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최근 접한 소설, 영화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한 차례 지나감.
싫지만 재밌는 작품이 있다. 신경숙 작가가 표절한 것으로 추정된 작품 ‘우국’이 그렇다. ‘우국’은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가 1961년 발표한 단편이다. 이 작품의 절반은 섹스 묘사고 나머지 절반은 죽음 묘사인데, 이렇게 자극적이면서 심오한 소재를 솜씨 있게 다룬다면 작품에 대한 호오와 상관 없이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섹스의 결과로 태어나고 또 언젠가 죽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마치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듯 혹은 영원히 죽지 않을 듯한 표정으로 살아간다. 소설가는 그런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1936년 2월26일 천황 중심의 강력한 국가 개조를 주장하는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가 ‘우국’의 배경이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 동료들의 쿠데타에 끼지 못한 다케야마 중위는 다음날이면 동료들을 진압하러 나가야 한다. 친구들을 쏠 수 없다고 생각한 다케야마는 죽음을 다짐한다. 젊은 아내 레이코 역시 남편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미시마 유키오가 오늘날까지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아베하고 한 통속이었다면 작가로서의 아우라 따위는 없는 볼썽스러운 꼴이었을듯.
부부는 죽음을 결행하기 전 마지막으로 동침한다. 미시마는 “젊고 건강한 육체”를 가진 남녀의 섹스를 묘사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보인다. “중위의 눈이 본 그대로를 입술이 충실히 다시 그렸다” 같은 문장에는 탄식이 나온다. 젊은 신혼부부의 정사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이유는 곧이어 다가올 죽음 때문이다. 중위는 군복 상의의 단추를 푼 뒤 날카로운 칼 위로 잘 단련된 상체를 엎는다. 내장이 바깥으로 쏟아지며 내는 비린내와 날카로운 칼이 피부를 가르며 유발하는 찌릿한 고통이 글자 너머로 전해진다. 부부의 건강한 쾌락과 피·고통·죽음의 축제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서로를 상승시킨다. 그러나 궁극의 파멸로 향하는 이같은 대비는 매력적일지언정 건강하지 않다.
성인 관객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전체관람가 영화인 <인사이드 아웃>을 잔인하고 에로틱한 ‘우국’과 비교하는건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사이드 아웃> 역시 정반대 속성을 가진 것들이 어울릴 때 내는 삶의 효과를 보여준다.
<인사이드 아웃>에는 감정이 의인화된 형태로 등장한다.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등의 감정은 머릿 속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사춘기에 접어들기 직전의 소녀 라일리를 움직인다. 다섯 감정 중에서도 주인공은 기쁨이다. 라일리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기쁨은 라일리가 지나온 유년기의 많은 시간동안 본부의 움직임을 주도했다. 미국 중산층 가정의 딸 라일리는 대체로 밝고 명랑하고 행복한 나날들 속에 성장한다.
나머지 감정들도 역할이 있다. 예를 들어 소심은 라일리가 전깃줄 너머로 세차게 달려나가려는 순간 버튼을 누름으로써, 라일리가 속력을 줄이고 넘어지지 않게 한다. 그러나 기쁨은 의문을 품는다. “슬픔은 무슨 일을 하지?” 손대는 기억 구슬마다 우울한 푸른색으로 변하게 하는 슬픔을 나머지 감정들은 경계한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영화는 우리의 삶에는 기쁨과 슬픔이 모두 필요하다는 결말로 향한다. 슬픔은 몸과 마음을 물에 젖은 솜처럼 처지게 하지만, 그러한 영육의 상태를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사람들은 감정의 공동체를 이룬다. “결혼식엔 안가도 장례식엔 가라”는 말이 있다. 기쁨을 나눌 때보단 슬픔을 나눌 때 더 큰 힘이 된다는 경험을 함축한 말일 것이다.
‘우국’의 섹스와 죽음은 서로를 극대화시키면서 인생을 찢어놓고,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과 슬픔은 서로 어울리며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만든다. 우리의 일상은 대체로 같은 궤도를 반복해 돌지만, 때로 양극의 경험을 피할 수 없는 때가 있다. 마음의 탄력성을 발휘해 극단의 체험을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한 인간이 될 것이다. 무더위 뒤 찾아온 한줄기 서늘한 바람에 지복을 느끼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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