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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아기보기

아침 시간에 아이를 챙겨 어린이집에 보낸 지도 두 달이 넘었다. 처음에는 전날밤부터 부담이 되고 아침이면 긴장을 해 초조해지기도 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7시가 조금 지나면 아이가 주섬주섬 일어나 침대 옆에 서서 아빠를 깨우거나 내가 먼저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간다. 내가 나가도 아이는 금세 알고 일어나니 굳이 조용히 나갈 필요가 없긴 하다. 아이는 사랑하는 인형 친구 '크크'를 데리고 거실로 나와 가장 먼저 관심을 끄는 책이나 장난감을 집어든다. 책을 읽어달라고 하거나 장난감 이름을 발음하며 자신의 어휘력을 뽐낸다. 


아이와 잠시 놀아준 나는 아침을 챙기러 간다. 이때가 조금 고비다. 아이가 혼자 놀면 좋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같이 놀아달라고 올 때가 있다. 커피를 내리거나 수프를 끓일 때 아이가 다가오면 낭패다. 최대한 달래 부엌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아니면 주전부리를 아무거나 챙겨줘 시간을 번다. (아이가 먹는걸 좋아해 다행이다)


아침이라 해봐야 별 건 없다. 시리얼에 과일을 섞어주거나, 아내가 미리 끓여놓은 수프를 준다. 죽이나 빵을 대령할 때도 있다. 아이는 서툰 숟가락질로 잘도 떠먹는다. 테이블과 옷에 음식이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허나 옷은 빨면 되고, 테이블은 닦으면 된다. 난 그 옆에 앉아 커피와 빵을 먹는데, 가끔 아이가 아빠 음식에 호기심을 보일 때도 있다. 그러면 조금 떼어준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시각의 왜곡 현상은 생득적이라는 사실이 경험을 통해 입증됐다.   


시간은 어느덧 8시. 아이는 세수하고 손 씻기를 귀찮아하는데, 밥 먹자 마자 잘 달래서 목욕탕으로 안내한다. 아이는 이때 텔레비전을 보여달라고 하기 때문에, 난 세수를 하면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아이는 눈을 꼭 감은 채 얼굴에 물을 적시며 3분 뒤 이루어질 약속을 기대한다. 난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EBS의 <딩동댕 유치원>을 보여준다. <딩동댕 유치원>에는 주황색 머리를 한 여자아이 랄라와 그의 선인장 친구 장이 나와 이런저런 코너를 소개한다. (솔직히 랄라의 머리색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요즘엔 박경림이 어린이 인권을 홍보하겠다며 나오고, 얼마전엔 피아니스트 진보라가 나와 아이들의 동요 반주를 했다. 다들 어디 있나 했더니.)


이후 30분간 아이는 프리즈. 그러면 나는 그릇을 치우고 식탁을 훔친다. 출근 준비를 하고는 아이의 몸단장도 시킨다. 로션을 발라주고, 기저귀를 갈고, 외출복을 입힌다. 요즘 날씨가 급변해 옷 선택에 고민이 많다. 안에 입은 옷과의 코디가 완벽하지 않아 외투를 세 번 정도 갈아입힌 적도 있다. 이 아이의 미감을 너저분하게 만들 순 없다. 


여기서 갑자기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겠다.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니코마코스 윤리학) 마이클 샌델은 "덕성은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증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뜬금없는 패러디를 허용한다면 "부성은 실천함으로써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2달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아기를 보는 일은 전혀 손에 익지 않았고, 그래서 준비는 부실하고 시간은 쫓기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제 난 아이의 리듬과 습관과 호오를 알아내고, 그걸 이용하고, 아이는 다시 내 손길에 기대는 원활한 리듬이 만들어졌다.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양쪽 노를 젓는 선원처럼, 아빠와 아기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생각 하면 많은 일이 괴롭다. 작은 괴로움의 가능성이 거대하게 부풀기도 한다. 막상 몸으로 부딪치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 내 몸이 일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해도 안될 때도 있다. 안되면 안하면 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기 보는 일을 차츰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진은 특정 사건과 관련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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