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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를 위한 여정 혹은 변명, <조지프 앤턴>








824쪽에 달하는 살만 루슈디 자서전 <조지프 앤턴>의 메시지를 간결히 요약하면 이렇다. 표현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는 그것을 위해 싸우는 만큼만 주어진다. 


쓸데없는 일인지 알면서도 살만 루슈디를 만나면 묻고 싶다. "1988년으로 돌아간다면 <악마의 시>를 다시 쓰겠냐"고. 그에겐 <한밤의 아이들>도 있고 <무어의 마지막 한숨>도 있기 때문이다. <악마의 시> 없이도 그의 작가적 명성은 견고했을 것이다. 그는 <악마의 시> 출간과 함께 13년간의 부자유를 경험했다. 단지 '부자유'라고 말하는 건 약하다. 그 부자유는 이동과 거주의 제한은 물론 수많은 이슬람교도들의 분노, 친구인줄 알았던 이들의 배신, 죽음에 대한 공포, 가족이나 조력자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아마 루슈디는 "그래도 <악마의 시>를 쓰겠다"고 답하겠지. 그런 결기가 없이는 13년의 도피, 은둔, (사실상) 감금 생활을 견뎌내지 못했을테니까. 그는 싸웠다. 이슬람 광신도와 싸웠고, 문단 내부 인사와 싸웠고, 영국 경찰 간부들과 싸웠고, 그를 고깝게 생각하는 영국인들과 싸웠다. 많은 영국인들은 루슈디를 골칫거리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책을 써서 화를 자초하는가, 왜 저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이란이란 만만치 않은 나라와의 외교 마찰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 많은 경호비용에 사용되는 세금은 또 얼마인가. '표현의 자유' 따위, 몇몇 삐딱한 작가들에게나 필요하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그런 거 없이도 충분히 잘살지 않는가. 좀 더 진지하게는 이런 질문도 나올 수 있다. 표현의 자유란 명목으로 타인의 신앙을 모독해도 되는가. (이건 최근 샤를리 에브도를 둘러싼 논쟁과 거의 유사하다. 세상사는 반복된다)





사실 <조지프 앤턴>을 다 읽고도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루슈디, 경호경찰들 사이에 쓰이는 가명 조지프 앤턴(조셉 콘래드+안톤 체홉)은 그저 살기 위해,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할 뿐이다. 그도 물론 실수를 했다. 스스로 "사랑받고 싶은 소망"이라 이름붙인 그 욕망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자에게 타협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루슈디의 손을 잡는척 했던 그들은 그러나, 곧 루슈디에게 더 많은 양보를 요구했다. 루슈디는 곧 자신이 실수했음을 , 이런 종류의 투쟁에 필요한 미덕은 양보, 타협이 아니라 단호함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타협은 타협하는 자를 파멸시킬 뿐이다. 타협을 모르는 적을 타협으로 회유하기는 불가능하다."


<조지프 앤턴>은 또한 20세기 말~21세 초반 미국과 유럽 예술계의 스케치이기도 하다. 당대의 문화계 인사라면 어떤 식으로든 <악마의 시>에 대해 한 마디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와 공개적으로 만나며 지지한 사람도 있고(U2의 보노는 루슈디를 콘서트 무대 위에 올렸다), 지면을 통해 신랄하게 공격한 사람도 있다(대표적으로 존 르 카레). 루슈디는 꼼꼼하게도 친구와 적을 가른다. 특히 적에 대해선 그들이 루슈디를 공격하기 위해 어떤 말을 했으며, 훗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까지 관찰한다. 대략 해럴드 핀터, 크리스토퍼 히친스, 에드워드 사이드, 수전 손택, 나딘 고디머, 도리스 레싱,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커트 보네거트, 폴 오스터, 이언 매큐언, 브루스 채트윈, 토머스 핀천, 자크 데리다 등이 등장한다. 데리다는 좀 씹혔고, 히친스, 손택, 오스터는 인격과 용기와 논리를 두루 갖춘 사람으로 상찬받는다.  


자기 잘난 소리만 늘어놓은 자서전이라면 쉽게 읽힐리 없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사' 이야기였다면, "음..훌륭하네요" 하고 넘어갔겠지. 루슈디는 (약간의 구차한 변명을 덧댄) 불륜 이야기 등 실수담을 추가해 독자를 붙든다. 아무튼 루슈디의 네번째 부인인 파드마에 대한 묘사를 읽고 있으면, 당연히 검색창에 그 이름을 처넣을 수밖에 없다. 땅딸하고 기분나쁜 눈빛의 루슈디가 파드마의 허리에 손을 얹고 레드 카펫에 선 사진을 보면, 서양에서 작가란 여전히 화려하고 팬시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남성 혹은 여성 작가도 이런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준다면, 작가 지망생은 급속히 늘어나고 한국 소설의 질도 좀 더 올라가지 않을까. 한 가지 생각만 덧대자면, 앞으로 자서전을 쓸지도 모르는 작가에게는 나쁜 인상을 주지 않는 편이 좋겠다. 아니 작가를 가까이 하지 않는게 좋다. 


젊은이여, 작가가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