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혼자 로마 시내를 돌아다녔다. 티볼리 같은 외곽지로 나가볼 생각도 했으나, 겨울이라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시내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경우 로마 시내에서의 첫 행선지는 대개 콜로세오(라틴어로는 콜로세움, 현재 이탈리아어 표기는 콜로세오)가 될 것이다.
포로 로마노는 오래된 돌무더기. 이런저런 신전들이 있고, 카이사르의 화장터가 있고, 황제가 아내를 위해 지은 궁전이 있고, 여러 개의 개선문이 있다. 불에 그을리고 진흙이 묻고 비에 젖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손길을 탄 고대의 돌무더기. 고대 로마인들이 토가를 걸치고 오가는 모습이 영화의 오버랩 기법처럼 보였다. 돌 무더기가 너무너무 많아 대리석상 목 하나 자르거나 건물의 벽돌 하나 훔쳐 가방에 넣고 와도 티 안날 정도. 대체 저 신전 기둥들은 어떻게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걸까.
트레비 분수는 뭐 굳이 가볼 필요 있나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좋았다. 저녁 무렵의 분위기가 운치 있었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나도 즐거워졌다. 시스틴 성당의 프레스코화, 카라바지오의 유화, 피에타상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지만, 트레비 분수를 보면서는 무표정한 사람이 없었다. 그 왁자지껄함과 떠들석함에 기분이 들떴다. 웃음소리, 카메라 셔터 소리, 물소리가 어울린 풍경. 롯데백화점 잠실점 지하의 유사 트레비 분수와 다른 점은 그 규모나 모양새가 아닌 흥겨운 분위기일터다.
카라바지오는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악당이었다. 성폭행, 폭력, 절도는 익숙한 일이었는데, 매번 유력자들이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는 대가로 보석금을 내주고 석방시켰다. 그렇지만 결국 카라바지오는 살인까지 저질러 멀리 탈출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개차반의 인생을 산 인간이 성스러움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손길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회화사의 아이러니다. 훗날 렘브란트 등이 카라바지오 풍의 빛의 사용법을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렘브란트는 어디까지나 세속화가. 카라바지오의 빛이 천상에 닿는다면, 렘브란트의 빛은 지상에 머문다. 이왕 노예일바에 귀족이나 부자의 노예보다는 신의 노예가 낫겠다.
아그리파가 지은 판테온은 그리스의 여러 신을 한꺼번에 모신 신전이었는데,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 유일신을 위한 신전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헐지 않은게 다행이다) 성 베드로 광장이나 나보나 광장에는 저런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이집트의 신을 위한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위에 십자가를 꽂아놓고 기독교식으로 전용했다. 응용력이라 해야 하나, 오만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저런 광장이 시내 곳곳에 있다는 건 부러운 일이다. 대형 잔디밭이나 중앙 분리대가 아닌 진짜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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