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텍스트

통제광, 독재자, 사업가, 슈퍼스타. 가디언의 스티브 잡스 오비추어리.

가끔 하는 취미인 가디언의 오비추어리 번역. 난 스티브 잡스에 대해 다소 시큰둥했는데, 다들 하도 이야기를 하기에 가디언의 오비추어리를 찾아봤다. 좀 늦긴 했지만, 스티브 잡스 전기 출간일에는 맞췄다고 억지로 생각해본다. "당신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컴퓨터 관련 용어는 얼렁뚱땅 넘어갔음. 비교하려면 원문으로) 

솔직히 잘생겼다. 빌 게이츠는 너드 분위기가 풍기는데, 잡스는 유쾌한 사기꾼 분위기를 낸다.



56세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사망한 스티브 잡스는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성공적인 제품을 잇달아 선보이면서 전세계 소비자 가전 시정에 전례없는 파장을 일으켰다. 10여년 전, 그는 파산 직전의 애플을 인수한 뒤 800억 달러의 자산 가치를 갖게 함으로써 거대 유류 기업 엑슨의 뒤를 이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값진 회사로 만들어 놓았다. (잡스는 1976년 애플을 공동창업했고 97년 돌아왔다)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는 모두 시장에 뒤늦게 출시됐고 비쌌고 초기 버전에선 이렇다할 장점도 없었다. 그러나 애플의 제품은 라이벌을 눌렀을 뿐 아니라 음악, 휴대폰, 개인용 컴퓨터 등 3개 산업을 재정의했다. 아이튠스를 통해 잡스는 이전에는 불법 다운로드 해야했던 디지털 컨텐츠를 정당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했다. 그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와 그곳에서 내놓은 <토이 스토리>(1995) 같은 작품을 통해 잡스는 영화 산업을 바꾸는데 기여했다. 헨리 포드나 콘래드 힐튼 같은 사업가만이 그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다.

잡스는 애플의 성공에 엄청나게 기여했다. 그는 '통제광'이라고 묘사되며, 완벽한 아이디어를 위해 수 백개의 다른 아이디어를 폐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7년 애플의 프로그램 개발자 대회 컨퍼런스 연설에서 잡스는 작업중이던 제품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은 일"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그는 더 큰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초점을 둔다. 당신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훨씬 큰 엄청난 제품이 탄생한다"고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잡스는 이후 애플의 재부흥을 이끈 전략을 설명했다. "내가 알아낸 것 중 하나는 우리가 고객의 체험에서 출발해 기술로 되돌아 가야한다는 사실이다. 기술에서 출발해 그걸 어떻게 팔아치울지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같은 실수를 이 방에 모인 누구보다 많이 저질렀다. 그걸 증명할 상처도 있다." 

"애플을 위한 전략과 비전을 떠올릴 때, 그건 '고객에게 어떤 기막힌 편의를 제공할 것인가. 어디서 고객을 사로잡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지, '엔지니어와 함께 주저앉아 우리에게 얼마나 대단한 기술이 있으며 그걸 어떻게 시장에 내놓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서는 안된다. 이게 옳은 길이라고 믿는다."

궁극의 목표는 물론 돈을 버는 것이다. 잡스의 학교 친구이자 초창기 동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은 재미로 일을 했다. 하지만 잡스는 기술이 "1년에 80억 달러, 100억 달러치 물건을 팔 수 있는 크고 응집력있는 비전에 어울릴 것인가"를 고민했다.

고객에게 최고의 체험을 안겨주겠다는 잡스의 욕망은 애플이 사용한 칩의 디자인,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온라인 서비스 등 모든 것에 영향력과 통제력을 미쳤다. 그는 애플 제품을 파는 수 백개의 매장도 열었다. 잡스는 그를 흠모하는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언론의 엄청난 관심을 모은 기조연설문 '스티브노트'를 통해 신제품을 직접 소개했다.  

세밀한 경영방식 덕에 그는 산업 전반의 관행에 맞서 단순한 사용 방식을 추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아이폰은 미국에서 하나의 네트워크 사업자를 통해 하나의 모델로 출시됐다. 애플은 또한 온라인 앱 스토어에서 구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을 허가하고 통제했으며, 사용자가 (수백만개의 웹사이트에서 사용되고 온라인 동영상을 보는 표준인) 어도비 플래쉬를 사용하려 한다면 아이폰을 '언락(unlock)'해야 하도록 만들었다. 잡스는 악랄한 독재자로 간주될 수도 있다. 고객은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아무튼 독재자였다.

잡스의 첫 45년간의 삶에는 이러한 영향력을 감지할만한 사건은 없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대학원생의 아이로 태어난 그는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된 뒤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실리콘 밸리에 가까운 마운틴 뷰에서 성장했다. 고교시절 그는 실리콘 밸리 초창기의 회사인 휴렛 팩커드에서 열린 강의를 들으러 다녔고, 그곳에서 워즈니악과 함께 여름방학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1972년 고교를 졸업한 후 잡스는 포틀랜드 주 오레곤의 학비 비싼 리드 대학의 인문교양 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한 학기만 마치고 자퇴했지만, 캘리그래피를 비롯한 몇몇 수업은 계속 청강했다. 수업의 효과는 10년 뒤에 나타난다. 잡스는 "캘리그래피는 맥 컴퓨터 안에 디자인해 집어넣었다. 맥은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첫번째 컴퓨터다." 그는 머리와 턱수염을 길렀고, 친구집의 마룻바닥에서 잠을 잤고, 공짜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 하레 크리슈나 사원(역주: 힌두교의 한 종파)에 가기도 했다. 비틀스에 영향받은 시대의 많은 자퇴자들처럼 잡스 역시 인도의 구루를 만나러 가겠다는 야망을 품었고, 마침내 리드 대학 시절 친구인 댄 코트케와 함께 인도를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 구루는 이미 세상을 떴다.  

이때까지만 해도 잡스는 대학 자퇴자였고 사람을 설득하는 걸 제외하고는 확실한 재능도 없었다.(이 재능은 나중에 그의 '현실 왜곡의 장'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에겐 전자기기를 다루는데 천재였던 워즈니악 같은 친한 친구가 있었다. 워즈니악은 누구보다 적은 칩으로 회로를 디자인할 수 있었고, 그런 과정을 즐겼다. 잡스는 애플 컴퓨터를 만들 때 이 재능을 착취했다. 그러나 그들은 팀이었다. 잡스의 야망, 끊임없는 재촉, 금세 발전시킨 재능(높은 디자인 표준, 협상 능력, 그리고 마케팅 스킬)이 없었다면 워즈니악은 휴렛 팩커드에서 하드웨어를 디자인하면서 조용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워즈니악은 컴퓨터를 디자인했지만, 잡스는 시장을 개척했다.  

마이클 말론은 애플에 관한 책 <영원한 루프>(2000)에서 잡스가 "(1976년) 여름을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이방인으로 시작했다. 그는 그 분야 최고의 사업가로 경력을 마치게 된다"고 적었다. 최초의 애플 컴퓨터는 애호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조악한 나무 상자에 담긴 기계였다. 컴퓨터는 잡스의 부모님 집에서 수공업으로 만들어졌으며 666.66 달러에 팔렸다. 이후 잡스는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애플이 재정적 지원과 경력있는 경영자가 있는 그럴듯한 회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전 인텔 직원 마이크 마쿨라가 투자했고, 마이크 스코트가 애플릐 첫번째 최고 경영자로 지명됐다.  

워즈니악이 분발하면서 애플2는 아름답게 디자인됐고, 그리고 쉽게 연결 가능한 확장 슬롯을 통하면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내부에 장착된 컬러 그래픽 카드와 텔레비전과 연결가능한 플러그로 인해 애플은 같은 해 등장한 라이벌인 코모도르 PET, 탠디 TRS80을 능가했다. 잡스의 지휘 아래 애플2는 놀랄 정도로 독창적인 외양, 쉬운 사용설명서, 소비자에게 친근한 광고를 선보였다. 애플2는 1981년 8월 IBM PC가 출시되기 전까지 미국 시장을 장악하면서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업그레이드 버전도 여러 해 동안 팔렸다.

애플2의 성공과 함께 1980년 12월 애플 컴퓨터는 상장할 수 있었다. 상장 첫날 주가는 2배 이상 뛰었고, 이 신생 회사는 18억 달러의 가치를 갖게 됐다.

그러나 부와 명예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1982년 2월 워즈니악은 지역 공항에서 경비행기를 몰고 이륙하다가 춛돌사고를 내 부상을 당했다. 애플의 개발진은 워즈니악 없이 일해야 했고, 잡스는 원안을 낸 제프 래스킨으로부터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돌려받았다. 이제 매킨토시는 워즈니악이 아니라 잡스의 컴퓨터가 된다.

맥은 마우스, 그래픽을 통한 사용자 인터페이스 기능을 채택한 최초의 대중용 컴퓨터가 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앨런 케이와 제록스 연구소의 여러 과학자들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고가의 제록스 스타 워크스테이션에서 이같은 성능을 시험했고, 뒤에는 애플의 리사 컴퓨터(9995 달러)에서 시험했다. 그러나 이 컴퓨터들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잡스는 맥이 애호가, 과학자, 업계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닌 일반 소비자에게도 호소하는 기기가 되길 원했다. 잡스가 지적했듯이 특정 세탁기 브랜드를 선호하는 사용자 그룹은 없다. 잡스의 생각은 단순한 일체형 디자인으로 이어졌는데, 그다지 대단해 보이진 않았다. 케이는 이 컴퓨터를 비판하는 메모를 적었다. "제가 이런 얘기 한 적 있나요. 평균치의 4분의 1 양만큼의 기름만 들어가는 혼다 자동차 이야기를."

맥은 '1984'라고 이름붙여진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유명한 광고와 함께 출시됐고, 이 광고는 그해 1월 슈퍼볼 시간에 전파를 탔다. 맥은 당시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강자였던 IBM을 조지 오웰의 <1984>속 빅 브라더와 연계시켰다. US 매거진에는 20페이지짜리 광고가 게재됐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대표 빌 게이츠는 잡스와 함께 맥의 런칭 행사에 나타나 맥을 호평하고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등 맥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공급하기로 했다. 불행히도, 초기의 반짝 판매가 끝나자 맥의 판매량은 급격히 떨어졌다.  

1985년 애플은 여섯 개의 공장 중 절반의 문을 닫았고, (전사원의 5분의 1인) 1200명을 해고했고, 처음으로 분기 실적이 적자라고 발표했다. 잡스는 존 스컬리와의 이사회 대결에서 패배했다. 스컬리는 잡스가 "남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고 지낼래요, 세계를 바꿀래요?"라고 말하며 펩시사에서 스카우트한 인물이었다. 맥은 확장 단자를 가진 전통적인 쓰리 피스 시스템으로 다시 디자인됐고, 매킨토시 2는 1987년 출시됐다. 매킨토시는 디자인계, 출판계 사람들 사이에서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잡스는 "누군가 내 복부를  때려눕힌 것 같았다. 난 겨우 30살이었다. 무언가를 계속 만들고 싶었단 말이다.  난 적어도 하나 이상의 대단한 컴퓨터를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애플은 내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잡스는 맥 팀을 포함한 몇몇 애플 사원들과 함께 새 컴퓨터 회사  NeXT를 만들어 비즈니스와 고급 유저들을 위한 강하고 미래지향적인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을 만들려 했다. 투자자들이 몰렸고 팀 버너스-리가  NeXT Cube에 월드 와이드 웹을 개발했지만 판매량은 절망적이었다. 회사는 하드웨어 부문을 포기하고 운영체계를 판매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실패작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잡스는 변신했다. 지루한 호텔이 아닌 런던 팔라디움의 무대에서 NeXT를 출시했을 때, 잡스는 머리와 수염을 잘 다듬은 세련된 연기자가 됐다. 그는 일시적일이언정 슈퍼스타였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마침내 마우스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채용한 윈도우 95를 출시한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애플의 연매출액은 111억 달러에서 1998년 58억 달러로 곤두박칠쳤다. 적자가 났고 회사를 팔겠다는 시도도 있었다. 애플 이사회는 길 아멜리오를 수장으로 선택했지만, 역시 먹혀들지 않았다. 훗날 잡스는 말했다. "상품이 구리다. 섹시한 면이 전혀 없다."

맥OS 소프트웨어 개발은 정체됐다. 아멜리오는 이를 대체할 새 운영 체제를 구매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초기엔 장 루이 가세의 BeOS를 구입하려 했다. 그러나 1996년말에 아멜리오는 결국 NeXT를 샀다. 슈퍼 세일즈맨이 된 잡스는 다시 한번 주가를 높였다. 애플은 가세가 부른 2억7500만 달러가 너무 비싸다고 말한 뒤 NeXT를 4억2900만 달러에 샀다.   

이후 잡스는 아펠리오의 고문으로 애플에 돌아왔다. 이는 기업의 역매수같았다. 아비 테바니언이나 존 루빈스탸인같은 전 NeXT 스태프가 애플의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부문을 맡았다. 공식 직함에 상관없이, 누가 이 쇼의 연출자인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 이번에 잡스는 이사회의 반란을 주도했고, 1997년 9월 '임시 CEO'가 됐다.

애플 추종자들에게는 유사 종교적인 면모가 있었다. 잡스의 귀환은 맥 신도들에게는 구세주 재림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는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적인 예였다. (인디애나 주 오레곤의) 황야에서 시간을 보낸 입양자는 차고에서 회사를 세우고 부와 명예를 거머쥔 다음 쫓겨나고 다시 영예롭게 돌아왔다.  
 
애플을 재건하는건 잡스에게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애플 뉴튼같이 인기 없는 상품의 생산을 중단했고, 생산 라인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켰고, 눈길을 잡아끄는 디자인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0여개의 맥 모델이 눈물방울 모양의 아이맥으로 대체됐고, 휴대용 아이북이 나왔고, NeXT를 닮은 G4 큐브, NeXT의 NeXTStep은 새 운영 체제인 맥 OS X에 맞게 적용돼 공급됐다. 잡스는 심지어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를 이끌어냈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도 맥용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흥미롭게도 잡스는 오리지널 매킨토시를 만들 때의 과정을 반복했다. 대중을 상대로 갑작스럽게 내놓기에 앞서 제품은 잡스의 엄중한 감독 아래 비밀리에 개발됐고, 이후엔 막대한 광고 물량을 퍼부었다. 그는 또 외부 접속 단자를 없애고 배터리조차 내장시킴으로써 물건을 가전제품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충실했다. 그러나 1984년 이후 세상은 바뀌었다. 기술은 더 이상 애호가나 업계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일반 소비자도 이메일을 보내거나 월드 와이드 웹을 서핑하기 위해 컴퓨터를 구입했다. 잡스는 소비자에게 기쁨을 주길 원했고, 실제 기쁨을 받기 원하는 소비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맥 혼자서는 윈도우로 점령된 세상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NeXT가 인수되기에 앞서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애플을 경영한다면, 최대한 매킨토시의 단물을 빨아먹겠다. 그리고 다음을 준비하겠다. PC 전쟁은 끝났다. 오래전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이겼다." 

잡스는 자신의 말에 충실했다. 그는 2001년 10월 아이팟을, 2003년 4월 아이튠스 뮤직 스토어를 선보였다. 이는 음악 산업을 변화시켰고, 애플은 성장의 반석에 올렸다. 2007년 1월 잡스가 아이폰을 들고 나왔을 때, 그는 애플의 컴퓨터 부문을 포기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연간 판매액은 2000년 80억 달러에서 2010년 650억 달러로 치솟았고, 지금도 여전치 오르고 있다. 이는 아이폰, 아이패드의 새 버전 덕분이다. 사실 아이패드는 이미 매킨토시보다 더 큰 시장을 차지한다.  

잡스의 건강 문제를 고려해봤을 때 애플의 성장세는 더욱 주목할만하다. 2004년 그는 희귀암의 하나인 내분비계 췌장 종양으로 수술을 받았다. 이듬해에 그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한 영감 넘치는 연설에서 죽음에 대해 말했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건 내가 인생에서 큰 선택을 할 때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직면해서는 거의 모든 것, 즉 타인의 기대, 모든 자부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은 사라지고 오직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건 우리에게 잃을 것이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미 발가벗었습니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2009년 1월 잡스는 호르몬 이상 때문에 몸무게가 급감했다는 이유로 매년 열어온 애플 기조연설을 걸렀다. 그는 6개월의 병가를 냈고, 업무에 복귀하기 전에는 간이식을 받았다. 2011년 1월, 그는 또한번의 병가를 냈고 8월엔 애플 CEO를 사임했다.    

애플의 팬들은 잡스를 우상화하지만, 완벽주의, 비밀주의, 혹독한 경영 스타일 때문인지 그가 전지구적으로 존경받는 건 아니다. 와이어드 매거진은 현재 HP에 재직중인 루빈스타인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우리는 테러 조직같은 세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애플의 전 마케팅 최고 책임자 가이 가와시키도 이렇게 말했다. "스티브는 지랄을 해도 상관없다는 점을 증명합니다."

어떤 이는 잡스가 워즈니악을 몇 천 달러로 속였다는 점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아타리 사가 탈출 게임을 만들 때 칩의 수를 줄인데 대해 건넨 보너스였다. 워즈니악은 70년대 중반 HP에 소속돼 있으면서도 일은 혼자 다했다. 잡스는 1978년 크리샌 브레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리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우드사이드의 역사깊은 저택을 구입하고는 팔로 알토로 이사가기 전까지 그 저택을 방치해둠으로써 지역 사회의 분노를 야기했다. 사적 보존 운동가들은 저택을 구해내기 위해 잡스에게 소송을 걸었다가 졌고, 결국 저택은 2011년 2월 철거됐다.

잡스는 HP의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의 뒤를 잇는, 그리고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앞에 선 실리콘 밸리의 정수였다. 그는 자신의 취향, 재능, 의지를 이용해 온갖 역경을 딛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성공적인 기업을 건설했다. 물론 그는 개인용 컴퓨터 사업이 시작된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다. 그는 비닐, 테이프, 종이 등의 물체들을 다루는 아날로그 산업이 디지털 산업으로 바뀌는 그 흐름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잡스는 그 흐름을 탈만한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고, 라이벌들이 모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흐름을 만들어 나갔다.   

잡스의 유족으로는 1991년 불교 예식으로 결혼한 아내 로렌 파월과 둘 사이의 아이들인 리드, 에린, 이브, 또다른 딸 리사, 그리고 소설가인 여동생 모나 심슨이 있다.

사업가 스티븐 폴 잡스, 1955년 2월 24일 태어나 2011년 10월 5일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