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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파커는 있는가, 위플래쉬




**스포일러 있음


<위플래쉬>는 말할 나위 없이 재미있는 영화다. 배우들이 열연하고, 줄거리가 간결하며, 무엇보다 편집이 기막히다. 마지막 공연 장면에선 손에 땀이 난다. 음악의 힘이 크지만, 이 리듬을 그대로 살려낸 편집도 대단하다. 드러머 앤드류와 지휘자 플레처를 번갈아 패닝해서 보여주는 테크닉은 어찌 보면 아마추어적인데, 이 영화에선 굉장히 잘 어울린다. 


정신 없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영화는 그러나 매우 고전적인 주제를 다룬다. '음악 천재' 이야기는 20세기도 아니라 19세기의 아이템이다. '예술 천재' 개념 자체가 19세기 낭만주의의 산물이니까. 그런 고전적인 주제를 그렸기 때문에 한국 관객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장대한 SF의 외피를 썼으나 부녀간의 사랑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다룬 <인터스텔라>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듯이. 


플레처는 천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다만 천재는 스스로가 천재임을 알지 못하거나, 재능을 일꺠우지 못한 상태다. 음악학교 내 최고의 밴드를 지휘하는 그는 학생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게 하기 위해 혹독하게 연습시킨다. 폭력, 인격 모욕은 기본이고 교활한 술책을 부리기도 한다. 학생들은 이 독재자 아래서 숨도 못쉬면서 연주한다. 그래야 최고의 연주자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련한 제자와 무시무시한 스승. 못 하면 맞음. 


플레처는 "그만하면 됐어"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말이라고 믿는다.(원어로는 'Good job'이었는데 번역을 적절하게 잘했다) 학생 연주자들은 플레처의 예민한 청각을 90% 이상 만족시킬 정도로 잘해야 욕을 안먹는다. 빨라도 혼나고 느려도 혼난다. 


플레처는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또다른 찰리 파커가 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원래 찰리 파커는 적당히 잘하는 연주자였다. 어느날 클럽 공연을 하던 파커는 관객 앞에서 공개 망신을 당한다. 그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드러머가 심벌을 냅다 파커에게 던지며 모욕을 줬다. 파커는 그날 이후 피나는 연습을 해 1년 뒤엔 최고의 연주자가 됐다. 플레처가 퍼붓는 언어적, 물리적 폭력은 모두 드러머가 파커에게 던진 심벌인 셈이다. 


여러가지 소동을 겪은 후 플레처는 다시 앤드류를 만난다. 플레처는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 중엔 '찰리 파커'가 없었으며, 요즘은 모두들 스타벅스 '재즈'만 듣는 통에 재즈가 쇠퇴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찰리 파커는 나타날 수 없거나 필요 없는 시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정신 나간 드러머


찰리 파커는 재즈가 덜 발달한 시대의 아이콘 아니었을까. 재즈의 광활한 신대륙에 점점이 도시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미개척지가 남아있던 시대. 그래서 목숨을 건 개척자들 중에서도 운이 좋은 이는 대단한 금맥을 발견해 후대에 새 도시의 건설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시대. 찰리 파커 이후 재즈는 너무나 많이 발전했다. 온갖 악기, 온갖 음향, 온갖 기법으로 재즈가 만들어졌다. 이제 더 할만한 게 있을까. 찰리 파커가 환생한다해도, 예전만큼의 영광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지구상에는 미지의 장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목숨 걸고 남극, 북극, 에베레스트에 가는 시대는 지났다. 앞선 탐험가보다 좀 더 새로운 루트를 개발하는 일만 남았을 뿐. 


노앨 갤러거는 작곡을 낚시에 비유했다고 한다. 내가 안 잡으면 보노나 크리스 마틴이 다 잡아간다고. 그러나 갤러거, 보노, 마틴 이전엔 폴 매카트니, 존 레논, 아바가 낚시를 했고, 더 이전엔 모차르트도 낚시를 했다. 이제 멜로디의 연못에서 대어를 낚는 건 매우 힘든 일이 됐다. 리듬이나 분위기로는 뭔가 새로운걸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멜로디로는 글쎄.


<위플래쉬>는 여전히 찰리 파커가 나타날 수 있다고 믿는 영화다. 많은 관객도 그렇게 믿는다. 실제로 영화는 앤드류가 일종의 '득음'을 하는 듯한 장면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당연하지. 소년은 죽도록 노력했으나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영화를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으니. 결말에 불만은 없다. 다만 난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한국적 맥락에서 <위플래쉬>를 "애들은 볶아야 공부를 잘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이봐요. 댁의 자식은 찰리 파커가 아니라고요. 



피칠갑하면서 드럼 치면 찰리 파커가 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