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미지

일과 삶이 엮이는 순간, '본딩'

 

넷플릭스 시리즈 '본딩'을 봤다. '러시아 인형처럼' 이후 오랜만에 끝까지 본 넷플릭스 시리즈였다. 일단 끝까지 보기에 부담이 없다. 편당 15분 안팎, 총 7편으로 구성돼 있다. 시리즈 전부를 봐도 2시간 정도라는 얘기다. 모바일폰 환경,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매체 환경이 이런 분량의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게이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인 피트가 오랜 친구 티프의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극이 시작된다. 티프의 직업은 '도미나트릭스'다. 생소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성적으로 지배적인 여성'을 뜻한다. 티프는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 간지럼을 태워달라거나, 펭귄옷을 입고 씨름을 한다거나, 막말을 들을 때 성적으로 흥분된다는 남자들이 티프를 찾아온다. 티프는 고분고분하진 않고,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도미나트릭스'다. 자신에게 오줌을 눠 달라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땐 피트가 나서서 얼굴 위로 미적지근한 오줌을 뿌려준다. 피트는 티프의 조수가 돼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받는다. 

생전 처음 보는 성적 취향의 지하 세계를 그리지만, 중반 이후는 멜로드라마의 느낌이 난다. 티프와 고객 사이가 아니라, 티프와 피트, 티프와 같은 대학 강의를 듣는 남자, 피트와 동성 남자 친구 이야기가 그렇다. 난 '본딩'을 보면서 멜로드라마는 아직 가능성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로의 핵심은 남녀든, 여여든, 남남이든 '관계'의 얽히고 설키는 모양새다. 그런 모양새를 그림으로써 추구할 수 있는 재미와 의미는 무한대에 가깝다. 다만 멜로드라마의 가능성이 두 시간 안팎의 영화에서도 구현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본딩' 후반부에서 흥미로웠던 포인트는 일과 삶의 섞임이다. 우린 흔히 공과 사, 일터와 가정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구분선이 생각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당장 주 52시간 노동과 관련한 계산을 봐도 그렇다. 집에서 다음날 회의 때 제시할 아이디어를 열심히 생각하면 노동시간인가. 생각만 하면 노동이 아니라면, 집에서 컴퓨터를 열어 무언가 끄적이면 노동인가. 직장에서 배우자에게 전화하면 노동 시간에서 빼야 하나. 고객의 은밀한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티프의 직업은 어차피 고객의 삶에 깊숙히 개입돼 있다. 티프에겐 '일'이지만, 고객에겐 '삶'이다. 고객은 때로 티프에겐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티프의 삶 속으로 개입해 들어온다. 티프가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하려는 순간에, 티프의 노예 노릇을 하며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던 남자가 나타난다. 남자는 티프와 데이트 하는 남자에게 질투를 드러낸다. 티프가 또다른 남자를 '지배'하려는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리즈 종반부 티프와 피트는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한다. 이 역시 일이 삶에 너무 깊숙히 파고들어왔기 때문에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Bonding'이라는 제목의 뜻도 '밀접한 감정적 교류'라는군. 일할 때 감정이 안섞일 수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