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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과 장애물, <열쇠>





성을 다룬 의학 다큐멘터리와 포르노그래피의 차이는 무얼까. 아마도 섹스를 하기 위해 포르노는 다큐보다 조금 더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섹스가 벌어지는 상황을 설정하고, 몇 겹의 옷을 하나씩 벗기고(혹은 섹스에 방해받지 않을 정도만 남겨두고), 카메라나 조명은 관객의 목적은 충족시키되 너무 직설적이지는 않을 정도로 영상의 각도, 움직임, 명암에 변화를 줘야 한다. 처음부터 나체로 나온 파트너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섹스를 하고, 카메라는 그것을 미동도 없이 정면으로 비춘다면? 그건 의학 다큐다. 


에로티시즘은 방해받을 때 자극받는다. 지난 세기의 정신분석가들은 에로티시즘을 금기와 연계시키기도 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창비식 표기로는 타니자끼 준이찌로오!)의 <열쇠>는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것도 매우 일본적인 방식으로. 에로티시즘을 고취시키기 위해 정말 세심한 방해 장치들을 몇 겹이나 꾸며두었다. 


50대의 남편과 40대의 아내. 남편은 대학 교수고, 아내는 옛스겁고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여성이다. 남편은 아내가 엄청난 성욕을 가졌지만 이를 개발하지 않은 채 수동적으로 살아간다고 믿고 있으며, 자기 자신이 그 성욕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음을 미안하게 여긴다. 남편은 남편대로 불만이 있는데, 아내의 수동적인 태도 때문에 자신의 욕구마저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소설은 남편과 아내의 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일기를 훔쳐본다고 짐작하면서도, 이를 방관한다. 오히려 아내에게 자신의 내밀한 욕구를 전하는 매체로 일기를 이용하려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일기를 쓴다. 아내는 남편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열어본 적도 있지만 결코 읽은 적은 없다고 적는다. 이것이 일기 본연의 목적대로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고백한 것인지, 남편에게 이렇게 알리고 싶어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둘에게 일기는 자신의 마음, 상대방, 독자를 모두 속이는 도구다. 둘은 일기라는 비밀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미디어를 통해서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알린다. 



고양이를 안고 있는 변태남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 29세에 9살 연하 아내 치요와 결혼했으나 그다지 애정을 느끼지 못하던 차, 함께 살게된 14살의 처제에게 빠져들어 버림. 정작 동료 평론가 사토 하루오가 치요에게 연정을 느끼자, 그에게 아내를 양도하겠다고 세상에 알림. 


그러나 일기만으로는 안된다. 남편은 부부 관계에 제3자를 개입시킨다. 딸의 정혼 상대로 눈여겨 보던, 즉 사위 후보자를 질투의 대상으로 삼는다. 질투의 대상이 있을 때 에로티시즘은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남편, 아내, 사위 후보자는 몇 차례 함께 브랜디를 마시는데, 아내가 술에 취해 사라져 욕실에서 쓰러지면 두 남자는 그녀의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옷을 벗기고 의학적인 처치를 한다. 의학적인 처치라고 하니까 할 말은 없는데, 이게 사실 그다지 돌발적인 사태가 아니라는데서 문제가 달라진다. 아내는 자신이 술을 마신 뒤 혼수상태에 빠지리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고, 두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속고 속이며 속는다는 걸 알면서도 속아주는 게임이 벌어진다. 나중엔 부부의 딸까지 이 게임에 뛰어든다.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겹의 속임수와 장애물로 섬세하게 구축한 에로티시즘의 탑을 투박한 살의와 욕망의 덩어리로 변환시켜버린다고 할까. 작가는 70세에 이 소설을 썼고, 그로부터 9년 뒤 세상을 떴다. 지난해 이맘 때쯤 읽었던 , 역시 변태적인 성애의 세계를 다뤘던 <만>과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각각 42세, 63세에 썼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참 꾸준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