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의 자서전을 읽은 김에 예술가의 자서전을 좀 더 들춰보고 싶어졌다. 서가를 둘러보니 패티 스미스의 <저스트 키즈>가 눈에 띄었다. 다 읽고 난 지금, "참 잘 챙겨두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동안 이 책을 읽지 않았던 이유는 패티 스미스의 음악에 대해 잘 모르거니와, 히피즘에 대해서도 별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스미스가 이 책에서 한때 연인이었던 로버트 메이플소프와의 관계를 주로 다룬다는 점에 대해서는 궁금했다. 난 메이플소프의 사진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이플소프는 게이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스미스와 연인이었다는 거지?)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저스트 키즈>는 '예술가'가 되길 원했으나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어떤 예술을 해야 하는지, 미래의 모습이 어떨지 아무 것도 모르는 두 젊은 남녀의 이야기다. 스미스와 메이플소프가 예술적, 상업적 성공을 거둔 뒤의 이야기는 매우 짧게만 언급된다.
예상과 달리 스미스의 가정 형편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여느 펑크 로커들에게 필수적인 아이템, 즉 증오해야할 마땅할 부모, 교사는 없었다. 스미스의 부모는 딸의 재능을 북돋워주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딸의 길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딸의 선택을 존중하고 아꼈다. 스미스는 그런 평범한 환경 속의 '자생적' 예술가였다. 스미스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립 교대에 진학했지만, 왠지 자기 자신이 교사가 될 것 같다고 여기지 못했다. 스미스는 매우 막연히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뉴욕으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거지꼴로 고생을 한다. 얼마간 노숙을 했고,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고, 성적으로 착취당할 뻔한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연히 메이플소프를 만나 곧바로 연인이 된다. 메이플소프 역시 스미스와 비슷하게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스미스와 다른 점은 메이플소프에겐 조금 더 카톨릭적인 배경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미스와 메이플소프의 젊은 나날은 그저 "배고프다"는 말로 요약해도 되겠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싸구려 숙소에 기거했으며, 먹을 것이 없으면 한 두 끼 정도 거르기 일쑤였다. 이 예술가 지망생들은 종종 미술관 데이트를 하기도 했는데, 입장권 두 장을 살 돈이 없어 한 명이 혼자 들어간 뒤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대에게 감상을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메이플소프는 한 서점에서 평소 좋아하는 블레이크의 동판화를 충동적으로 훔쳤는데, 스스로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 서점을 나오기 전 화장실에서 판화를 찣어 버렸다고 한다. 메이플소프는 그런 이야기를 하며 손을 덜덜 떨었다고 스미스는 회상한다. 홍상수식 표현을 빌리자면, 이 사람들, 참 착하고 예쁘다.
2006년, 리오데자네이루에서 열린 록 페스티벌 무대의 패티 스미스
스미스와 메이플소프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스미스는 주로 시를 쓰고 스케치도 했다. 메이플소프는 그림을 그리고 설치 작품도 만들었다. 가끔 손재주를 발휘해 공예를 하기도 했다. 이들이 처음 손댄 것은 훗날 그들이 유명해진 록음악, 사진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저스트 키즈>는 자신이 진짜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해가는 젊은이들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저스트 키즈'란 둘이 공원에 놀러나갔다가 한 노부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아내가 "저 커플을 찍어요. 예술가들인가봐요"라고 말하자, 남편은 "그냥 가자고. 그냥 애들이야(Just Kids)"라고 말한다.
스미스와 메이플소프의 성공은 대부분 그들의 노력에 기인한다. 앞날이 짙은 안개처럼 불투명하고 어디에서도 불빛이 비치지 않을 때, 둘은 오직 내면의 재능에 귀기울이고 서로를 독려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들에게 유일한 행운이 있다면 그것은 몇 편의 포트폴리오를 맡긴 댓가로 첼시 호텔에 방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여러 방면의 예술가들이 저마다 자신의 취향대로 방을 꾸민 채 살아가는 곳이었고, 인근의 바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출몰했다. 이들은 재니스 조플린, 앤디 워홀을 비롯해 당대 예술의 핵심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진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들의 가치를 알려나간다. 아니다. 그러고보니 첼시 호텔에 머문 것은 단순히 '행운'이 아니다. 스스로를 갈고 닦지도, 존중하지도 않은 게으름뱅이가 첼시 호텔에서 방을 얻을 수 있었을 리 없으며, 설령 첼시 호텔 주변을 어정거렸다해도 까다로운 예술가들이 그런 게으름뱅이를 자신들의 무리에 끼워줬을리가 없을테니까.
메이플소프가 스미스와 동거하는 이성애자였다가 동성을 사랑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과정도 그려져있다. (이 대목에서 메이플소프의 성정체성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메이플소프가 곁에 사랑하는 여인 스미스를 두고서도 남성의 몸을 그리워하는 순간은 마치 보름달이 뜬 날의 늑대인간처럼 그려진다. 둘은 동거를 그만둔 뒤에도 서로의 예술에 대한 가장 신실한 지지자로 남았는데, 그래서인지 스미스는 메이플소프가 다른 남자를 사귀기 시작한 때보다 메이플소프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조금 더 슬퍼한다. 스미스는 "로버트의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관찰하자니 감정이 복잡했다. 우리 둘만의 세계가 무너졌다고 느꼈다"고 썼다.
메이플소프의 자화상. 1980
헤어지는 순간의 묘사가 쌉싸레하다. 멜로영화의 엔딩을 이렇게 그린다면 근사할 것이다.
로버트와 난 내 작업실 한구석에 단둘이 서 있었다. 방을 비울 때 신의 가호를 빌며 와인을 남겨두듯이, 나는 바퀴 달린 양 인형과 낙하산 소재로 만든 흰색 재킷을 남겨두고 벽에다 스텐실로 'PATTI SMITH 1946'이라고 문구를 새겨 넣었다. 우리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둘이서 함께 헤쳐온 날들, 좋은 날도 힘든 날도 있었지. 하지만 어느 정도 후련한 마음도 있었다. 로버트가 내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슬퍼?"
"준비됐어." 나는 대답했다.
스미스는 메이플소프와 헤어진 뒤에도 소울메이트처럼 지낸다. 스미스는 가정을 꾸렸고, 1남 1녀를 낳았으며, 남편이 1994년 사망한 뒤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메이플소프는 그보다 앞선 1989년 에이즈에 이은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43세때였다. 메이플소프는 죽기 전날 스미스에게 "우리 얘기를 책으로 써줄래?"라고 부탁했고, 스미스는 그 약속을 21년이 지난 2010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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