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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술먹고 노는 장면을 제일 잘찍는 감독, <북촌방향>의 홍상수

15년전엔 모더니스트 영화청년 같았는데, 지금은 도사같은 풍모의 홍상수 감독 인터뷰. 이런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어느덧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선 느낌이다. <북촌방향>의 카페 소설이 그런 공간. 실제로 문화계 한량들의 놀이터라지.


요즘 내 노트북 컴퓨터의 바탕화면으로 깔려 있는 스틸.


 

한국의 영화감독중 의뭉스럽기로 따지면 홍상수(51)만한 인물이 또 있을까. 술에 취한 채 쉽게 찍힌 듯한 어느 장면이 사실 50번의 테이크 끝에 얻어낸 것임을,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이지만 사실 그들이 받는 출연료는 거의 없음을, 굵고 뭉툭한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 속에 사실 인생에 대한 반짝이는 성찰이 숨어있음을, 아는 사람만 안다.

9월 8일 개봉하는 <북촌방향>은 그의 열두번째 장편이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해 1~2년에 한 편씩 작품을 내놓던 그는 최근엔 1년에 2편을 내놓을 정도로 다산하고 있다. 그는 이미 프랑스 최고의 여우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한 차기작 <다른 나라에서>의 촬영까지 마친 상태다. 어떤 배우들, 어떤 관객들을 ‘신흥종교에 감화된 신도’처럼 거느린 그를 24일 서울 압구정에서 만났다. 


-당신의 작품은 ‘최근작이 최고작’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미친놈도 아니고. 어떤 작품을 끝내면 ‘기분’이 있는데, 이번엔 나쁘지 않았다. 장르영화처럼 ‘이런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고 정해놓고 만들진 않는다. 다양한 반응이 있으면 그걸로 영화가 완성된다.”

-가수 백현진은 ‘술먹고 노는 장면은 홍상수가 제일 잘 찍는다’고 말했다.

“헛소리다. 술자리 장면이라고 특별히 생각하는 건 아니다. 골목길 장면, 밥먹는 장면과 마찬가지다. (밥먹을 때도 반주를 먹던데) 글쎄. 왜 그럴까.”

-전작들과 다른 방식으로 촬영했다고 들었다.

“제작방식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 방식이 다르면 생각해 나오는게 달라진다. <옥희의 영화>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구상이 없이 촬영을 시작했다. 이틀 전 정해 배우를 불러 1부를 찍고, 다시 정해 2부를 찍는 식이었다. 이번엔 그 방식을 더 밀고 나갔다. 전체적인 구상이 없이 첫날 찍고 둘째날 찍으니 틀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여기가 문제의 카페 소설. 여사장은 시도 떄도 없이 자리를 비우고, 손님들은 알아서 술을 꺼내 마신다.



-<북촌방향>에선 김보경이 1인2역을 한다. ‘두 여인’의 테마는 당신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내가 오만가지 인물 관계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내 삶에서 나온 것들이 새 배열을 찾고 새 표현방식을 찾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비슷한 방식이 반복되는 것이다. 영화에는 말로 집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덩어리들이 있다. 옛 여자와 닮은 여자를 찾는 것도 한 덩어리다. 그 덩어리는 우리가 피할 수 없고 공유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하는 영어 대사 영화다.

“파리에서 위페르를 본 적이 있다. 지나가는 말로 기회가 있으면 같이 해보자고 했는데, 이번에 위페르 사진전을 준비하기 위해 내한한다고 전화가 왔다. 낮에 점심 먹는데 데려갈데도 없어서 <오! 수정>과 <북촌방향>에 나온 고갈비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거기서 엉겁결에 출연하자고 얘기가 됐다.”

-갑자기 다작 감독이 됐다. 몇 편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나.

“그런 멍청한 목표가 있을 리가. 지금은 영화 만드는게 중요하고 좋다. 건강이 허락하는한 계속 만들고 싶다.”

-작품에 대한 영감이 마구 나오나.

“‘이 때쯤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든다. 예를 들어 가을에 바람 부는 제주도에서 뭔가 찍고 싶다는 생각이다. 거기 맞춰서 한 번 해보는거다.”

-영화, 책, 연극이 아닌, 주로 그림을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침대 위에 화집이 몇 권 있다. 세잔, 마티스, 렘브란트, 피카소… 멍하니 그림을 보면서 내가 이 그림을 왜 좋아할까 생각하는게 재미있다. 그렇게 두 세 장 보다가 잠든다.”

-요즘 영화는 잘 안보나.

“영화에도 원형이 된 분들이 있다. 그 분들을 접하고 내 나름대로 공부하는건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많이 했다. 이제 그 이상으로 레퍼런스가 될 사람이 나오진 않는 것 같다.”

-더 큰 규모의 영화를 할 욕구는 없나.

“그런 욕구가 잘 안키워진다. 영화는 내게 중요하고, 내가 아는 최선의 태도로 임해야 한다고 믿는다. 돈이나 명예는 부차적이다.”

-지금 행복한가.

“큐앤에이 끝낼 때 할 말 없으니까 ‘행복하세요’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그 말도 자주 하니까 마음이 무겁다. 강아지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가 점심까지 잘 먹었는데 뭐 하나 생각이 잘못 들어서 쓸쓸해지고….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건 몇 개 안된다. 영화에 임하는 태도가 그나마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거다. 싸구려로 안하면 언젠가 보답이 올거다. 나머지는 다 운이다.”

-요즘 당신 영화에 ‘착해서 좋아’라는 대사가 많이 나온다.

“제일 좋은 건 착한 사람이다. 우리들이 아기들 보고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아무리 머리가 헝크러져도 아기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슬금슬금 용기가 난다. 세상이 이렇다고 저렇다고 떠들지만 이런 착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힘이 난다.”

홍상수 감독/서성일 기자


■영화 <북촌방향>은?=지방에 살면서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는 감독 성준(유준상)은 서울에 놀러와 북촌에 사는 친한 선배 영호(김상중)에게 연락한다. 영호가 전화를 받지 않자 성준은 북촌을 배회하다가 예전에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옛 여자친구 집에 찾아가고, 마침내 영호 무리와 ‘소설’이라는 카페에서 술자리를 갖는다.

이 술자리는 기묘하다. 여러 차례 보이는 술자리는 하루에 일어난 일 같기도, 여러 날 반복해서 일어난 일 같기도 하다. ‘소설’은 시간이 뒤섞이는 마술같은 공간이다. 선형의 물리학 법칙에서 벗어나, 관객의 감각이 매혹적인 혼란에 빠지는 공간이다. 성준은 이곳에서 서툴게 피아노를 치고, 옛 애인을 닮은 카페 사장을 만나 동침하고, 마침내 탈출해 어딘가로 향한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부는 성준이 이 지루하고 비루한 삶의 궤도에 영원히 포박됐다고 말하는 듯하다. <오! 수정>에 이은 홍상수의 두 번째 흑백영화다.



유준상은 이날 촬영분량 대본 마지막에 눈이 내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촬영 전까지 눈이 전혀 오지 않았다고 했다. 감독이 어쩌려고 이렇게 썼나 했는데, 실제 촬영이 끝나갈 때쯤 눈이 왔다고 한다. 유준상은 "내가 살면서 정말 신비한 경험들이....말로는 표현을 못하는데, 같이 작업한 배우로서 너무나 큰 행복이었고 즐거움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은 이날 일기예보를 면밀히 체크한 끝에 이런 대본을 썼고, 촬영 내내 예보가 맞나 안맞나 노심초사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