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P 호건의 1983년작 SF '생명창조자의 율법'(폴라북스)을 읽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중세 지구 수준의 문명을 갖춘 로봇 생태계가 발견된다는 전제가 흥미롭다. 폰 노이만의 무한 자기복제기계 개념에 근거해 타이탄에서 스스로 진화하고 번식한 기계 생태계를 묘사하는 프롤로그가 얼마나 정확한지 궁금하기도 하다.
발달한 지구인과 그에 뒤쳐진 기계의 구도는 제국주의 서구와 피식민지 비서구 구도의 명확한 패러디다. 제국주의 정책을 편 서구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적, 정치적 움직임이 있었듯, 지구인들 중에서도 '탈로이드'(타이탄의 기계 개체를 이렇게 부른다) 세계를 전적인 자원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이 있고 탈로이드를 독자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해야할 개체로 보는 이들이 있다. 지동설이나 훗날의 진화론이 종교 기득권층의 탄압을 받았듯, 탈로이드 세계에서도 실험과 관찰과 논리적 추론에 근거한 사유는 배척받는다. 억압적인 국가, 비교적 자유롭게 사상을 보장하는 국가, 과학자 탈로이드, 종교 탈로이드 등이 엮여 펼치는 갈등이 다른 한 축이다.
다만 지구의 중세를 패러디한 탈로이드 세계의 묘사에는 패러디 이상의 새로운 통찰은 없어 보인다. 인간이 기계로, 지구가 타이탄으로 바뀌어 서술될 뿐이다. 모세가 십계를 받는 장면의 묘사도 조금 웃길 뿐이다. 기적과 영성을 믿고 경전의 문자적 해석에 치중하는 한 탈로이드가 결국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전개는 '역시 SF는 과학의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유리 겔라를 연상케하는, 심령술사를 자처하는 잠벤도르프를 지구인측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독특하다. 잠벤도르프는 물론 진짜 초능력을 가진 건 아니고, 유능한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피관찰자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많이 모으는 능력, 이를 대중 앞에 극적으로 연출하는 능력을 가진 엔터테이너다. 우주탐사 기업의 진짜 목적을 안 잠벤도르프는 탈로이드를 이해하고 그들을 도우려 한다. 작가는 초능력, 영성, 종교의 힘 등은 믿지 않는 대신, 이미지 연출이나 여론의 중요성은 강조하고 있다. 초능력자가 아니라 그 어떤 권위 있는 종교인이라도, 결국은 인간의 논리적 취약성, 결핍, 의존성을 이용하는 엔터테이너라고 여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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