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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에서의 오후, <우리나무 백가지>



이 인터뷰를 위해 20년 전에 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나무 백 가지>를 책장에서 찾아봤다. 책 뒤편엔 대학 구내서점 영수증이 붙어있었다. 아직 그 서점이 '슬기샘'이란 이름을 쓰는지 모르겠다. 왠지 '위즈덤 파운틴'같은 이름으로 바뀌었을 것 같다. (농담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기자 선배와 함께 국립수목원을 잠시 걸었다. 때마침 날이 흐려 다소 음산했다. 하지만 잘생긴 나무 사이를 걷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인터뷰이나, 인터뷰이에게 안내해준 연구사 모두 사람이 좋아 보였다. 둘 다 국립수목원에서 20년, 10년은 근무한 이들이었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난 그들이 '식물적 인간'이라 느꼈다. 사진 선배는 "수녀 같다"고 평했다.  





1995년 나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 가지>(현암사)는 식물학 도서로는 이례적으로 19쇄를 찍은 스테디 셀러였다. 일본, 유럽에서 들여온 도감류가 전부였던 국내 출판계에서 ‘우리 나무’ 이야기가 대중에게 다가선 순간이었다. 10년 뒤 개정판에 이어, 20년 뒤인 최근에는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20년전 국립수목원 연구사였던 저자 이유미씨(53)는 지난해 국립수목원장이 됐다. 국립수목원 최초의 여성 수장이자, 첫 자체 승진 사례다. 그는 “20년간 수목원으로 오는 전나무 길을 따라 출근했지만 매일 아침이 다르다. 안개낀 날이 좋고 눈이 와도 좋다”고 했다. 이유미 원장을 최근 국립수목원에서 만났다.


“글을 쓰기 이전엔 나무와 머리로 만났다면, 글을 쓰면서는 마음으로 만났어요. 100가지 나무 하나 하나와 사연을 공유하고, 감정을 이입했습니다. 식물학자들은 일생에 참 많은 식물을 만나지만, 그렇게 고민하는 시간을 좀처럼 갖지 못합니다. <우리 나무 백 가지>는 제 인생을 바꾼 책입니다.”


책은 저자뿐아니라 다른 이의 인생도 바꿨다. 이 책을 읽고 숲해설가 혹은 식물학자가 되기로 한 이도 많다. 출판계에서도 <우리 나무 백 가지> 이후 대중을 위한 식물학 도서들이 잇달아 출간됐다. 이 원장은 “내 책에 영향받아 진로를 정했다는 이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면서도 “평생 접해야할 대상이 자연이라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 나무’라는 명칭을 쓰긴 했지만, 자생종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이 땅에 들어와 그 정서까지 우리 것처럼 변한 나무들도 포함되는 넓은 의미의 ‘우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명백히 ‘우리 나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과거 어느 시점에는 외래종이었다. 나무에는 국적이 없다. 다만 일본에서 최고의 목재로 쳐 황실에서 사용하는 편백나무,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왕벚꽃 등에 ‘우리’라는 말을 붙이긴 애매하다. 이 원장은 “편백은 우리나라에서 더디 자라 더 질이 좋다고 한다”며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나무 백 가지>의 저자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강윤중 기자


책에 대한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출판사의 시리즈 명인 ‘백 가지’에 맞추느라 아쉽게 탈락한 나무들도 있기 때문이다. “회화나무가 빠져서 못내 마음에 걸렸어요. 개정판에서 넣으려는 생각도 했지만, 다른 나무를 빼낼 수도 없고….”


개정증보판에는 20년 사이 우리 나무들이 겪은 변화상도 기록됐다. 95년판에는 옛 기록에 따라 ‘(능소화의) 수술 끝에 달리는 꽃가루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있으므로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독자들로부터 “한여름에 아름다운 능소화를 보다가 눈이 멀 수도 있는 것이냐”는 문의가 잇달았다. 국립수목원 연구진이 꽃가루를 관찰하고 독성을 분석한 결과 능소화의 안전성이 밝혀져 내용을 수정했다. 20년 전에는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가 최고 인기 가로수였는데, 요즘엔 은행나무에 자리를 내줬다. 산개나리는 자생지를 찾지 못했으나 그 사이 군락을 발견했다. 조선 정조가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제264호 용주사 회양목은 노쇠해 줄기와 잎을 대부분 잃은 뒤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됐다.


<우리 나무 백 가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지난 20년 사이 나무와 숲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분명하다. 요즘은 숲에 대한 관심을 넘어 정원 가꾸기도 유행할 조짐이라고 한다. 이 원장은 “가만히 서서 나무를 바라보기만 해도 위로, 영감, 휴식을 얻을 수 있다”며 “우리 삶에 나무를 들여놓는 일은 정말 특별하다”고 말했다. 





‘가장 마음이 가는 나무’를 꼽아달라고 하니, “자주 듣지만 참 곤란한 질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원장은 몇 마디를 보탰다.


“나무가 어디에 어떻게 서있느냐에 따라 다르죠. 어제는 갈참나무의 가을빛이 나를 사로잡더니, 오늘은 창밖에 내다보이는 소나무가 좋고…. 전나무는 크게 자라는 나무인데, 봄이면 연한 연두빛 새순이 그렇게 섬세할 수 없어요. 노각나무는 동백나무처럼 하얀 꽃이 피는데 흔히 만날 순 없지만 정말 좋습니다. 남산에 가면 종종 만나는 때죽나무는 작은 종처럼 생긴 하얀 꽃들이 수줍게 흔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