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VOD로 <더티 해리>(1971)를 봤다. 맞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쁜 형사로 나오는 그 시리즈 영화 말이다. 가는 휴일이 아쉬워 VOD 목록을 이리저리 살피던 중 골랐다. 일단 가격이 쌌다. 막 개봉관에서 내려온 영화가 4500원씩 하는데 비해 <더티 해리>는 1000원이었다. 4500원짜리 영화는 재미없어도 끝까지 봐야할 것 같지만, 1000원이면 중간에 꺼도 큰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했고. (물론 <터디 해리>는 다 봤다. 1000원이 아까워 그랬던 건 아니다.)
이스트우드의 근작들을 말하기 위해 <더티 해리>를 스치듯 언급한 적은 있다. "<디터 해리> 시리즈에서 '나쁜 경찰' 역을 한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자신의 앞선 작품 속 살인에 대해 속죄한다"는 식으로. 그렇게 어림짐작해 쓰긴 했지만, 막상 <더티 해리>를 보니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더티 해리>의 해리 캘러헌 형사는 나쁜 놈들을 쓸어버리겠다는 의협심을 불태우는데, 그 방법은 그다지 합법적이지 않다.
시리즈의 첫 영화였던 <더티 해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쇄살인범이 있다. 캘러헌 형사는 목숨을 내건 수사 끝에 놈을 잡는다. 그러나 '그놈의 법'은 그를 놓아준다. 캘러헌 형사는 다시 그를 잡는다. 그리고 죽인다. 끝.
"내 손의 매그넘 44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권총이야. 니놈 머리를 날려버릴 수도 있지. 잘 생각해보라고. 난 오늘 운이 좋을까. 어때 등신아?"
캘러헌은 핫도그를 먹다가도 뛰쳐나가 흑인 은행강도 4명쯤은 순식간에 죽여버리는 인간이다. 마지막 한 놈을 잡을 때까지 아직 핫도그릉 우물우물하고 있다. 차 한 잔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온 관우의 현현인가. 그렇게 <더티 해리>는 강렬한 캐릭터로 보잘 것 없는 스토리를 그럭저럭 끌고나가는 대중 액션 영화다. 이건 <더티 해리>에 대한 악평이 아니다. 캐릭터의 생생함만으로 작품을 볼만하게 만드는 것 역시 대가의 솜씨다. 난 <파리의 노트르담>을 읽고 그렇게 생각했다.
해리는 카톨릭 사제, 흑인, 여자 등을 별 이유 없이 죽여대는 연쇄살인범을 추격한다. 그건 경찰로서의 당연한 임무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엔 사회의 부랑아, 탈법자들에 대한 불편함도 있다. 그건 경찰의 임무는 아니고, 그저 시민으로서의 걍팍한 윤리의식이다. 야간순찰을 하던 캘러헌은 거리의 창녀, 깡패들을 다 쓸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에도 가끔 그런 인식을 내보이는 '어른'들이 있긴 하다. 당장 삼청교육대라도 만들자면 찬성할 기세다. 삼청교육대까지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런 '사적 복수' 혹은 '초법적 정의'에 대한 갈망은 오늘밤에도 케이블 영화 채널 어딘가에서 할지도 모르는 <테이큰>, <아저씨> 등의 영화에까지 이어진다.(심지어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번개맨>에서도 '초법적 정의'가 실현되지만, 번개맨이 활약하는 조이랜드에는 애초에 사법체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상황이 다르다) 허나 내가 아는 최고의 복수 영화 <킬 빌>은 인상적인 인용구로 시작한다. "복수는 식은 뒤 먹어야 맛있는 음식 같다" 처음 들을 땐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이제야 그 뜻을 알 것 같다. 복수는 한 타임 쉰 뒤 시작하라는 얘기다.
<더티 해리>의 보수성은 악당 캐릭터에서도 드러난다. 이 악당은 사람을 재미로 죽이는지, 돈 떄문에 죽이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악당은 샌프란시스코 당국에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는 대가로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데, 또 하는 행동을 보면 프로페셔널하게 돈만 챙겨 달아나려는 것 같지도 않다. 경찰이 쫙 깔린 와중에 제발로 함정에 기어들어와 잡힐 뻔할 정도로 멍청하기도 하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그냥 살인을 취미로 삼은 것 같다. 그에게 돈은 일종의 '맥거핀'이다.
그의 벨트 버클은 60년대 반전시위대를 상징한 피스 심볼이다. 머리가 길고 괜히 히죽히죽 웃는 것이, <더티 해리>의 창작자들은 이 살인자를 60년대 히피의 떨거지 쯤으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가 나온 1971년이면 이른바 플라워 무브먼트에 숨죽였던 보수파들이 슬슬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시도할 때가 되기도 했다.
악당인지 아시겠죠?
캘러헌은 범인을 잡아 유죄를 받게하는데 필요한 이런저런 법절차가 못마땅하다. 범인의 은신처에 영장 없이 쳐들어가 범인을 잡아낸 뒤 그의 다친 다리를 짓밟으며 고문한다. 그렇게 해서 이미 죽은 소녀의 시신을 찾았고, 소녀를 죽이는데 쓴 총도 찾았다. 그러나 사법 당국은 캘러헌이 찾은 증거들을 무시한다. 은신처를 수색하기 전 영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거다. (법은 잘 모르지만 이것이 이른바 '독수독과론'?) 그러나 관객은 초를 다투는 체포 작전을 하는 와중에 영장 같은 걸 받아오긴 힘들다는 걸 안다. 그래서 당연히 법을 어기는 형사 캘러헌의 편을 들고, 법을 지키라는 검사와 판사는 '법관료제의 하수인' 정도로 인식한다. 그런 '법관료제'가 때론 바로 그 관객을 도와줄 수도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물론 자신의 법적 권리를 깨닫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가는 건 아니다.
<더티 해리>는 70년대 액션 영화다. 내게 '70년대'란 스타일로 먼저 다가온다. 발목 쪽으로 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체크 무늬 바지, 다듬지 않은 듯 하지만 실은 잘 다듬은게 분명한 장발, 굴리는데 터무니 없는 기름이 들 것 같이 터무니 없이 큰 차.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그럴싸하게 조성하는 멋진 영화음악. 알고 보니 아르헨티나 출신의 영화음악가 랄로 시프린이 만들었다. 그의 더 유명한 작품으로는 <미션 임파서블> 테마가 있다. 지금 유튜브에서 찾아서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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