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텍스트

좌파도 자기계발합시다. 조정환의 <예술인간의 탄생>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는 말을 받아치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런 분과 인터뷰를 하고 나면, 그 오랜 공부를 짧은 시간에 압축 전달받은 느낌이 들어 기자 생활의 유익함을 새삼 깨닫는다. 아래 글에는 지면 분량상 넣지 않은 건강론에 대한 부분을 덧붙였다. 




예술가는 누구일까. 미술관에 작품이 걸려 있고, 커다란 무대 위에 오르며, 도서관이 그의 책을 구입하는 사람일까.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59)는 4년만에 낸 단독 저서 <예술인간의 탄생>(갈무리)에서 ‘예술가’와 ‘예술인간’을 구분한다. ‘예술가’는 예술대학 졸업장, 수상 실적에 의해 자격을 얻지만, ‘예술인간’은 저마다의 삶에 내재한 에너지를 끄집어낸 즉시 태어난다. 그는 우파의 전유물처럼 들리는 ‘자기계발’이란 말을 쓰기도 꺼리지 않았다. 다만 체중 관리, 영어 점수 향상 등 자본이 원하는 방식의 자기계발이 아니라, 삶에 충실한 자기계발이어야 한다. 조 대표를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만났다. 


-당신은 2008년 광화문 촛불집회, 2010년 아랍의 봄,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를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평가한다. ‘예술’이 무엇인가.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삶 자체가 예술의 원료이며, 에너지다. 현대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제도적 예술가는 역사 속에서 보면 오히려 예외적 존재다.”


-당신은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 아서 단토 등의 예술종말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안토니오 네그리, 질 들뢰즈, 조르조 아감벤의 미학을 예술진화론으로 위치시킨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가. 

“인류가 종말을 맞는다면 예술은 사라지겠지만, 인류가 지속되는 한 예술이라는 활동양식이 사라질 수는 없다. 네그리는 다중이 호흡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매 순간을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범상하거나 모자라는 사람에게도 ‘예술의지’가 약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생>의 장그래를 보라. 회사에서 이런저런 압력을 받은 장그래는 옥상에 올라 산다는 것, 일한다는 것이 뭔지 생각한다. 이런 순간 예술의지가 밀려오지만, 결국 회사의 방파제에 부딪혀 맥을 못추곤 한다. 지금 다중의 예술의지는 자본주의의 돈벌이에 접합돼 끌려가는 상태다. 이 접합을 끊은 뒤 자신의 생명을 돌보고, 삶을 배려하는 기술을 회복할 수 있을지 여부가 예술 진화의 핵심 문제다.” 


-촛불집회는 예술의지가 발현된 사례인가.

“촛불집회는 경제인간으로 접합됐던 사람들이 저항의 방식으로 탈주한 순간을 보여줬다. 유모차를 끌고 집회에 나온 주부를 떠올려보자. 주부는 가정에서 남편, 사회의 명령을 받았다. ‘오늘 저녁 된장찌개를 끓여놓으라.’ 이 명령에 꼼짝 못하게 묶여있던 개인들이 혁명의 순간을 맞이했다. 자기를 제약하는 모든 조건과 싸웠다. 지금까지 잠식되고, 감추어지고, 불완전연소된 예술의지가 그 순간 나타났다. 이는 위대한 예술가가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낸 순간과 다를 바 없다.”



다중지성의 정원을 이끌고 있는 조정환 대표/ 강윤중 기자


-개인이 이처럼 드물게 찾아오는 격변의 순간을 기다리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세월호 사건에서 가족대책위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한국에서 가족은 항상 보수적, 반동적이었다. 1980년대에도 가족들이 나타나 ‘파업 깨고 돌아오라’고 말하면 깨졌다. 그때 가족은 경찰보다 더 경찰 역할을 했다. 세월호의 가족은 달랐다. 죽은 304명 앞에서 가족들이 보여준 감수성, 정직성, 그에 충실하려는 노력, 이것을 사회에 알린 전파력…. 지금까지 ‘진실’은 상투화된 말이었다. 그러나 가족대책위가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하면서, ‘진실’은 반짝이는 말로 닦였다. 이제 ‘진실’은 수많은 생명과 합쳐져 천근만근의 무게를 가진 말이 됐다. 물론 촛불집회, 세월호는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 사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삶에 충실하고, 그 정직성에 직면해야 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삶을 양보한다. 부모가 시키는대로 하고, 국가의 명령에 따른다. 하지만 시스템에 복종하지 말고, 끈덕지게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때 일상 속에 촛불이 빛나고,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을 좌파식 자기계발로 이해해도 되나. 

"자기계발이란 말을 쓰길 꺼리지 않는다. 좌파들은 자기계발의 논리를 비난하지만, 각 개인이 건강 돌보는 것은 행복한 사회를 이루는데 결정적 문제다. 다만 현재의 자기계발은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갖기 위한 건강을 추구하는 것이지, 삶에 충실한 건강을 추구하진 않는다. 수영선수가 남성 호르몬을 투입하면 근력이 건강해지지만, 그 사람의 삶은 건강해지기는커녕 희생된다. 부자가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병원 다니면서 몸 튼튼하고 근육 만드는 것이 건강한 것인가. 오히려 그것은 질병이다. 현대의 건강은 보양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양기를 돋워 머리가 팡팡 돌아가게 하고 힘이 세지게 한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몸 좋고 힘 있는 상태를 만들 순 있지만, 이를 위해 음기는 희생된다. 이는 양기에 대한 편집증이다. 병들어도 약먹고 출근하는게 현실이다. 그래서 진짜 건강에 충실하다는 것은 무서운 싸움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건강에 충실하자는 것은 삶에 충실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 예술은 어떻게 보나. 

“제도 예술에도 드물게 삶에 충실한 작품이 있다. 백남준, 민중예술, 발자크, 톨스토이, 1930년대의 아방가르드, 황석영, 박노해…. 이렇게 드물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은 제도가 요구하는 흐름을 위반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예술가’는 특권과 자격의 이름이다. 우리는 ‘예술가’라는 특수 집단에게 ‘예술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양도하고 있다. 난 사람 모두에게 정치능력이 있다고 본다. 이 세상을 진단하고,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아서 실행하는 능력. 그러나 투표를 통해 정치인에게 그 능력을 양도한 뒤 4~5년간 꼼짝 못하고 살아간다. 우리가 정말 못해서 못하는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난 못해’라고 말하는 사람 속에는 지금 예술가라 불리는 사람보다 더 활기찬 에너지가 잠재해 있다고 왜 말하지 못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