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에 미학적인 전환점은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의 문예 영화다. 보고 나면 미학적 충격보다는 교양이 쌓이는 종류의 영화. 숙련된 배우와 안정된 연출이 어울렸다. 원작 소설의 번역자가 의외의 분이라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나저나 톨스토이 읽는다고 말만하고 아직 실천 안하고 있다. 읽으면 일단 <안나 카레니나>보다는 <전쟁과 평화>부터.
지난달 20일은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세상을 뜬 지 100년째 된 날이었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러시아가 낳은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톨스토이지만, 러시아에선 이상하리만치 아무 일 없이 톨스토이 100주기가 넘어갔다고 한다. 방송사에선 특집방송을 방영하지 않았고, 국립박물관에는 기념전이 없었다.
1999년 알렉산데르 푸슈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푸슈킨의 날’을 지정할 만큼 요란했던 것과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현대 러시아는 왜 톨스토이를 잊으려 하는가.
15일 개봉을 앞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을 보면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미국 출신 작가 제이 파리니의 전기소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원제 The Last Station)에 기반한다. 소설 원제는 톨스토이가 숨을 거둔 러시아의 시골 간이역 아스타포보를 뜻한다.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문학사에서도 손꼽히는 ‘악처’로 알려져 있지만, 영화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80대에 이른 노년의 부부가 민망할 정도로 서로를 아끼며 사랑해주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러시아인들이 “우리에게는 차르가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니콜라이 2세이며, 또 한 사람은 레프 톨스토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톨스토이는 당대에 이미 ‘살아있는 성자’였다. 하지만 침실 안의 톨스토이는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동물 흉내를 서슴지 않는 다정한 남자였다.
갈등은 이른바 ‘톨스토이주의자’들이 부부의 사이에 끼어들면서 발생한다. 무소유, 채식, 금욕 등 톨스토이 만년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톨스토이 공동체’가 있었고, 그중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는 스승 톨스토이의 사상을 온 인민에게 퍼뜨리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톨스토이의 새 개인 비서로 채용된 청년 발렌틴의 시선으로 톨스토이-소피아-체르트코프의 갈등이 드러난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지치지 않는 체력을 유지했으며, 소피아와의 사이에 13명의 아이를 낳았고, 젊은 시절 대단한 바람둥이였던 톨스토이였지만, 만년의 그는 자신의 복과 성취를 모두 부정하기에 이른다. 1908년 7월25일 일기에는 “이 더럽고 죄많은 재산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고 적었다.
평론가들은 만년의 톨스토이가 ‘예술가’에서 ‘현자’로 변신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영화는 톨스토이에 대한 교조적 해석을 거부한다. 톨스토이는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자는 체르트코프의 제안과 “평생 헌신한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소피아의 한탄 사이에서 갈등한다.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필체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기에 <전쟁과 평화>를 6번이나 베껴 썼다고 얘기한다. 톨스토이주의자들의 엄격한 태도에 대해 톨스토이는 “나는 만족스러운 톨스토이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농담같이 얘기한다. 칼 마르스크의 “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개인적 정과 보편적 사상 사이에 번민하던 톨스토이는 결국 집을 떠나 목적 없는 방랑길에 오른다. 그리고 불과 10일 뒤, 간이역 아스타포보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둔다. 영화는 톨스토이가 소피아와 마지막으로 눈을 맞춘 뒤에야 숨을 거뒀고, 발렌틴 역시 연인을 되찾는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개인과 보편의 화해를 제안한다.
제임스 맥어보이, 헬렌 미렌, 크리스토퍼 플러머, 폴 지아미티 등 연기력과 개성을 두루 갖춘 배우들이 열연하고, 마이클 호프만 감독이 연출했다.
다시 현대 러시아의 상황. 러시아는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유치했고, 2018년 월드컵 개최권까지 가져갔다.
한때 사회주의권의 맹주였던 러시아는 석유재벌들의 발호와 함께 노골적인 자본주의 물결에 휩싸여 있다. 오늘의 러시아가 비폭력, 금욕, 무소유를 강조한 톨스토이를 기리기 어려운 이유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톨스토이는 위험 인물인 셈이다.
1999년 알렉산데르 푸슈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푸슈킨의 날’을 지정할 만큼 요란했던 것과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현대 러시아는 왜 톨스토이를 잊으려 하는가.
15일 개봉을 앞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을 보면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미국 출신 작가 제이 파리니의 전기소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원제 The Last Station)에 기반한다. 소설 원제는 톨스토이가 숨을 거둔 러시아의 시골 간이역 아스타포보를 뜻한다.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문학사에서도 손꼽히는 ‘악처’로 알려져 있지만, 영화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80대에 이른 노년의 부부가 민망할 정도로 서로를 아끼며 사랑해주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러시아인들이 “우리에게는 차르가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니콜라이 2세이며, 또 한 사람은 레프 톨스토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톨스토이는 당대에 이미 ‘살아있는 성자’였다. 하지만 침실 안의 톨스토이는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동물 흉내를 서슴지 않는 다정한 남자였다.
갈등은 이른바 ‘톨스토이주의자’들이 부부의 사이에 끼어들면서 발생한다. 무소유, 채식, 금욕 등 톨스토이 만년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톨스토이 공동체’가 있었고, 그중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는 스승 톨스토이의 사상을 온 인민에게 퍼뜨리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톨스토이의 새 개인 비서로 채용된 청년 발렌틴의 시선으로 톨스토이-소피아-체르트코프의 갈등이 드러난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지치지 않는 체력을 유지했으며, 소피아와의 사이에 13명의 아이를 낳았고, 젊은 시절 대단한 바람둥이였던 톨스토이였지만, 만년의 그는 자신의 복과 성취를 모두 부정하기에 이른다. 1908년 7월25일 일기에는 “이 더럽고 죄많은 재산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고 적었다.
평론가들은 만년의 톨스토이가 ‘예술가’에서 ‘현자’로 변신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영화는 톨스토이에 대한 교조적 해석을 거부한다. 톨스토이는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자는 체르트코프의 제안과 “평생 헌신한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소피아의 한탄 사이에서 갈등한다.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필체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기에 <전쟁과 평화>를 6번이나 베껴 썼다고 얘기한다. 톨스토이주의자들의 엄격한 태도에 대해 톨스토이는 “나는 만족스러운 톨스토이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농담같이 얘기한다. 칼 마르스크의 “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개인적 정과 보편적 사상 사이에 번민하던 톨스토이는 결국 집을 떠나 목적 없는 방랑길에 오른다. 그리고 불과 10일 뒤, 간이역 아스타포보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둔다. 영화는 톨스토이가 소피아와 마지막으로 눈을 맞춘 뒤에야 숨을 거뒀고, 발렌틴 역시 연인을 되찾는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개인과 보편의 화해를 제안한다.
제임스 맥어보이, 헬렌 미렌, 크리스토퍼 플러머, 폴 지아미티 등 연기력과 개성을 두루 갖춘 배우들이 열연하고, 마이클 호프만 감독이 연출했다.
다시 현대 러시아의 상황. 러시아는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유치했고, 2018년 월드컵 개최권까지 가져갔다.
한때 사회주의권의 맹주였던 러시아는 석유재벌들의 발호와 함께 노골적인 자본주의 물결에 휩싸여 있다. 오늘의 러시아가 비폭력, 금욕, 무소유를 강조한 톨스토이를 기리기 어려운 이유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톨스토이는 위험 인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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