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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혹은 순교, <신과 인간>

<2013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애 수록된 글


빛을 저렇게 찍어보고 싶다.  


1996317일 새벽, 알제리 산골 티브히린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이슬람무장단체 괴한들이 들이닥쳐 7명의 수사를 납치했다. 괴한들은 체포된 동료와 수사를 교환할 것을 요구했다. 523, 이슬람무장단체는 공식성명을 통해 이틀전 수사들을 죽였다고 발표했다. 알제리 정부는 31일 메데아의 한 길가에서 수사들의 수급을 발견했다.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배우, 감독인 자비에 보부아가 연출한 <신과 인간>은 이 사건을 다룬다. 허나 보부아는 사건의 전말이나 책임 소재 규명, 종교적 근본주의자의 만행 고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 분석, 복잡한 국제 관계의 해설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신과 인간>이 묘사한 전후 상황을 믿는다면, 수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할 시간이 충분했다. 이슬람무장단체가 갑자기 발흥한 것도 아니며, 알제리의 치안은 차츰 불안해지고 있었다. 수사들의 안전을 우려한 알제리 정부는 군인이 수도원을 경호하겠다고 제안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아예 프랑스로의 귀국을 권했다. 그러나 수사들은 이런 제안을 모두 뿌리치고 수도원에 남아 납치된 뒤 목숨을 잃었다. 어찌 보면 소극적 자살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왜 그랬을까. 보부아가 궁금해 하는 것은 그 부분이다.

 

수도원이 있는 마을은 가난하고 평화롭다. 수사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마을 공동체에 헌신해왔다. 환자에게 의술을 제공하고, 문맹자를 대신해 편지를 부쳐준다. 심지어 마을 처녀의 연애상담까지 해준다. 물론 수사의 본령은 신앙생활이다. 이들의 일과는 신을 섬기는데 종속돼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수사 8명은 함께 성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는다. 카메라는 끝간데 없이 조용하게 펼쳐진 산맥과 대지를 유유히 패닝하곤 한다. 마치 수백 년 전에도, 수백 년 후에도 이곳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장소라는 듯이.



마을 사람들과의 즐거웠던 한때. 


영화가 시작한 후 30분쯤이 지나면 이 평화가 곧 깨질 것임을 알리는 두려운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발흥해 테러를 일삼는다. 아무런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외국인 노동자의 목을 벤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젊은 여성을 칼로 찔러 죽인다. 자유롭게 사랑해도 좋다고 가르친 여교사를 살해한다. 물론 이들의 행동은 대다수 주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이슬람교도임을 자처하면서도 코란이 가르친 것을 행하지 않는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주민들은 불만과 두려움을 보인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근본주의자가 그러하듯, 이들에게도 주민의 공감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실천하면 그뿐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르듯, 종교적 열정에 의해 추동되는 악행은 쉽고 끔찍하다.


먼 옛날 서유럽의 제국주의가 뻗쳐나갔을 때 그 선두에 선 것 역시 종교인이었다. 십자가를 앞세운 그들은 미개한 이교도들을 구원의 빛으로 안내하겠다는 신념에 불탔다. 십자가 뒤로는 상인과 군인, 정치인이 따랐다. 이들은 식민지의 물자를 수탈하고 신민을 억압했다. 종교적 열정과 정치경제적 이해가 맞물려 거대한 악을 행했다.


그러나 <신과 인간>의 수사들은 다르다. 자신의 온 생애를 기독교의 신에게 바치기로 결심한 수사들이지만, 정작 이들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이들은 알제리의 시골 마을에 그저 산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일하고 봉사하고 어울리고 먹는다. 제국주의 시대의 구교도나 현대 한국의 신교도처럼 선교하려는 의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수사들의 리더인 크리스티앙은 심지어 코란을 공부한다. 현지 주민과의 대화 끝엔 인샬라를 붙이기도 한다. 목사가 성불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셈이니, 파격이다. 그러나 인샬라신의 뜻대로란 의미 아니었나. 이 유연한 카톨릭 수사에게 신이란 궁극의 선인 모양이다. 종파, 의식, 경전의 문자 같은 것은 그 선에 종속되니,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그 선을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모양이다.


수사는 신의 뜻을 따르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죽음이란 그 어떤 인간에게도 풀기 어려운 문제다. 외부가 강제한 죽음의 기미가 보일 때 동요하지 않는 인간은 드물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임박한 죽음 앞에 번민했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선 깊은 기도와 결단이 필요했다.


수사들은 고민하고 토의한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산다면 그것은 신의 뜻을 따르는 길인가. 죽는다면 그것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떠나자고 한 수사들은 말한다. “난 살려고 수사가 됐지 죽으려고 된 것이 아니다.” “난 집단 자살에 가담할 생각이 없다.”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므로 영화는 살아야 할 근거들을 깨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수사들의 식사 도중 낭독되는 글을 인용해보자.

 

우리의 무력함과 빈곤을 인정하는 것은 권력에 기대지 않고 남과 교류하라는 권유이며 절박한 요구이다. 나의 약함을 알아야 남의 약함을 알고 그리스도를 따라 남과 나를 견뎌낼 수 있다. 그런 태도가 우리의 임무를 개선한다. 나약함 자체는 미덕이 아니지만 그것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세공되어야 할 우리 존재의 본질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도의 나약함은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신비와 영혼의 빛 속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무기력도 체념도 아니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며 힘과 권력의 유혹을 고발함으로써 정의와 진실에 헌신토록 우리를 부추겨준다.”

 

군대의 보호를 거부한 채, 아무런 자구책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테러리스트의 침입을 순순히 기다리는 듯한 수사들의 행동을 세속의 시점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무기력하고 나약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길이었다. 그리스도는 패했다. 로마 병사의 포승줄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빌라도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물론 칼을 들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오랜 기도 끝에 죽음의 길을 묵묵히 걷기로 했다.


나약함은 신앙의 본질이다. 신앙은 권력이나 무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앙은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크리스토프에게 말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희망하고 모든 것을 견딘다네.” 수사들은 아픈 사람이라면 그가 테러리스트라 할지라도 치료했다. 폭력을 폭력으로, 권력을 권력으로 제압하는 세속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수사들은 알제리 시골 마을에 발붙이되 천상의 기준에 맞추어 살고 있기 때문에, 알제리 정부군과 테러리스트의 이해 범위 바깥에서 행동한다. 수도원 부근을 배회하는 헬리콥터 소리에 대항해 수사들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는 모습은 종교인이 세상의 악과 싸우는 한 가지 방식을 잘 보여준다.



성가는 무기를 이긴다


수사들이 떠나지 못하는 다른 이유는 자신들이 마을 주민들의 보루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수사들이 무기도, 권력도 갖고 있지 않음을 잘 알지만, 그래도 그들이 그곳에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청한다. 수사들 역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 그들과 똑같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여있어야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에 대한 서구 기독교인들의 비판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신념에 매몰돼 사람의 구체적인 삶을 살피지 않는 이, 악을 악으로 되갚는 이에 대한 비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붙잡은 테러리스트의 시신을 저잣거리에서 끌고 다니며 모욕하는 알제리 정부군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신과 인간>은 시편 82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너희도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 인간은 필멸한다. 신의 속성의 한 조각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수사들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피할 수 있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맞이한 수사들은 어쩌면 어리석었다. 그러나 큰 지혜는 어리석어 보인다고 말한 이는 노자였다. 수사들은 잘 알지 못했던 동양 현인의 가르침을 무심코 따랐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