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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이 된 철학자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


1949년 12월4일자 동아일보에는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는 육군총참모장의 발언이 보도됐다. 이것이 해방공간에 월북했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와 무장 투쟁을 벌인 한 빨치산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그러나 그는 빨치산이기 이전에 철학자였다. 박치우(사진)는 이후 한국 철학계의 거두로 자리 잡은 박종홍(1903~1976)과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제5회 동기였으며,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몰래 복사해 돌려 읽던 마르크스주의 철학서 <사상과 현실>의 저자였다.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철학자 박치우의 삶과 사상을 본격적으로 살핀 책이 처음으로 나왔다. 위상복 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도서출판 길)이다.

박치우는 1909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개신교 목사 박창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함경도 벽촌, 시베리아 등지에서 전도 활동을 하면서 박치우는 넉넉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8년 박치우는 당시 조선 최고의 수재들이 모였던 경성제대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다. 박종홍, 훗날 6대 국회의원과 전북대 총장을 지낸 고형곤 등이 그의 철학과 졸업 동기였다. 그는 평양숭의실업전문학교 교수, 조선일보 기자 등을 거치며 전체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쓰다가, 일제 말기 중국으로 건너간 뒤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경성제대 시절 박치우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받아들였다. 1930년대의 전 세계적 경제 대공황, 일본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군국주의 세력의 발흥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는 가장 강력한 비판의 무기였다.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조선의 문제를 식민주의로 파악했을 때, 박치우는 전체주의적 파시즘을 경고했다. 아울러 부르주아 민주주의 역시 전체주의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했다.

박치우의 ‘합리주의적 이성에 근거한 변증법’은 박종홍의 ‘비합리주의적 실존철학’과 대조를 이뤘다. 박치우의 변증법이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작동했다면, 박종홍의 변증법은 ‘전체주의적 사생결단’의 논리 속에 잠적했다. 

북으로 간 박치우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완성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가 40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고, 남한에 남은 박종홍은 국민교육헌장을 만든 유신체제의 이데올로그로 살아남았다. 

박치우의 유일한 저서인 <사상과 현실>(1946)에는 “진리의 탐구라는 것이 곧 학자 자신의 일신상의 이익만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이 같은 용의와 결의에는 어느 의미에서는 순교자의 그것과 흡사한 비장한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1946년 월북한 박치우는 해주제일인쇄소에서 일하다가 1949년 8월 ‘붓의 실천’이 아닌 ‘총의 실천’을 위해 ‘인민유격대’의 일원으로 다시 남하했다. 그리고 3개월 뒤 태백산 자락에서 숨을 거뒀다. 위상복 교수는 “그(박치우)는 이론과 실천을, 철학과 사상을,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분리하지 않고 통일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며, 그것을 변증법이라고 불렀다”고 적었다.

 <사상과 현실>의 1980년대 복사판과 1946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