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텍스트

금욕의 왕 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

톨스토이에 대해선 그의 교훈적이고 종교적인 우화와 말년의 자족적 공동체 생활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의 두 거두로 대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꼽지만, 왠지 요즘의 트렌드는 도스토예프스키 쪽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성스러운톨스토이보다는, 차르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나고 훗날엔 도박빚에 쪼들리며 소설을 써나갔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이 더 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몇 편을 읽어 보았으나 솔직히 말해 그다지 깊숙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랬고, 얼마전 읽다가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집어치운 <지하생활자의 수기>도 그랬다. 아, 단편집 <백야>도 읽긴 했다. 기억 나지 않긴 하지만. 


그러나 톨스토이는 달랐다. 우선 <안나 카레니나>. 한국에서도 3권의 분책으로 나올 정도로 긴데다가, 훗날 톨스토이 자신의 삶을 예견하는 듯한 레빈의 계몽 사상과 농민 운동에 대한 애착이 조금 기대밖이긴 했다. 허나 안나 카레니나, 집밖에서 보기엔 번듯하지만 집안에서 보면 참으로도 재미없는 안나의 남편, 그 사이에 끼어든 젊고 멋진 귀족 브론스키의 삼각 관계 구도는 <일리아드>의 헬레나, 메날라오스, 파리스(영화에선 올란도 블룸!)에서 시작해 수많은 스토리텔러들이 우려먹고 또 우려먹었지만 또 우려먹을 수 있는 사골풍의 이야기 아니던가. 물론 브론스키나 파리스보다는 안나 남편이나 메넬라오스에 가까운, 즉 그다지 별볼일 없는 남편에 속하는 나같은 독자들에겐 이런 이야기의 인기가 달가울 것이 없긴 하다.






영화에서 안나 카레니나 역을 맡은 여배우들. 위로부터 그레타 가르보(1935), 비비안 리(1948), 소피 마르소(1997), 키라 나이틀리(2012)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김에 톨스토이의 애정, 결혼관이 담긴 또다른 중단편집을 읽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여기엔 4편의 작품이 담겨 있는데, 난 초기작인 <가정의 행복><크로이체르 소나타>만 읽었다. <악마>는 미완성작이란 설명에 그만두었고, <신부 세르게이> 역시 그냥 건너 뛰었다. 톨스토이 말고도 읽을 책이 좀 있기 때문에.


<가정의 행복>을 쓴 것은 톨스토이가 31세였던 1859년. 펭귄클래식판의 서문을 쓴 도나 터싱 오윈은 톨스토이가 이 책을 썼을 때 가정 생활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톨스토이조차 훗날 이 작품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하는데, 이유는 여주인공 마샤의 갑작스러운 '회심'이 작위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 분석한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을 썼을 떄의 톨스토이는 인생을 잘 모르는 풋내기였다는 이야기. 


인생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내가 알 방법은 없지만, 캐릭터가 다소 딱딱하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인물들이 작가의 통제력을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기보다는, 작가의 뜻을 충실히 체현하는데 그친다. 마샤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뻘인 남자 세르게이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데, 결혼식을 치르면서도 그 순간이 자신이 꿈꾸었던 것에 미치지 못하자 어딘지 "굴욕적이고 모욕적"으로 느끼는가 하면, 결혼 이후 단 두 달만에 신혼 초기의 흥분이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시골에서의 목가적인 삶과 반복되는 생활에 만족하기에 마샤는 너무 젊거나 어렸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는 남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믿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또다른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샤는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남편 세르게이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화려한 사교계가 있는 페테르부르크로의 이주를 결심한다. 


마샤는 사교계에서 새로운 사람(남자)을 만나 삶의 활력을 찾지만, 세르게이는 그렇지 않았다. 둘에게는 "묻지 않고 접어두는 질문들"이 생기고, "둘이서만 마주하고 있을 때보다 남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는 게 더 편해"지는 상황에 이른다. 둘 사이에는 더 이상의 실랑이, 다툼이 벌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평화'가 그들 관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린 부부는 다시 시골의 영지로 내려온다. 세르게이는 언제나처럼 좋지만 무심한 남편이다. 마샤는 "어째서 당신은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자유를 주셨나요?"라고 외치지만, 세르게이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단 말이야?"라고 놀라 되묻는다. 바로 옆에서 자는 사람의 마음 속에 이는 태풍을 이 남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세르게이는 "우리 모두, 특히 당신 같은 여성은 진정한 참된 삶을 살기 위해 인생의 무의미한 면을 실제로 겪을 필요가 있어"라고 말한다. 마샤는 이후 두어 쪽만에 회심해 가정의 전통적 미덕에 충실하기로 한다. 마샤의 입을 빌려 톨스토이는 말한다. "이날부터 남편과 나의 로맨스는 끝이 났다. 예전의 감정은 귀중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추억으로 남게 되었고,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생겨났다. 이 감정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전혀 다르게 행복한 삶의 기반이 되었다."


<가정의 행복>이 마샤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면, <크로이체르 소나타>(1889)는 외간 남자와 아슬아슬한 유희를 벌인 부인을 응징한 남편 포즈드니셰프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이 남편은 부부 사이조차 금욕을 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톨스토이는 포즈드니셰프의 주장을 액자 안에 배치하는 구성으로 다소 거리를 두긴 하지만, 소설의 후기에서 자신이 포즈드니셰프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연보나 전기를 보면 남편의 성스러운 공동체 생활을 이해못한 채 저작권료 타령이나 해대는 부인이 '악처'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은 많은 부분 타인에 대한 반응을 통해 나타나며, 특히 함께 사는 부부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숲을 산책하며 욕망을 다스리고 계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


 

  • 김섬 2014.04.08 01:20

    특히 마지막 문구,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남들에게는 한없이 유순하고 성실한 남편이 진작 아내에게는 독선적인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우선, 남들에게(시댁포함) 돈과 귀한 물건들을 빌려주고는 받을 생각을 못합니다. 즉, 상대방이 자진해서 돌려주지 않으면 죽어도 돌려달라는 말을 못합니다. 이것이 한두번이지, 20년넘도록 내내 이러면 아내는 이미 속이 터져있지요.
    남편이 이러면 때때로 아내가 나서서 말을 해야하는 경우가 종종 생길수밖에 없는데, 그려면 또 나서지 말라고 난리입니다. 아내만 이리저리 속이 상하지요.
    이런 남편 옆에서는 아무리 고운 여자라도 계속 그리 우아하게 살기가 정말 힘듭니다. 남들에게 좋은 사람, 아내에게는 속 좁고 독선적인 사람 많습니다.

  • 바스티안 2016.06.10 19:46

    윗분 말씀대로 남들에게는 박애 정신을 강조하는 톨스토이가 아내에게는 독선적이었죠. 톨스토이는 교훈적인 작품들과 달리 젊었을 때 방탕한 생활을 했고, 특히 성적으로 문란했어요. 사생아까지 있었구요. 그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했을 때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니 용서해줬죠. 심지어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차에서 성욕을 못 이기고 첫날밤도 치르기 전에 아내를 강간하기도 했구요.
    그리고 남편의 창작을 돕기 위해서 매일 몇 시간도 못 자면서 악필인 남편의 원고를 다시 필사하고 교정하고 정리했어요. 아이는 유모가 아니라 어머니가 직접 젖먹이고 키워야 한다는 톨스토이의 육아관 때문에 열세 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고 직접 젖먹이고 키웠구요. 이제 남편이 작품들로 명성과 부를 얻었으니 한숨 돌릴까 싶었는데, 갑자기 남편이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겠다고 한 거죠. 부인만 부와 영화에 집착해서 남편의 이상을 이해 못한 악처로 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