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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귀족적이면서 천한 집단의 탄생 <킹스맨>






(스포일러 재중)

요즘엔 머리가 터지고 팔 다리가 잘리는 영화는 잘 보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는 예외로 해야겠다. 초반부부터 대여섯 명을 순식간에 죽이거나 사람을 세로로 해 반으로 써는 장면이 나오더니, 종반부엔 소수 종파의 대량 학살극이 나오고 급기야 세계 권력자들의 머리가 집단으로 터져나가는 장면까지 나온다. 머리 터지는 장면은 마치 불꽃놀이처럼 그려진다. 심지어 화이트 하우스의 주인의 머리도 터진다. (한 인터뷰에서 매튜 본 감독은 그것이 버락 오바마를 특정한 것이 아니라, 정치인 일반에 대한 조롱이라고 강변했다.)


<킹스맨>은 전통적 스파이 영화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나이든 재단사가 맞춰준 멋진 수트를 입고, 전통적이면서 아름다운 구두를 신고, 위스키나 칵테일들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줄 알고, 기발한 첨단무기가 등장하고, 무엇보다 여성들과의 잠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스파이가 나오는 영화. 또 그에 어울리는 과대망상 악당이 등장하는 영화. 20세기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영국 스파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제임스 본드가 <킹스맨>의 반면교사이자 교본이다. 


아울러 <킹스맨>은 '영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과 조롱을 동시에 드러낸다. 어쩌면 자유민주주의사회와는 거리가 먼, 철저한 계급사회로서의 영국을 보여준다. 상류층은 하층민의 자질을 불신하고 그들의 존재를 멸시한다. 하층민은 그런 상류층을 아니꼬워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상류층이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상은 상, 하는 하. 그 둘은 그렇게 갈라져있다. 



수트를 잘 입는 상류층이 아무렇게나 입은 하층민을 시혜의 손길로 거둬들인다. 


이런 구도를 은근히 긍정하면서 상류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희생정신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그러나, 악당과 그의 추종세력을 드러내면서 달라진다. <킹스맨>에서 악당 역을 수행하는 발렌타인(사무엘 잭슨)은 미국 출신 IT 거물이다. 스냅백을 쓴 캐주얼한 복장으로 등장하는 그는 만찬에서 빅맥을 대접하는 매우 미국적인 인물이다. 미국 신흥 기업가들의 실용주의, 자신감 혹은 오만함, 혁신성, 이상주의를 모두 갖춘 그는 돈이 아니라 이상의 실현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발렌타인은 자신의 이상으로 전세계의 많은 권력자들을 설득한다. 거부, 정치인, 왕족 등이 그의 포섭 대상이다. 오바마와 뒤통수, 목소리가 닮은 사람도 발렌타인에게 설득된다. 


심지어 어떠한 국가, 관료제에도 포섭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활동을 해온 킹스맨의 수장(그 자신이 유명한 스파이 영화의 아이콘인 마이클 케인)도 발렌타인에게 동조한 것으로 드러난다. 발렌타인은 이들 권력자들을 안전한 장소에 모으거나 각자의 벙커에 숨어있게 한 채, 인류 절멸의 파티를 즐기려 한다. 발렌타인은 세계 인구가 줄어야 가이아인 지구가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류란 발렌타인이 무료로 배포한 유심칩을 장착한 중산층 이하 사람들이다. 이들은 발렌타인의 혁신적인 유십칩을 끼우면 무료 통화, 무료 인터넷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다는 소식에 혹해 애플의 구매자처럼 길게 줄을 서 유심칩을 받았다. 


신흥 권력자인 IT 그루와 옛 권력자인 정치인, 부자, 귀족 등의 연합. 스파이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지만 동시에 그 정체가 의문스러운 인물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 혹은 핵전쟁을 유발하려는 미치광이 군인들, 탈냉전 시기에는 아프리카 군벌, 중동의 테러리스트, 북한 지도자였다. <킹스맨>은 IT 거물을 악당으로 삼았다. 자연스럽다. 



스냅백을 쓴 악당 발렌타인. 한 마디로 미국 상놈. 


해리 하트(콜린 퍼스)는 충성, 헌신, 정의 등 옛 귀족의 가치를 체득한 인물이지만, 시대의 변화를 감지할 줄도 아는 인물이다.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매너를 익히면 상류층이든 하층민이든 신사가 될 수 있다는 뜻. 물론 상류층에게 매너를 익힐 기회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해리 하트에 의해 킹스맨 후보로 발탁된 말썽꾸러기 하층민 에그시(태런 에거튼)는 인류, 즉 중산층 이하 사람들을 구한 영웅이 된다. 그가 구세계 권력자들이 만든 비밀조직 킹스맨에 소속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킹스맨>은 그렇게 미국의 IT 거물, 정치인, 귀족, 부자들은 한 묶음으로 해 머리를 날려버린 뒤, 민중의 세상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을 한 것은 구체제의 유물 킹스맨이다. 스칸디나비아의 공주는 세계를 구한 하층민에게 자신의 뒤를 허락한다. 킹스맨은 스파이 영화 사상 가장 귀족스러우면서 가장 천한 집단이다. 콜린 퍼스를 어떻게든 살려내 2편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가 나말고도 또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