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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의 성, 인종, 정치



아이하고 <주토피아> 더빙판 뒤늦게 봤다가 신기해서 써봤다. 아래와 같은 요소도 재미있었지만, '나무늘보 개그' 역시 대단했다. 



지난주 개봉한 <주토피아>는 디즈니사가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신임 경찰인 토끼 주디가 사기꾼 여우 닉과 함께 동물들의 대도시 주토피아에서 일어난 연쇄 실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눈이 얼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귀여운 토끼 캐릭터, 각 동물의 특성에 맞춰 아기자기하게 설계된 주토피아의 모습, 예상 가능한 결말 등이 전형적인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외로 <주토피아>에는 현실 세계를 경험한 성인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설정이 깔려 있다. 폭넓은 세대에게 재미를 안겨주는 할리우드 각본의 힘이다. 



각 종의 특성에 맞게 디자인된 주토피아의 교통수단

▲성차별

시골 출신 토끼 주디는 경찰이 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주디의 꿈을 이해하지 못한다. <주토피아> 속 세상에서 경찰은 주로 육식동물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은 주디는 경찰학교에 입학해 갖은 노력을 다한 뒤 수석 졸업의 영예를 얻는다. 주토피아 시장은 ‘최초의 토끼 경찰’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주디를 주토피아 경찰서에 발령낸다. 

하지만 주디의 경찰 생활은 첫날부터 녹록하지 않다. 경찰서 방문객을 맞이하는 치타 경찰관은 주디에게 “귀엽다”고 말한다. 주디는 “‘귀엽다’는 표현은 토끼끼리는 괜찮지만, 다른 종족이 토끼에게 하면 차별적인 표현”이라고 가볍게 항의한다. 경찰들이 모인 사무실의 구조도 호랑이, 곰 등 육식동물의 체형에 맞게 큼직해 주디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하루의 임무를 배치하는 자리에서 서장은 모든 경찰에게 관내에 발생한 의문의 실종사건을 맡기지만, 마지막 남은 주디에겐 주차단속을 시킨다. 주디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동물들의 가짜 낙원, 주토피아



주디 목소리를 연기한 성우는 여성, 육식동물은 대체로 남성이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 중심의 경찰 조직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내용은 남성중심 조직에서 동료로 인정받기는커녕 잔심부름을 하기 일쑤인 여성의 상황을 보여준다. 



▲인종차별

주디의 조력자가 되는 여우 닉은 소소한 사기꾼이다. 하지만 닉은 잘못에 비해 과도한 냉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닉은 아이스크림 가게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지만, 퉁명스러운 표정의 거대한 코끼리 점원은 “어떤 손님에게든 서비스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며 아이스크림을 팔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에게서 큰 도움을 받는 주디마저 ‘여우 퇴치기’를 들고 다닌다. 주토피아에서 여우는 ‘간사하고 교활한 동물’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고, 이는 닉과 같은 모든 개별 여우들에게 적용된다. 

<주토피아>에는 닉의 어린 시절이 짧게 회상된다. 어린 시절의 닉은 들뜬 마음으로 또래 친구들이 있는 스카우트단에 가입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닉에게 입마개를 씌운채 쫓아낸다. “우리가 육식동물을 믿을줄 알고?”라는 비웃음과 함께다. 어린 시절부터 종차별을 당해온 여우는 사회의 편견을 내면화해 그에 맞는 모습으로 활동한다.

주토피아 경찰서에서 고군분투하는 신임 경찰 주디 홉스

성차별 겪는 주디(왼쪽)와 인종차별 겪는 닉

<주토피아> 속 닉의 처지는 미국 사회의 흑인이나 히스패닉, 한국 사회의 동남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이 겪을 법한 편견을 보여준다. 



▲정치적 이상과 실천

주토피아의 사자 시장 라이언하트는 ‘모든 동물 함께 살아가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서로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어울려 살아가자는 내용이다. 시장의 보좌관 역시 육식동물이 아닌 순한 표정의 양 벨웨더다. 

하지만 시장이 자신의 이상을 생활 속에서 속속들이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시장은 보좌관을 무시하고 냉대하기 일쑤다. 사실 양을 보좌관으로 채용한 이유도 양 종족의 표를 얻기 위함이었다. 시장은 토끼 주디를 주토피아 경찰서에 발령내는 ‘진보적’ 결정을 내리지만, 주디가 경찰서에서 겪을 실제 어려움은 헤아리지 않는다. 

겉과 속이 다른 시장, 라이언하트

아무리 근사하고 거창한 정치적 이상이라도 그에 맞는 구체적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 없다는 점을 <주토피아>는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