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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혹은 망명, <영원한 휴가>와 짐 자무쉬

겨울 휴가가 시작한 첫날 밤, 먼지가 쌓인 채 썩어가던 '짐 자무쉬 컬렉션'을 뜯었다. 그의 학생시절 16미리 작품 <영원한 휴가>(1980)를 보기 위해서였다. 휴가 첫 날 <영원한 휴가>를 보겠다는 건 좀 웃긴 거 같은데, 그래도 왠지 보고 싶었다. 러닝타임이 72분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와서 살게된 사연을 들려주겠다는 한 청년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청년은 찰리 파커를 매우 좋아한다. 청년은 뉴욕 어디쯤에 있는 걸로 추정되는 누추한 거처에서 애인인지 동거녀인지 친구인지 이웃인지 모를 여성과 20분 가량 실없는 대화를 한다. 그렇게 방 안에서 영화가 끝나려나 하는 참에 청년은 밖으로 나온다. 전쟁 중에 중국인들에 의해 폭파된 부모의 집에 가보겠다는 것이다. (대화하던 여성은 "무슨 전쟁?"이라고 묻는다) 그곳에서 아직 전쟁이 진행중인 것처럼 숨어지내는 남자를 만난다. 청년은 정신병원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간다. 어머니는 아들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다. 청년은 병원을 나와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극장에 가서 팝콘을 먹고, 거리에서 광녀를 만나기도 한다. 청년은 거처로 돌아와 초반부의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멀끔히 차려 입은 청년은 트렁크를 들고 항구로 간다. 그곳에서 파리에서 갓 뉴욕에 도착한 남자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청년은 남자와 헤어져 배에 올라 파리로 떠난다. 뉴욕이 조금씩 멀어진다. 끝. 





80~90년대의 영화팬이라면 당연히 짐 자무쉬를 안다. 가장 유명한 영화는 실질적인 장편 데뷔작 <천국보다 낯선>(1983)이다. <영원한 휴가>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등장인물들이 하나마나한 말과 행동을 하는 이 미니멀한 영화는, 그 이전 영화에서는 본 적이 없는 공허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창출했다. 이후에는 <커피와 담배>같은 단편을 찍기도 했고, 무려 조니 뎁이 출연하는 <데드 맨>(1995)도 선보였다. 난 교환학생 시절 <고스트독>(1999)을 봤는데 완전히 반해버려 RZA가 만든 OST를 사서 한참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그래도 예전만 못하다는 평을 듣던 그는 빌 머레이가 나오는 <브로큰 플라워>(2005)로 건재를 알렸다. 가장 최근작은 <리미츠 오브 컨트롤>이다. 난 보긴 했는데 어떤 내용인지 잘 기억이 안나고 언급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고스트 독>. 난 좋아함.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알 수 있는 건, 그가 80~90년대 나타난 미국의 여느 독립영화 감독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 길이란 "아무데도 가지 않는 것"이다. 타란티노, 소더버그, 아르노프스키는 모두 서부로 향했다. 각기 다른 층위의 감독들을 한데 묶어 "서부로 갔다"고 하는 것이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그들은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을 기용해 작업했다. 그들은 가끔 실패했지만 대체로 성공했다. 칸이나 오스카 같은 곳에서도 이들을 종종 불렀다. 


자무쉬는 그냥 뉴욕에 있었다. 그보다 조금 앞선 세대의 감독과 비교하자면 카사베티스처럼 줄곧 독립영화 진영에 머물렀다. 그의 속내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할리우드에 가고 싶었는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는지, 가긴 했는데 쫓겨 났는지, 갈 마음이 없었는지, 갈 능력이 없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저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줄곧 '작은 영화'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음 작품을 찾아보니 <Only Lovers Left Alone>이 후반작업중이라고 한다. 수세기 동안 사랑에 빠지는 뱀파이어 이야기란다. 틸다 스윈튼, 미아 와시코우스카 같이 믿을만한 배우들이 나온다. 설마 <트와일라잇> 같은 분위기는 아니겠지. 


<영원한 휴가>에서 청년은 말 한 마디 통하지 않고 아무 연고도 없는 파리행 여객선에 오른다. 아마 그곳에서 '영원한 휴가'를 즐길 요량인 것 같다. 말이 휴가긴 한데, 난 청년이 사실상 망명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리는 그저 '여기 아닌 어느 곳'이란 뜻 정도의 지명일테고. 청년은 영원히 찰리 파커를 들으면서 막춤을 출 수 있는, 그러다가 팝콘을 먹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삶의 의미' 따위에 대해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그런 곳으로 망명을 갔다. 아마 그런 곳은 청년의 마음 속밖에 없을 것이다. 


만들 여건이 되니까 하는 일이겠지만, 아무튼 자무쉬 역시 훌륭한 배우들과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들을 3~4년에 한 편 꼴로 내놓고 있다. 그가 '영원한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까. 아니다. 그건 영화 만들기의 괴로움을 잘 모르는 외부자가 함부로 하는 얘기다. 자무쉬 역시 자신만의 망명지에서 이쪽 땅을 향해 줄곧 어떤 소식을 보내고 있다고 해야 좋겠다. 휴가를 맞았답시고 그 소식을 찾아 들은 이국의 어느 관객이 어젯밤에 있었다.  



내가 알기로 자무쉬는 20년전이나 지금이나 저 헤어스타일이었다. 단지 이마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