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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의 문선명 오비추어리

가디언의 문선명 오비추어리 번역. 이명박, 노무현, 반기문은 물론 김대중보다 유명한 한국인. 오비추어리의 어조는 쌉사레. 원문은 여기



신흥 종교는 창립자의 죽음 이후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 진정한 시험에 빠진다. 통일교 문선명 목사가 92세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뜨면서 '무니스'라 불리는 통일교의 미래는 어두워 보인다. 자칭 메시아인 그의 국제적인 사업체와 미국의 보수 정치세력에 대한 은밀한 영향력의 전망에도 주목할 만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문선명은 합동 결혼식, 젊은 남녀들을 고립된 캠프에 보내놓고 가족을 버리도록 '세뇌'시키는 교육 방식으로 악명 높았다. 신도들은 하루 16시간씩 모금했고, 자칭 '아버지'인 문선명을 대신해 무보수로 일해야 했다. 


전세계에서 소송이 증가하고 문선명이 1980년대 초반 영국 데일리 매일지와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하자, 통일교는 그러한 방식의 전도를 포기했고 신도도 줄었다. 90년대에 그의 종교는 분명 추락하고 있었으며, 때마침 빌 클린턴이라는 비우호적 인사가 자리한 백악관과도 상대해야 했다. 문선명은 웹사이트와 뉴욕 사무실을 제외한 교회의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의 사업체는 1998년 아시아의 금융 위기에서 큰 타격을 입고서도 살아남았다.

 

문선명의 극우 신정 정치학, 반유대주의적인 저술, 부적절한 성적 행동에 대한 루머들, 1982년 탈세 혐의로 인한 미국내 수감, 기독교도에겐 신성모독적인 신학을 고려하면, 그가 미국의 대통령, 정치인, 성직자와 미국, 일본, 영국 학자들에게 환영받기까지 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 해답은 아마 위선, 혹은 문선명의 돈이 되겠다. 그런데 대체 그 돈은 어디서 나온걸까. 스스로 파시스트임을 인정했던 두 명의 일본 거부들이 기부하기도 했고, 한국의 정보 기관이 돈을 대고 있다는 루머도 있었지만, 돈의 궁극적인 원천은 아직도 수수께끼다. 1978년 일찌감치 문선명의 사악한 행동들은 의회 보고서에까지 묘사됐지만, 그의 터무니없는 경력과 과격한 발언들은 계속됐다. 그는 미국내 종교의 자유를 진정으로 증명하는 동시 종교의 이름으로 못할 것이 없다는 점을 보여준 위인이었다. 


문선명은 문용명이란 이름으로 지금은 북한땅에 있으며 당시 일본 식민지였던 상사리라는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기독교를 믿었고, 문선명은 시골 학교에 다녔다. 15세에 그는 예수의 비전을 봤으며 "내 일을 떠맡으라"는 구세주의 요청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선명은 도쿄에서 공학을 공부해 1943년 졸업했고, 귀국해 19세의 나이에 첫번째 부인과 결혼했지만, 이 부분은 교회사에 언급되지 않는다.(문선명은 2~4차례 결혼했다고 수차례 보도되기도 했으며,  혼외에서도 아이를 낳아 그 수가 8~16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일본이 패전하자, 문선명은 서울에서 교회에 다녔다. 그 교회의 목사는 한국이 새로운 이스라엘이며 그곳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는데, 문선명은 이 메시지를 곧바로 이용했다. 그는 교회를 그만 다닌 뒤 가족을 떠나 복음주의적 열정에 휩싸여있던 평양으로 향했다. 문선명은 새 이스라엘에 관해 예언하고 설교했으며, 여기에는 여성 신도와 성관계 맺어도 된다는 교리가 포함됐다는 주장도 있다.  


1948년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메시아에 대한 메시지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붙잡아 5년간의 노동수용소 형에 처했다. 문선명은 그곳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수용소는 1950년 미군 폭격으로 파괴됐고, 275명이 사망했다. 문선명은 살아남아 남쪽으로 향했으며, 다시 설교를 시작했고 1954년 통일교를 창립해 빠르게 성장시켰다. 그는 1960년 미국으로 첫 전도사를 보냈고, 그 해에 문선명은 한학자와 결혼했다. 그의 장자가 1990년대 후반 술, 약물, 아내 구타 스캔들에 휘말리자 한학자는 교회를 보살피게 됐다. 


문선명은 1972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공화당 지지자들은 곧 그의 우익적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는 대규모 집회에서 추앙됐고,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휘말려있던 리처드 닉슨을 만났고, 국회의사당 계단에서 3일간 금식하면서 닉슨이 탄핵을 면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었다(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선명의 사업체는 코리아게이트 스캔들이 터진 1978년 이후 추문에 말렸고, 의회 소위원회는 문선명의 교회를 "다국적 기업...준군사적인 조직체, 매우 강한 규율을 가진 국제 정치 조직"으로 규정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덧붙였다. "신정일치를 추구하는 세계정부 설립은 통일교의 목표 중 하나다. 이 정부는 문선명과 그 추종자들이 다스린다." 의원회는 불법행위에 대한 더 자세한 조사를 권했지만, 로널드 레이건이 1980년 대통령이 되면서 이 요구는 기각됐다.  


문선명은 레이건주의 아래 번성했다. 이 시기 그는 미군정이 전범으로 투옥시킨 적이 있는 두 명의 일본인 거부의 후원을 받았다. 한 명은 야쿠자 두목이자 파시스트 비밀 조직의 설립자인 요시오 고다마다. 고다마는 전쟁 중 만주에서 장물을 취급해 거부가 됐고 일본의 록히드 뇌물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기다리가다 1984년 사망했다. 다른 한 명은 료이치 사사카와인데, 그 역시 전쟁기간중 돈을 벌었고 1995년 사망햇다. 1970년대 그는 140억 달러 규모의 일본 모터보트 레이싱 사업을 벌이면서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80년대에 문선명은 전세계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중국에서 자동차 공장을, 한국에서 티타늄 광산, 무기 공장, 통일 중공업을, 남미에서 대형 농장을, 뉴욕에서 스마트 호텔을, 알래스카에서 어업을, 캘리포니아에서 골프장을, 일본에서 컴퓨터 회사를, 뉴 잉글랜드에서 소규모 무기 회사와 대학을, 한국, 아르헨티나 일본에서 신문을, 그리고 1982년 설립된 보수적 색채의 워싱턴 타임스를, 교향악단, 발레단, 케이블 텔레비전 네트워크, UPI 통신사, 뉴욕 퍼블리싱 하우스, 잡지 인사이트, 그외 수많은 식당과 보석상을 운영하거나 조종했다. 뉴저지에 있는 그의 저택엔 방이 30개다. 


미국에서 13개월 간 복역후 풀려난 문선명은 위대하고 선한 이들에 의해 여전히 환영받았다. 수차례에 걸쳐 그는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와 에드워드 히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와 조지 부시 시니어, 캐나다의 전직 수상인 브라이언 멀로니, 미국 상원의원 스톰 서몬드, 제시 헬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 오린 해치, 레이건 정부의 국방부 장관인 캐스퍼 와인버거, 전 나토 사령관 알렉산더 해이그, 전 미국 교육부 장관 윌리엄 베넷, 보스턴 대학 총장 존 실버, 기독교 연합 전 총재 랠프 리드, 그리고 우익 크리스천 리더인 제리 팔웰 목사를 방문하거나 초청받았다. 


'성기'를 언급하는 설교, 미국 여성을 창녀에 비유한 어법, 가족의 스캔들, 반유대주의를 펼쳐서 랍비들에게 비난받은 경력, "세계를 점령, 정복"하겠다는 맹세 등 그의 당황스러운 행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맥은 건재했다. 2001년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이 돼 기독교계 자선단체에 보조금을 주려고 했을 때, 문선명은 미국에 다시 시선을 돌렸고 그의 주요 기관을 통해 이 계획을 장려하는 공화당 캠페인을 지원했다. 사기꾼 같은 성직자에 대한 엉클 샘의 포용력은 지속됐다. 


2004년 3월 십수명의 공화당, 민주당 의원들이 더크슨 의원 회관에서 열린 문선명의 파티에 참석했는데, 여기서 일리노이주 민주당 의원인 대니 대이비스는 '메시아'에게 왕관을 선물했다. 문선명은 왕관을 쓰고는 그의 가르침이 히틀러와 스탈린을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도왔다는 내용의 기나긴 연설을 했다. 그는 민중을 구하기 위해 지구에 파견됐으며, "황제, 왕, 대통령 등이 천상과 지상에 문 목사가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 돌아온 주이자 참부모에 다름 아니라고 선언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몇 주 뒤 관련 내용이 살롱닷컴에 보도됐을 때, 참석한 정치인들은 사전에 행사 내용은 물론, 문선명이 참석하는지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몇몇 공화당 의원들은 단지 워싱턴 타임스 사주인 문선명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초대장에는 "주요 프로그램 스폰서"가 "평생에 걸쳐 종교간의 협력과 화해를 추구해온 문선명 목사 부부가 설립한 간종교적이며 국제적인 세계평화재단"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문선명의 막내 아들인 문형진 목사는 2008년 4월 교회의 종교 지도자로 지명됐다. 다른 아들과 딸들은 한국과 전세계에 뻗어있는 교회 사업체와 자선기관을 맡고 있다. 


2009년, 문선명은 그 해 세계 최대의 합동 결혼식에서 45000명을 동시에 결혼시켰다. 유족으로는 한학자와 10명의 자녀가 있다. 


 -문선명, 교회 설립자이자 사업가. 1920년 2월 25일 태어나 2012년 9월 2일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