 전쟁에서 군인들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 그린다. (번역제목을 좀 점잖고 심심하게 달았다.) 이런 설명만 들으면 흔하고 말초적인 미시사 서술 같은데, 막상 읽으면 방대하게 수집돼 적절하게 배치된 자료에 감탄하고, 자료를 관통하는 저자의 안목에 또 감탄한다. 분량이 648쪽이라 들고 다니며 읽기는 좀 버거운데, 그래도 오래 걸리지 않아 완독했다. 

 

청동기부터 무기가 조금씩 발달하면서 죽음의 방식도 달라지는 양상을 서술한다. 1대1의 전투를 선호하던 중세 기사들은 멀리서 쏘아 죽일 수 있는 화살이나 머스킷총을 비겁하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윤리의 기준을 뒤바꾸기에, 기사들의 불평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면 돌격'의 이상 역시 조금씩 쇠퇴한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적과 아군, 군과 민간의 구분이 뚜렷했으나,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에 이르러 민간인 소년이 갑자기 전투원으로 돌변하는 등의 일이 벌어진다. 미군은 군인과 구분되지 않는 민간인 여성, 미성년을 전투원처럼 대한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의 원인을 베트남, 이라크 등 피침략 국가의 게릴라전술 때문으로 돌리는 서술은 조금 거북하지만, 이 책이 정치서가 아니라 전쟁사라는 점은 감안해야 하겠다. 

 

산업화, 대량생산의 시기로 접어든 20세기 전투의 양상이 고전적일리는 없다. 19세기까지 전쟁의 양상이 점진적으로 변화했다면, 20세기는 급진적으로 달라졌다. 무기의 성능이 갑작스럽게 발달하면서, 많은 전투인력이 짧은 기간에 '소모'되는 전면전이 전개된다. 패전하면 말할 것도 없고, 승전해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피할 수 없다. 2차 대전 때는 1600만명이 죽었다. 소련은 승전국이 됐지만, 그건 다른 연합국의 사망자를 합친 것보다 10배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 '총 든 고깃덩어리'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 어떤 영광과 명예의 수식을 붙여도 달라지지 않는 진실이다. 

 

 

 

스티븐 킹의 신작 '아웃사이더'(황금가지)를 읽다. 72세의 킹은 여전히 다산이다. 꽤 두꺼운 장편을 별다른 공백기 없이 매년 펴낸다. '아웃사이더'는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됐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올해도 또다른 장편이 예정된 모양이다. 내년엔 '아웃사이더' 중반부에 등장하는 홀리 기브니를 내세운 또다른 소설이 나온다. 예전에 미국의 장르 소설 작가는 이름을 내세운 기업처럼 작동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혹시 스티븐 킹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자료를 조사해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소도시의 리틀 야구단 코치이자 교사가 끔찍한 소년 성폭행 살해범으로 백주에 체포된다. 경찰들은 그를 범인으로 확신해 야구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는 구장에서 눈에 띄게 망신을 주며 체포한다. 코치가 당일 살해된 소년과 관련이 있음을 증언하는 수많은 목격자가 있다. 하지만 평범한 가정의 성실한 아버지인 코치는 이 모든 혐의를 부인한다. 소년이 살해되던 날 코치는 인근 소도시에서 다른 교사들과 함께 한 작가의 강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함께한 교사들과 지역 방송사 카메라에 잡힌 모습이 그의 알리바이를 증명한다. 용의자가 같은 시각 두 군데서 목격된 사건. 검찰과 경찰은 당황하면서도 형사 사법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려 한다. 하지만 검사가 의도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게 연출한 피의자 이송 과정에서, 피해자의 형이 코치를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은 애매하게 묻힐 뻔하지만, 킹은 소설 중간쯤 이야기의 급커브를 튼다. 

 

여느 추리 작가였다면 한 사람이 두 장소에 있는 트릭을 만들고 깨기 위해 온갖 언어적, 물리적 장치를 설치해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45년의 작가 경력 동안 독자를 소름끼치게 하는 이야기를 써나가며 즐거워했던 킹은 자신의 장기로 이 트릭을 훌쩍 뛰어넘는다. 자연적 이야기에 초자연적 설정을 도입하는 것이다. 아마 기존의 추리 작가였다면 '반칙'이라고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밀실 살인 사건을 그린 추리 소설에서 유령이 벽을 뚫고 들어와 살인을 저질렀다고 결말을 내버린다면, 그건 반칙 아닌가. 킹은 개의치 않는다. '스티븐 킹의 첫 탐정 추리소설'이라고 했던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도 은근 슬쩍 킹의 호러 장기가 드러난 적이 있지만, '아웃사이더'처럼 노골적으로 초자연적 존재를 도입한 적은 없다.

 

'아웃사이더' 중반부에 나타나는 홀리 기브니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 시작하는 빌 호지스 3부작의 조연 캐릭터였다. 호지스 3부작의 끝에 호지스가 죽었기에 기브니도 그대로 사라질 뻔 했지만, 킹은 신경 과민, 대인 기피 탐정이라 할 수 있는 기브니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번에 다시 기브니를 연결고리로 추리 소설을 썼다. 물론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추리 70에 호러 30이라면, '아웃사이더'는 그 반대 비율이다. 

 

 

 

 

 

 

 

두 권의 SF를 잇달아 읽다. 테드 창의 신작 '숨'(엘리)과 김초엽의 데뷔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딱히 비교해 읽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테드 창의 작품을 다 읽어가는 시점에 김초엽의 책이 손에 들어왔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세간의 평만큼 좋게 읽지는 않았다. 어떤 작품은 너무 길다고 느꼈다. '보르헤스가 5페이지에 쓸 이야기를 50페이지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영화 '컨택트' 덕분에 뒤늦게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주목받기도 했지만, 난 여전히 아서 클라크에 더 끌리는 사람이다. 

'숨'을 읽은 뒤에는 '보르헤스 비교'는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아지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의 훌륭한 업데이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센테니얼맨'이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이를 질문함으로써 결국 인간의 조건에 대해 탐색한다면, '소프트웨어 객체...'는 프로그래밍된 버츄얼한 존재와 인간의 차이를 묻는다. 피와 살이 없는 존재 인간의 감정이 투여된다면, 물리적 실체를 갖지 않더라도 자아가 있다면, 그것의 존재적 위상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탐구한다. 그 탐구가 앙상한 개념을 넘어 튼실한 내러티브로 지탱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언어, 사실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사회학, 인류학, 문학 수업 시간의 교재로 쓰일 법하다. '옴팔로스'는 유사 종교 소설이다. 과학적 사고를 한계 너머로 밀어가려는 SF가 어느 순간 종교 전통과 만나는 것은 낯선 시도가 아닌데, 테드 창은 이 쪽으로도 재능이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최상급의 SF작가인 테드 창과 이제 첫 소설집을 낸 김초엽을 비교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도 테드 창에 뒤이어 읽으니, 김초엽의 글에서 어디가 문제인지 조금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 소설집에 담긴 작품 중 어떤 것들은 부실한 설계도를 따른 건물, 취재가 덜된 기사 같았다. 작품의 과학적 배경이나 플롯의 논리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테크닉에 의지해 마무리지은 듯한 글들이 있다. (작가가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 혹은 작가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독자는 완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 보완을 요구하는 건 최초의 독자인 편집자 몫이 아닐까. 한국의 문학 편집자에게 어느 정도의 재량이 주어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는 빛나는 글들이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관내분실'.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존재인 여성, 특히 엄마의 처지를 거대한 도서관에서 색인이 삭제된 채 방치된 책에 비유했다(이 작품에선 책이 아니라 생전의 두뇌를 사후에 데이터화한 정보로 은유된다).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거리의 유한성과 우주 여행의 무한성을 대비해 감정을 고조시키는 작품이다(영화 '인터스텔라'도 이런 테크닉을 썼다). '공생가설'도 흥미롭다.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작가는 '가장 즐겁게 썼던 글'이라고 말하는데, 읽는데도 즐겁다. 

 

 

줌파 라히리의 책 두 권을 잇달아 읽다. 사실 다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라히리에 대해 몇 자라도 적어놓고 싶다. 먼저 읽은 책은 신간 '내가 있는 곳'(마음산책)이었다. 인도계 영국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라히리는 어느날 갑자기 이탈리아어를 배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곤 한다는데, '내가 있는 곳'이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장편소설이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했지만,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낯선 도시에 머물며 얻어낸 짤막한 이야기들이 '보도에서' '길에서' '사무실에서' '수영장에서'와 같은 제목을 단 채 이어진 연작 형태다. 감각적이고 투명하고 단순한 문체로 삶의 감각을 전한다. 작가가 모어보다 덜 익숙한 이탈리아어로 썼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스타일이 그러한지 알 수는 없었다. 어떤 부분에선 한때 내가 열심히 읽었던 뒤라스의 문체가 느껴지기도 했다. 좋았다는 얘기다. 

 

줌파 라히리(1967~)

내친김에 2013년 펴낸 두번째 장편 '저지대'(마음산책)를 구매했다. 그런데 두께부터가 당황스러웠다. '내가 있는 곳'은 200쪽이지만, '저지대'는 548쪽이다. '내가 있는 곳'이 현대의 작가(혹은 교수)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저지대'는 1960년대 인도 낙살라이트 운동의 전조를 다루면서 시작한다. 낙살라이트란 인도 낙살바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마오쩌둥주의 운동으로, 무장봉기와 반정부 테러를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초반 4분의 1까지는 낯설었다. (여기 낙살라이트에 관심 있었던 분?) 하지만 라히리는 낙살라이트 운동의 전개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다. 이야기는 수바시와 우다얀이라는 형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수바시는 내성적이고 차분하지만, 우다얀은 활달하고 적극적이다. 수바시가 학업에 열중해 미국으로 유학가 해양학 박사가 된 사이, 우다얀은 인도에 남아 낙살라이트 운동에 투신한다. 우다얀의 지난한 투쟁기가 펼쳐지려나보다 하는 순간, 우다얀은 정부군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아직 소설 초반이다. 이제 라히리는 이야기의 방향을 튼다. 수바시는 우다얀의 아이를 임신한 처제 가우리를 미국으로 데려간다. 명목상 결혼으로 동생의 아이와 아내를 책임지려 한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수바시, 가우리, 그리고 가우리의 친딸이자 수바시의 양딸인 벨라의 이야기가 이후에 펼쳐진다. 이제부터는 인도의 고된 현대사와 큰 관계가 없다. 

아니, 있다. 상처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으니까. 멀찌감치서 낙살라이트 운동을 지켜본 수바시에게도, 신혼에 남편을 잃은 가우리에게도, 낙살라이트가 무엇인지, 수바시가 양아버지인지 모르고 자란 벨라에게도, 역사와 사회가 할퀸 흔적은 남았다. 라히리는 개인에게 미친 역사의 궤적을 세 사람의 기묘한 관계와 요동치는 마음으로 그려보인다. 엄마 가우리가 갑자기 가출한 뒤, 청소년기 들어 마음의 혼돈을 겪는 벨라는 상담가 닥터 그랜트를 만난다. 그리고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랜트 선생님은 그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겠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벨라가 어디를 가든 그 감정은 풍경의 일부를 이룰 거라고 했다. 벨라의 생각 속에 엄마의 부재가 항상 존재할 거라고 그랜트 선생님은 말했다. 엄마가 왜 떠났는지에 대한 답은 결코 찾지 못할 거라고 벨라에게 말했다. 

수바시가 왜 동생의 아내 가우리를 미국으로 데려왔는지, 왜 가우리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아이를 남겨두고 가출한 뒤에도 별다른 원망을 하지 않는지, 독자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그 짐작이 이끄는 수바시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 뿐이다. 엄마가 떠난 뒤 청소년기의 고비를 넘긴 벨라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갖지 않고 미국을 떠돈다. 아니 직장을 갖지 않았다는 건 편견어린 말이다. 벨라는 농촌 운동, 환경 운동 비슷한 흐름에 몸을 얹었다. 벨라의 선택도 이해할 수 있다. 역시 가장 공감이 어려운 건 가우리다. 어찌 보면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수바시를, 그리고 친딸을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 철학을 공부하며 독자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라히리는 가우리의 선택에도 논리적인 감정의 길을 만들었다.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감정, 역사와 세월이 할퀸 상처가 가우리를 그리로 이끌었다. 

'저지대'의 사람들은 애초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낸다. 가혹한 삶이었지만 그로부터 물러서지 않는다. 어찌 보면 우연 같은, 알고 보면 필연인 선택으로 삶을 이어간다. 소설 속 사람들은 이해못할, 낯선, 기괴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그걸 그냥 이상하고 충격적으로 그려내는 작가가 있고, 충분히 논리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도 있다. 물론 라히리는 후자다. 비논리적인 삶을 논리적으로 직관해낸다.  

 

 

넷플릭스 시리즈 '본딩'을 봤다. '러시아 인형처럼' 이후 오랜만에 끝까지 본 넷플릭스 시리즈였다. 일단 끝까지 보기에 부담이 없다. 편당 15분 안팎, 총 7편으로 구성돼 있다. 시리즈 전부를 봐도 2시간 정도라는 얘기다. 모바일폰 환경,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매체 환경이 이런 분량의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게이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인 피트가 오랜 친구 티프의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극이 시작된다. 티프의 직업은 '도미나트릭스'다. 생소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성적으로 지배적인 여성'을 뜻한다. 티프는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 간지럼을 태워달라거나, 펭귄옷을 입고 씨름을 한다거나, 막말을 들을 때 성적으로 흥분된다는 남자들이 티프를 찾아온다. 티프는 고분고분하진 않고,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도미나트릭스'다. 자신에게 오줌을 눠 달라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땐 피트가 나서서 얼굴 위로 미적지근한 오줌을 뿌려준다. 피트는 티프의 조수가 돼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받는다. 

생전 처음 보는 성적 취향의 지하 세계를 그리지만, 중반 이후는 멜로드라마의 느낌이 난다. 티프와 고객 사이가 아니라, 티프와 피트, 티프와 같은 대학 강의를 듣는 남자, 피트와 동성 남자 친구 이야기가 그렇다. 난 '본딩'을 보면서 멜로드라마는 아직 가능성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로의 핵심은 남녀든, 여여든, 남남이든 '관계'의 얽히고 설키는 모양새다. 그런 모양새를 그림으로써 추구할 수 있는 재미와 의미는 무한대에 가깝다. 다만 멜로드라마의 가능성이 두 시간 안팎의 영화에서도 구현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본딩' 후반부에서 흥미로웠던 포인트는 일과 삶의 섞임이다. 우린 흔히 공과 사, 일터와 가정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구분선이 생각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당장 주 52시간 노동과 관련한 계산을 봐도 그렇다. 집에서 다음날 회의 때 제시할 아이디어를 열심히 생각하면 노동시간인가. 생각만 하면 노동이 아니라면, 집에서 컴퓨터를 열어 무언가 끄적이면 노동인가. 직장에서 배우자에게 전화하면 노동 시간에서 빼야 하나. 고객의 은밀한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티프의 직업은 어차피 고객의 삶에 깊숙히 개입돼 있다. 티프에겐 '일'이지만, 고객에겐 '삶'이다. 고객은 때로 티프에겐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티프의 삶 속으로 개입해 들어온다. 티프가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하려는 순간에, 티프의 노예 노릇을 하며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던 남자가 나타난다. 남자는 티프와 데이트 하는 남자에게 질투를 드러낸다. 티프가 또다른 남자를 '지배'하려는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리즈 종반부 티프와 피트는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한다. 이 역시 일이 삶에 너무 깊숙히 파고들어왔기 때문에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Bonding'이라는 제목의 뜻도 '밀접한 감정적 교류'라는군. 일할 때 감정이 안섞일 수가 있나.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영화의 기획부터 제작까지 석 달만에 해낼 순 없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넷플릭스에서 본 음악영화 '더 더트'는 '보헤미안 랩소디'와 유사한 궤적을 가진다. 물론 좀 더 과격하긴 하다. 그건 퀸과 머틀리 크루의 음악, 태도적 간극에 기인한 것이기도 할테고. 

프레디 머큐리가 성적, 인종적 소수자이긴 했지만, 퀸의 다른 멤버들은 비교적 '정상가족'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머큐리의 떠들석한 파티를 묘사했지만, 그런 행동이 당대 록커들의 태도에 비해 그다지 튄다고 볼 수도 없다. 영국의 록 신은 이미 섹스 피스톨즈 같은 '개쌍놈'의 음악이 휩쓸고간 뒤였으니까. 하지만 머틀리 크루는 차원이 다르다. 어느 록커들의 삶에 견주어봐도 떠들석하고 요란하고 일탈적인 삶을 살았다.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머틀리 크루는 그러한 자신들의 태도를 밴드의 정체성으로 삼기도 했다. 1980년대 미국 헤비 메탈이 섹스, 마약, 폭력에 탐닉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머틀리 크루가 있다. 

'더 더트'는 시작부터 떠들석하다. 오랜 지병인 강직성 척추염을 앓고 있는 과묵한 기타리스트 믹 마스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보컬 빈스 닐, 베이시스트 니키 식스, 드러머 토미 리)는 말할 수 없이 난잡한 파티를 즐기고 있다. 곳곳에 마약과 섹스가 넘실댄다. 마약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섹스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빈스 닐은 거의 발정난 짐승처럼 묘사된다. 누구의 여자친구든, 약혼자든, 부인이든 아랑곳 않는다(물론 관계가 강제적이라는 흔적은 없다). 니키 식스는 헤어날 수 없는 마약중독자다. 맞고 깨면 또 맞는다. 팔뚝에 주사를 꽂은 채 피를 흘리며 잠들었다가 꺠어나곤 한다. 토미 리는 키만 큰 막되먹은 아이 같다. 니키 식스처럼 조용히 마약하거나, 빈스 닐처럼 문닫고 섹스하는 것이 아니라, 호텔 전체를 뒤집어놓으며 난동을 부린다. 

그런데도 '더 더트'가 '보헤미안 랩소디'와 '유사한 궤적'을 보인다고 말한 건, 이들의 떠들석한 소동이 내면의 상처에서 비롯됐으며, 모두가 결국 지독히 외로운 사람들이며, 급격한 성공이 그만큼 급격한 몰락을 가져올 뻔 했으며, 밴드 멤버들이 한때 다투다가도 결국은 가족처럼 재회해 화해한다는 내용 떄문이다. 베이시스트로선 특이하게 팀의 지주 역할을 한 니키 식스가 대표적 사례다. 영화는 아예 니키 식스의 내레이션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의 어린 시절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생부를 보지 못한 채 자랐고, 엄마는 한 주가 멀다하고 다른 남자를 집으로 들였으며, 그렇게 집에 온 남자들은 하나 같이 니키 식스를 학대했다. 니키 식스는 칼로 자해하는 소동 끝에 엄마와 격리되는데 성공한다. (니키 식스라는 이름은 그가 과거와 절연하면서 스스로 새로 지은 이름이다) 성인기의 난동에 대한 그럴듯한 알리바이긴 하지만, 기원을 알 수 없는 괴물이 더 무섭다는 것은 오랜 진실이다. 

PC함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던 80년대의 이야기고, 그래서 요즘 보기엔 구리지만 또 신기하고 재미있다. 나도 80년대 후반부터 록을 들었지만 머틀리 크루 음악은 많이 접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좀 심각한 가사 때문에 국내 발매가 어려웠던 것 같다. 난 오히려 본 조비, 스키드 로, 건즈 앤 로지즈로 이어서 듣다가, 그보다 조금 앞 세대인 머틀리 크루는 나중에야 알았다. 다만 음악영화, 특히 록밴드를 다룬 영화가 '보헤미안 랩소디'나 '더 더트'같은 유형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선 약한 불만이 생겼다. 





미국의 철학자 토드 메이의 '부서지기 쉬운 삶'(돌베개)을 읽다. 원제는 'A Fragile Life: Accepting Our Vulnerability'다. 쉽게 말해 '철학 에세이'이라 할 수 있지만, 흔히 한국 출판계에서 '철학 에세이'라는 명명이 주는 어감보다는 무거운 책이다. 

저자는 철학이 이론의 전개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메시지여야 한다고 말한다. 강단의 학자들이 까다로운 개념어로 세심하게 다루는 '철학'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철학'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모두 삶의 메시지를 전했다. 메이는 해탈하지 못한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 상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색한다. 메이는 '희박하나마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철학적 관점 네 가지에 주목한다. 불교, 도교, 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주의다. 

불교는 만물이 변화한다고 본다. 여기 있는 노트북 컴퓨터와 테이블도 언젠가는 썩거나 부서져 다른 무언가로 바뀐다. 나는 파도 같은 존재다. 파도가 솟구칠 때는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바다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삶의 괴로움은 우주가 하나의 변화의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제로는 그저 이 과정의 한순간에 불과한 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난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한 방법이 명상이다. 명상은 외부에서 내부로의 방향 전환이 아니라, 외부에 대한 집착을 줄여나가는 훈련이다. 물론 불교도도 타자를 연민한다. 다만 그러한 연민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동정이 아니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평정에 기반한다. 

도교는 천지만물의 근원인 '도'를 말한다. 물론 '도덕경'의 첫 구절처럼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도는 인간의 언어가 쉽게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무위'(inaction 혹은 nonaction으로 번역된다고)를 통해서만이 우주를 과정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장자는 말한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탄식, 변덕과 집착, 경박함과 방종, 아첨과 아양은 음악 소리가 텅 빈 곳에서 나오고 버섯이 습기에서 생겨나듯 밤낮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모른다. 두어라! 두어라!"

스토아주의자들의 시각은 불교와 조금 비슷하다. 이들은 "삶은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에 최대한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익살을 섞지 말고 품위 있게 삶에 맞서라. 억눌리지 말고 희망을 높게 잡지도 말라. 승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극복하는 데 있다." 세상 온갖 악과 부조리와 고통은 예고 없이 우리를 습격하지만, 우리에겐 이에 맞설 별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세계의 관계, 즉 실존적으로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통제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우스조차 체념적으로 '명상록'에 적었다. "매일 아침 너 자신에게 말하라. 오늘 나는 참견하는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을, 오만한 사람을, 신의 없는 사람을, 악의 있는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훈련을 거듭했다. 이 역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고 체념하는 태도와 관련 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는 흔히 '향락주의자'라고 번역되지만, 맛있는 음식, 좋은 자동차,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에피쿠로스는 다음처럼 적었다. "욕망의 일부는 자연적이고, 일부는 근거가 없으며, 자연적 욕망에는 필연적인 것과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있다. 그리고 필연적인 욕망에는 행복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 있고, 육체를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 삶 자체를 위한 것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향락주의자'라는 명칭은 이 모든 욕망을 뭉뚱그려 합친다. 하지만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비싼 차를 사고 싶다는 '근거 없는 욕망'을 배격하고,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 욕망, 예를 들어 '성욕' 같은 것도 자제하라고 권한다. (결국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전혀 향락적이지 않다.)  모든 향락의 끝인 죽음에 대해서는 어떨까. 심플하고 논리적인 답이 준비돼 있다.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감각에 존재하고, 죽으면 감각이 상실"된다. 

언젠가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고 있다. 책을 읽고 그에 연관된 책을 살피는 식이다. 강하게 의식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책을 짚는다. 그러므로 '부서지기 쉬운 삶' 이후에 읽을 책은 오랫동안 회사 책상에 꽂혀 있던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이다. 




**스포일러 있음

어제 오전에 극장에서 다섯명 쯤의 관객과 함께 '아사코'를 봤다. 영화가 너무너무 이상한데, 바로 그런 이유로 흥미진진했다. 서사는 종잡을 수 없었지만, 감정은 정확히 묘사됐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이 주요 소재라는 점에서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까지 본 멜로 영화는 아니다. 이상한 흐름이 자꾸 생각나고, 왜 그리 이상하게 찍었는지 궁금하고, 스스로 해명해보고 싶다. 훌륭한 영화라는 뜻이다. 

줄거리만 요약해도 이상하다. 오사카의 아사코는 어느 사진전에서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말도 안되게 급작스럽게 시작한 사랑이이었다. 하지만 바쿠는 안정적이기보단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저녁에 빵 사러 간다고 나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돌아오는 사람이다. 빵 사러 갔다가 동네 목욕탕에 들렀는데 거기서 만난 아저씨와 친해져서 그 아저씨 집에 가 만취하고 잔 뒤 빵은 주고 왔다....는 식이다. 결국 바쿠는 신발을 사러간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진다, 고 아사코의 내레이션을 통해 회상된다. 꼭 돌아오겠다는 말은 남겼다. 

2년 후, 아사코는 도쿄로 이사해 한 카페에서 일한다. 인근 회사의 직장인 료헤이라는 사람이 자꾸 아사코 앞에 나타난다. 놀랍게도 료헤이는 바쿠와 똑같이 생겼다(실제로 같은 배우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을 한다).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다가가지만, 아사코는 바쿠와 너무 닮은 모습에 자꾸 뒷걸음질친다. 사귀어 보려고도 하지만 마음이 온전히 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이 잠시 두려움에 떨만한 지진이 발생한 날, 아사코는 료헤이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지진 묘사가 섬찟하다. 죽거나 다친 사람은 하나도 안나오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혼란이 생생히 느껴진다. 거리 곳곳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후 5년간 둘은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료헤이는 성실하고 유머러스하며 다정다감하다. 어딘가로 갑자기 사라질 사람처럼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둘은 동일본대지진 피해를 입은 센다이 지역에 가서 자원봉사 활동도 자주 한다. 주변 친구들도 그런 그들을 축복한다. 료헤이는 오사카 본사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아사코에게 청혼한다. 

청혼하기 전 빠진 에피소드가 있다. 바쿠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바쿠는 그 사이 꽤 인기 있는 모델이 됐고, 아침 드라마에 나와 인기를 끄는 셀러브러티가 됐다. 청혼을 받은 순간, 아사코는 옛 연인 바쿠 이야기를 한다. 사실 바쿠가 료헤이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한다. 료헤이는 2년 전쯤 바쿠란 사람의 존재를 잡지에서 봤고,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고, 아사코가 자신을 처음 본 순간 멈칫한 이유도 이해했다고 말한다. 둘의 결혼은 문제 없이 진행될 것 같다. 오사카에는 창문에서 강이 바라다 보이는 집까지 구했다. 

아사코와 료헤이와 친한 친구들의 저녁 자리에 파국이 발생한다. 바쿠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료헤이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바쿠를 보고 놀란다. 바쿠는 돌아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펴 올린다. 2~3초쯤 고민하던 아사코는 바쿠의 손을 잡고, 둘은 그대로 나가버린다. 바쿠는 아사코를 차에 태우고 달린다. 부모님이 쓰지 않는 빈 집이 훗카이도에 있다고 한다. 자기 일을 대신할 사람은 많다며 휴대폰을 부서 던져버린다. 아사코도 돌아오라는 친구들에게 이별의 말, 사과의 말을 남긴 채 휴대폰을 던진다. 그렇게 자동차는 밤의 도로를 달린다. 

눈을 떠보니 새벽이다. 차는 방파제 근처에 서있다. 센다이 초입이다. 바쿠는 졸리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해서 차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는 방파제 때문에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아사코는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한다. 바쿠는 그러라고 한다. 차를 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아사코는 면허가 없다고 한다. 역까지 태워줄 필요도 없다고 한다. 바쿠는 그냥 떠나고, 아사코는 돈도 핸드폰도 없이 돌아간다. 

마침 센다이엔 평소 자원봉사를 하며 알고 지낸 지역 주민들이 있다. 한 할아버지가 돈을 빌려주면서도, 남자는 다른 남자와 놀다 들어온 여자는 용서하지 못하니 돌아가지 말라고 권한다. 하지만 아사코는 돌아가기로 한다. 원래 그렇게 하기로 예정된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이. 

아사코는 오사카의 료헤이 집을 찾아 문 앞에서 기다린다. 전날 저녁이었다면 당연히 자신의 신혼집이 될 곳이었다. 아사코를 발견한 료헤이는 화를 내면서 무슨 낯으로 나타났느냐고 말한다. 그리고 함께 키우던 고양이는 버렸다고도 한다. 아사코는 고양이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앓아누웠다는 오사카 시절 고향 친구를 찾아가기도 한다. 활발하던 친구는 루게릭 병으로 침대에 누운 상태다. 아사코는 친구 어머니로부터 귀여운 반전이 담긴 옛 이야기를 듣는다. 

아사코는 다시 료헤이의 집 앞으로 와 고양이를 찾는다. 사실 료헤이는 고양이를 버리지 않았고 집에 데리고 있었다. 그걸 계기로 아사코는 료헤이의 집으로 들어간다. 료헤이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졌다. 료헤이는 앞으로 아사코를 완전히 믿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사코는 수긍한다. 그리고 료헤이에게 덜 의지하겠다고 말한다. 둘은 베란다에 서서 비가 와 불어난 강을 바라본다. 료헤이는 물이 더럽다고 한다. 아사코는 그래도 아름답다고 한다. 끝. 

자유로운 바쿠(위)와 성실한 료헤이(아래). 

처음엔 바쿠와 료헤이가 도플갱어인줄 알았다. 아니다. 도플갱어는 만나면 죽는데, 둘은 한 번 마주친다. 아니면 둘이 닮았다는 건 아사코만의 착각이었던가. 아니다. 바쿠와 사귀던 시절 아사코의 단짝 친구가 료헤이를 보고 똑같이 생긴 모습에 놀란다. 바쿠와 료헤이가 닮았다는 건 아사코의 주관이 아니라 제3자가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이다. 

아사코는 다시 돌아온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바쿠를 외면하고, 오랜 시간 자신을 사랑할 료헤이를 찾기로 한다. 낭만과 현실의 대결에서 현실이 승리? 하지만 되찾은 현실이 그리 맑고 밝지만은 않다. 료헤이와 아사코의 마지막 대사는 시적이다. 강물은 더럽다. 하지만 아름답다. 폭우로 불어나 이것저것 뒤섞인 강물이지만 아름답다. 인간 관계는 단일한 감정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이나 숭배나 증오는 없다. 여러 가지 감정이 비율을 달리하며 섞이며 관계를 직조해나갈 따름이다. 최상의 잉꼬 부부라해도 미움이나 의심이나 권태의 싹은 마음 어딘가 뿌려져있다. 그것이 얼마나 자라나느냐, 자라났을 때 얼마나 현명하게 가지치기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실존인물인 영국 앤 여왕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어딘지 실제 이야기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아마 영화의 양식이 지금까지의 시대극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여왕이 중심인 영화야 많았지만, 그의 측근들까지 모두 여성으로 그린 영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여왕과 두 여성 측근에 의해 조종되는 말에 불과하다. 권력있는 신하들조차 여왕 하녀의 술수에 놀아난다. 

세습군주국가의 많은 왕이 그러했겠지만,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은 꽤나 이상하다. 군주로서의 의무감으로 국정을 억지로 수행하지만, 이웃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국가를 운영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안아픈 데가 없어서 회의에 불참하는 일이 잦고, 변덕이 죽 끓듯 하고, 기괴한 컴플렉스까지 갖고 있다. 그 와중에 오랜 친구인 사라 제닝스(레이첼 와이즈)가 여왕 대신 국정 전반에 관여한다. 신분 상승의 욕구에 불타는 귀족 출신 하녀 에비게일 힐(엠마 스톤)이 여왕과 사라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에비게일, 여왕, 사라,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전쟁이 벌어지는 화려한 궁궐. 

여왕의 존재감은 크면서도 없다. 하녀와 하인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릴 때, 호화찬란한 침실을 마음대로 사용할 때는 궁궐의 주인이지만, 국정을 관할할 때는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길 기다리는 꼭둑각시 인형 같다. 흥겨운 무도회를 갑자기 중단시키거나 아름답고 조화로운 현악5중주단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갑자기 사라의 뺨을 후려치더니, 곧 그녀의 특별한 서비스를 받는다. 군주제 권력 시스템의 허점, 앤 여왕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허점을 파고드는 모리배들이 나타난다. 사라가 왜 그리 권력을 휘두르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사라는 마치 권력이 원래부터 자기 것인양 자연스럽게 휘두른다. 반면 에비게일의 목표는 비교적 명확하다. 뚱뚱하고 성기가 작은 독일인에게 팔려가듯 시집간 경험이 있는 에비게일은 어떻게든 신분을 다시 상승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에비게일은 사라가 어떻게 앤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조심스레 살핀 뒤, 이를 업그레이드해 적용한다. 에비게일은 사라보다 젊고, 더 강한 동기부여가 돼 있다. 어쩌면 에비게일은 사라의 20여년전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더 페이버릿'은 무능해 보이지만 여전히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여왕을 중심으로, 획득하기도 다루기도 어렵지만 일단 쥐고 있으면 더없이 좋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두 여성의 이야기다.국가 운영의 큰 틀을 둘러싼 이념적 대결도, 셰익스피어식의 장엄한 궁중 비극도 없다. 누가 권력자의 비위를 잘 맞춰 환심을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뿐이다. 

두 차례 인상적인 롱테이크 클로즈업이 나온다. 앤 여왕이 무도회에서 사라의 춤을 보다가 조금씩 표정이 굳어가는 모습, 앤 여왕이 권력을 차지한 에비게일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며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 모습이다. 그때 앤 여왕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다. 영화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올리비아 콜맨의 스산하면서도 무서운 표정으로 권력자 내면의 황폐한 풍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라와 에비게일, 두 여자가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건 쟁투를 벌였지만, 이 전쟁의 주인공은 결국, 당연히도 여왕이다. 여왕의 내면은 두 여자가 맞붙은 전쟁터가 됐다. 영화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관객이 그 내면의 전쟁터 풍경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 군주의 황량한 내면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묻는다면, 의미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풍경은 분명 흥미진진하며, 권력 일반의 속성에 대해서도 은근한 암시를 한다. 

아름다운 포스터. 


가쿠하타 유스케의 논픽션 '극야행'(마티)을 읽다. '극야'란 말이 낯설었는데, 대략 '백야'의 반대말이다. 북극 지역에서 해가 뜨지 않고 몇 달이고 밤만 계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논픽션 작가이자 탐험가인 가쿠하타는 북극 지역의 극야를 홀로 걷기로 하고 4년에 걸쳐 차근차근 준비한다. 부분적으로 직접 걸어 지형을 익히고, 곳곳의 창고에 식량과 물품을 저장한다. 100여년 전에야 북극점, 남극점에 가장 먼저 도달하려는 경쟁들이 있었지만, 이제 지구 표면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고, 지구에 기록되지 않은 곳도 없다. 이제 탐험가는 어디를 가야할까. 가쿠하타는 극야행의 의미를 다음처럼 정의한다. 

탐험은 요컨대 인간 사회 시스템 바깥으로 나오는 활동입니다. 옛날에는 탐험의 목적이 지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이었죠. 그때는 지도가 당대의 시스템이 미치는 범위를 도식화한 매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지도에는 공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탐험은 어떤 모습일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극야가 떠올랐습니다. 이번 탐험은 미답의 땅을 개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

매일 태양이 뜨는 건 얼마나 당연한가요. 우린 태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태양이 뜨지 않는 세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죠. 그 점에서 저는 극야 세계가 미지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120일 동안 밤뿐인 세계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극야의 세계로 나간다면 현대인이 잃어버린 자연과의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쿠하타가 북극의 극야를 80일간 헤맸다고 해서 어딘가에 '세계기록'으로 남을 리는 없다. 애초에 목적지가 불분명한 여정이었으니까. 가쿠하타는 그저 스스로 세운 '탐험'의 정의에 따라 북극을 떠돈다. 누가 뭐라하든, 스스로 설정한 장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생의 한 절정기와 많은 돈을 투자한다. (가쿠하타는 극야행이 자신 인생의 절정기에 도전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탐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쿠하타는 자기가 세운 목적을 이뤘을까. 쉬웠다면 책이 재미있을리 없다. 사람도 없고 불빛도 없는 끝없이 광활한 밤의 세계에서 인간의 감각은 혼돈에 빠진다. 작은 언덕이 거대한 산맥처럼 보이고, 바위 덩어리가 사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쿠하타는 몇 번이나 지역을 걸어 눈과 발로 익혔지만, 어둠은 여전히 가쿠하타를 속인다. 가쿠하타는 일부러 GPS도 가져가지 않았다. 특수제작한 육분의는 극야행 초반부에 잃어버렸다. 나침반과 별의 위치에 의존해 대략적인 방향을 잡고 걸었다. 빛이 없어 공간감을 상실한 순간, 가쿠하타는 자신의 실체를 잃어버린다. 

개 한 마리가 그의 유일한 동행이다. 어둠 속 눈보라 속에서 헤매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무렵 식량 저장고를 발견하지만, 북극곰이 털어간 지 오래다. 절망에 빠진 가쿠하타는 생존의 방법을 모색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개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개도 사료를 충분히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상태지만, 어쩔 수 없다. 책 후반부는 가쿠하타가 개를 잡아먹는 최후 수단만은 사용하지 않기 위해 야생동물 사냥에 전력하는 과정을 그린다. 물론 어두컴컴한 빙판 위에서 사냥이 잘 될 리는 없다. 

극한 고생이 이어지는 후반부는 처절하지만, 의외로 유머러스한 대목도 많다. 다 떠나서, 개 한 마리와 썰매를 번갈아 끌며 끝없는 어둠 속의 북극 지대를 헤매는 풍경만큼은 인상 깊다. 그런 체험을 들려준 사람은 아마도 없었으니까. 상상만해도 두렵고 외롭고 우울한 여정이다. 이런 탐험을 생각해내 실행하는 '예외적 인간'이 나타나는 사회도 대단하다. '인도방랑'의 후지와라 신야, 북극 사진가 호시노 미치오도 생각이 난다. 





스카쓰케 마사노부의 '앞으로의 교양'(항해)을 읽다. 일본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의 의뢰로, 편집자인 스가쓰케가 미디어, 디자인, 건축, 경제, 문학, 생명 등 12개 분야의 명사와 월 1회 대담을 했고, 그 중 11개를 묶어서 책을 냈다. 11명 중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건축가 이토 도요,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정도였다. 각 대담의 분량이 길지 않고, '일본책은 정리를 잘한다'는 인상이 있어, 우연히 입수하고 얼마 뒤 읽기 시작했다. 대담이 2016년 9월~2017년 9월 진행됐으니, 비교적 최근의 양상과 흐름에 대한 정보를 기대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의외로 인사이트가 있었다. 각 대담자 당 길지 않은 분량이다보니 간략하고 단정적이라는 인상도 없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책에 기대하는 바가 바로 그러한 간결함이다. 사전 조사를 많이 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쉬운 질문부터 던져나가는 인터뷰어의 태도가 좋았다(인터뷰어로서 이상적인 자세다). 구루인 양 허세 부리거나, 20~30년전 공부에 기대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변화를 읽어내려 고민하는 인터뷰이들의 태도도 좋았다. 나도 모르게 몇 군데 줄을 쳤다. 몇 문장 인용한다. 


개인의 개성이 사물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주관을 억제하고 사실을 담담하게 쓴 기사보다 글쓴이의 색깔이 드러나는 기사가 더 잘 읽히거든요. 

앞으로의 시대에는 기자보다 편집자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고, 더 덧붙이자면 편집자보다 편집자 겸 경영자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봅니다. (...) 오늘날에는 동영상, 음성, 사진, 문자, 이벤트 등 무수한 편집 대상이 있습니다. 게다가 각 분야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져서 다양한 분야를 연결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편집자는 이 좋은 재료를 활용할 줄 아는 요리사가 되어야 하죠. (미디어, 사사키 노리히코)



그 시대에 적합한 건물을 만들지 않으면 건축은 힘을 잃습니다. 즉 동시대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건축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클라이언트가 명확하지 않은 건축은 예외 없이 잘되지 않습니다. (건축, 이토 도요)



제 생각에 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거든요. 그분들은 모더니스트입니다. 가라타니는 이제 전형적인 이와나미-아사히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시대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대표로 일컬어져 왔지만, 사실은 1970년대 후반에 일본이 고도 소비 사회가 되면서 무척 복잡한 사회가 된 것, 즉 정보의 유통 경로가 너무 많아지고, 대중이 와해되어서 소위 '분중(分衆)'이 되어가는 현상에 대응하지 않은 분들인 거죠. 

결국 "대중이 지금 원하는 것은 이겁니다" 하고 눈에 보이게 드러내면, 우리 사회는 그것을 정의처럼 취급해버리죠.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요. 대중의 생각은 정의도 정답도 아니거든요. 그들의 생각을 가시화한 다음에 그것과 어떻게 거리를 둘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인간은 대체로 변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통치 기구를 운영해 나가야 하는 겁니다. (사상, 아즈마 히로키)


세계 상위 8명과 하위 50퍼센트의 재산 규모가 같아요. (...) 요점은 경제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극화 상황이라는 겁니다. 

일본은 은둔형 외톨이 증후군에 걸려서 자본주의라는 학교에서 졸업하고 싶지 않다고 뗴를 쓰고 있어요. 

결국 '더 빨리, 더 멀리, 더 합리적으로'라는 근대 사회의 원리에서 벗어나 '더 느리게, 더 가까이'를 실현해야 화석 연료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경제, 미즈노 가즈오)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은 나약하다는 전제하에 제도 및 환경을 설계해야 한다는 게 예방 의학의 기본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 대해 체념하고 있다고 할까요. (건강, 이시카와 요시키)


우리 뇌는 60만 년 전부터 더 이상 커지는 걸 그만뒀습니다. 대신 인간은 1500cc정도 되는 작은 뇌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언어를 만들어냈죠. 주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기억을 외부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책에 정보를 전부 넣어두면, 사람은 기억할 필요가 없죠.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생각하는 힘, 혹은 응용하는 힘입니다. (...) 하지만 인공 지능이 나오면 생각과 응용까지 외부에 위탁하게 될지도 모르죠. 우리가 뭔가를 원할 때, '당신이 원하는 게 이거죠?' 하고 외부에서 알려주면,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되니 그저 버튼 클릭으로 물건을 사버리는 겁니다. (인류, 야마기와 주이치)









에도가와 란포의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문학과지성사)를 읽다. 전자는 중편, 후자는 단편 분량이다. 두 편 합해서 150쪽이면 끝난다. 

에도가와 란포(1894~1965)는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상의 이름으로 알려진 작가다. 필명은 란포가 좋아했던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한국 독자들이 일본 추리소설을 읽으며 에도가와 란포부터 시작하는 경우는 없는 듯하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현대 작가 아니면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마스모토 세이초 정도겠지.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151권으로 나왔다. 대산세계문학총서는 해외 문학 중에서도 문학사적 의미가 있으나 국내 번역은 잘 되지 않은 작품 위주의 목록을 꾸린 것으로 알고 있다. 추리소설이 이 시리즈로 나왔다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읽어보니, 역시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는 추리소설가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지만,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읽으면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파노라마섬 기담'은 지역의 거부가 어느 작고 외딴 섬에 자기만의 기괴한 세계를 만들려다가 완성 직전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정체가 불분명한 화자가 이 섬의 사연을 들려준다. 거부가 죽은 뒤 그와 얼굴이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대학 동문이 소식을 듣는다. 이 동문은 이루고자 하는 바는 있으나 의지는 없는, 그래서 졸업 이후 몇 년째 빈둥거리는 사람이다. 이 남자는 섬뜩하다기 보단 황당한 계획을 떠올린다. 무덤을 파서 죽은 거부의 옷을 꺼내입고, 그가 덜 죽은 채 묻혀서 가까스로 살아돌아온 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그 돈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계획이다. 다들 이 황당한 계획에 속아, 남자는 순식간에 거부가 된다. 단, 거부의 아내만이 그를 수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런 황당한 음모가 꾸며지거나 밝혀지는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1926년 발표된, 거의 100년전 소설이니 추리의 전개나 논리에는 위화감이 있다. 정작 란포가 말하려고 한 바는, 남자가 갑자기 손에 쥔 막대한 부를 이용해 외딴 섬을 가꿔나가는 과정이다. '파노라마 섬'의 묘사가 기괴하고 현란하다. 섬의 입구에서 중심부까지 지하로 난 유리 통로같은 것이 있어 신기하다기보다는 기괴한 해양생물들을 눈으로 관찰할 수 있고, 나체의 여인들이 식물인듯 동물인듯 노예인듯 살고 있으며, 거리 감각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설계로 방향과 위치를 혼란에 빠트린다. 란포는 남자가 범죄의 추리보다는 이 섬을 묘사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상상해낸 파노라마 섬의 묘사에 흐믓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작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래된 문예사조에서 따온다면 '탐미주의' 같은 말을 붙일 수도 있겠는데, 색깔은 눈이 아프고 향은 메스껍다.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같은 말을 지어내고도 싶다. 


에도가와 란포

'인간 의자'는 그보다 짤막하고 확실하게 변태적이다.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못생긴 남자가 주인공이다. 이 남자는 손재주가 좋아 그럴듯한 의자를 만드는 기능공이 된다. 어느날 남자는 외국인이 주문한 제법 큰 가죽 의자를 만든다. 남자는 그 의자 안에 들어가 외국인의 집으로 침입할 생각을 한다. 스프링 같은 부품을 일부 제거하고는 그 안에 들어가 앉는다. 그리고 의자 속에서 의자에 앉는 사람의 몸을 느끼고는 좋아한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좋아한다. 유럽 어느 강국의 대사가 앉았을 때는 가죽 뒤에서 칼로 푹 찌르고 싶다는 상상을 하고, 어느 유럽의 여자 댄서가 앉았을 때는 '이상적인 육체미의 감촉'을 느끼며 '예술품을 대할 때와 같은 경건한 마음'을 느낀다. (특히 서양 여자들의 육체에 대한 찬사가 가득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이 떠오르기도 한다. '미친 사랑'은 1947년에 나왔으니, 1925년 나온 '인간 의자'에 비하면 꽤 늦었다. 아니, 서양 여자의 육체에 대한 매혹은 일본 남성 소설가들의 전통 같은 것이라 해야 하나) 결국 '인간 의자'는 그 단편을 읽는 여성 소설가의 의자에 남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아이디어로 끝나는 척 하다가 안전 장치를 마련하는데, 김기영의 '하녀'가 마지막에 기묘한 영화에서 빠져나오는 척 하면서 관객을 놀리는 것 비슷한 효과다. 하고 싶은 변태적인 이야기는 다 했으니, 작가는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닌 듯 시치미를 뗸다. 

하긴, 조금이라도 추종자가 나오면 금세 낡아보이는 어정쩡한 소설보다는 무엇이든 색깔이 강한 글이 낫겠지. 그 색깔이 좀 이상하다 하더라도. 




***스포일러 있음

조지 R R 마틴의 '나이트플라이어'(은행나무)를 읽다. 이제 마틴은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로 더 유명하다. '나이트플라이어'는 '왕좌의 게임'을 쓰기도 전인 1985년 선보인 작품이다. '왕좌의 게임'은 서양 중세를 연상시키는 판타지물인데, '나이트 플라이어'는 미래의 우주선 내부를 배경으로 하는 호러SF다. 물론 두 작품 다 잔혹하다. 사실 '나이트플라이어'가 더 잔혹하다. 머리통이 갑자기 터지고, 레이저가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가르고, 처리되지 않은 뼈조각, 살점, 눈알 등이 무중력 상태의 우주선 안에 둥둥 떠다닌다.

몇 만 년동안 이동하고 있는 신비의 외계 종족 볼크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우주선 나이트플라이어에 오른 여러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초능력자가 주인공이다. 나이트플라이어에는 선장 로이드가 이미 탑승중인데, 그는 왠일인지 우주선 반쪽을 홀로 사용하면서 홀로그램으로만 탑승객들 앞에 나타날 뿐 실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로이드가 정체를 숨기며 대는 이런저런 핑계는 영 미심쩍다.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초능력자가 자꾸 근원이 명확하지 않은 불길한 예감을 말하다가 결국 머리가 터져서 죽는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남은 과학자들은 하나 둘씩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또 각자 잔혹한 방법으로 죽어간다. 그 와중에도 외계 종족 볼크린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고, 로이드의 정체는 여전히 미심쩍다. 

괴물 또는 살인마가 나타났을 때 문을 열고 어딘가로 멀리 도망가 버리면 공포영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도망칠 곳 없는 폐쇄 공간인 우주선은 그래서 공포물에 괜찮은 공간이다. '에이리언' 시리즈나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영화들은 밀폐된 우주선 내부의 공포를 잘 살렸다. '나이트플라이어' 역시 우주선을 배경으로 한 호러SF의 전형적 코드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로이드와 나이트플라이어호의 정체에 대해선 약간의 반전이 있다. 너무 놀란 정도는 아니지만, 기대치 못한 정도이기는 하다. 생전의 정신이나 마음을 데이터화해 기계 내부에 보존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아이디어가 '나이트플라이어'에 고유한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전 미치오 카쿠의 '마음의 미래'를 읽은 덕에 이것이 물리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니 좀 더 흥미로웠다. 물론 당장 쉽게 실현할만한 기술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로는 충분히 가능하고, 언젠가 누구나 쉽게 그 기술을 이용할만큼 보편화될 수도 있다. 과거엔 기술적으로 까다로워 매우 소수의 훈련받은 이들만 다룰 수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쉽게 다루거나 저렴한 비용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분야가 꽤 많다. 영화 촬영이나 편집이 그렇고, 사제 폭탄, 유전자 분석 같은 것도 그렇다. 인류의 통념과 윤리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소수의 극단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는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런 한 두 사람이 세상을 멸망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 현대 세계다.  

나이트플라이어의 비밀이 밝혀지는 대목은 그럴듯하지만, 볼크린과의 만남은 조금 얼버무린 것 같다. 아마 이 책이 근간하는 '천 개의 세계' 시리즈의 다른 책을 읽으면 좀 명확해질지도 모른다. 신비한 존재와의 만남이라고 해서 모호하게 서술해도 되는 건 아니다. 

마침 '나이트플라이어'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돼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도입부 10분을 본 뒤,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세상에는 영상물이 너무 많고, 볼만한 영상은 너무 적다. 초반에 확실한 각인을 주지 않으면, 더 이상 볼 의지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