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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환자들>

이 이미지를 구글에서 찾다가 느낀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루시안 프로이트도 상당히 성공했다. '프로이트'로만 검색하니 할아버지의 이미지만큼 손자의 그림도 많이 나왔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은, 만일 죽는 날까지 정식으로 배울 기회는 생기지 않더라도, 그저 오래도록 관련 서적을 보면서 홀로 살펴보고픈 마음이 있다. 프로이트의 방대한 저서들에 등장한 150가지 사례를 통해 정신분석의 개요와 방법을 쉽게 서술한 <프로이트의 환자들>은 유익했다.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해석 방식 때문에 그와 불화했다. 융이 대표적이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융은 리비도 이론에 대한 프로이트의 집착을 '제발 교회에 나가자고 성화를 부리는 엄마'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래서 융은 프로이트를 떠났다.

허나 꿈에서 길쭉한 무언가를 본다면 그건 남성 성기의 상징이라는 식의 즉물적인 해석은 프로이트를 오해하게 한다. 물론 프로이트가 그런 식의 해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이건 아무래도 보통 사람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환자들>의 저자 김서영은 그럴 때 이렇게 권유한다. "믿기지 않으면 넘어가라"


아주 좋은 방법이다. 프로이트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의 방대한 말들을 모두 금과옥조로 여길 필요는 없는 일. 프로이트의 이론은 물론 임상에서 탄생했지만, 내가 의사도 아닌 마당에 그의 이론을 임상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그의 말들을 과학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 둔다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억압된 것의 귀환'은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에 놓인 키워드다. 억압된 것들은 농담이든 꿈이든 말실수든, 원래의 형태가 아니라면 왜곡된 형태로라도 돌아온다. 우주 속 사건 혹은 감정은 총량 보존의 법칙을 따른다고 바꿔 말해도 좋을까. 무의식은 아무 것도 잊지 않는다. 매력적인 믿음이다. 

프로이트가 비평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는 프로이트가 환자의 왜곡된 말, 혹은 아예 말하지 않은 것을 해석하고 찾아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창작자가 보여준 것을 정직하게 분석하는 것도 비평가의 역할이지만, 창작자가 보여주지 않은 것과 보여주지 않은 이유 혹은 잘못 보여준 것을 찾아내는 것이 한 수 높은 비평가의 역할이다. 

프로이트 후기의 이드, 자아, 초자아,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도 매우 유익한 개념이다. 기억 속에서 완벽한 것으로 가정되는 상상계,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관계가 폐쇄적으로 만드는 그 공간. 아이가 젖을 떼고 아버지의 법, 언어로 만든 우주로 접어드는 상징계, 이를 위한 거세. 주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편입될 때 남겨지는 어떤 것인 실재계, 꿈의 배꼽, 해석에 저항하는 잉여. 

잊어버리지 않도록 단단히 기억해둘만한 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