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보니 호그와트를 닮은 클레어의 집
(스포 조금. 그런데 이런 영화에 스포가 중요한가)
안보고 못보다 보니 영화와 조금씩 멀어지려던 차, 지난 금요일 퇴근길 힘을 내 <멜랑콜리아>를 보았다. 영화와 너무 멀어져서는 안되겠고, 영화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춰서도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몇 줄 적는게 이 괜찮은 영화에 대한 도리.
영화는 1부 '저스틴'과 2부 '클레어'로 구성된다. 1부에서 동생 저스틴은 멋진 고성에서 격식있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대형 리무진이 산길을 잘 오르지 못하는 바람에 신랑, 신부가 2시간 정도 예식에 늦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문제는 저스틴이 아마 고질적인 것으로 추정되는 우울증에 다시 빠지면서 비롯된다. 번듯한데다가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저스틴은 망설인다. 남자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자기 마음 속의 우울한 담즙이 그날따라 샘솟아 마음과 몸을 바로잡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보통 '민폐'다. 모두들 축하할 준비가 돼 있는데, 저스틴 혼자 그 축하를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결혼 제도에 냉소적이며, 그래서인지 이혼한 저스틴의 어머니는 딸에게 한 마디 위로라도 건낼법 하지만, 프랑수와 오종의 영화에서 냉랭한 표정 연기를 선보인 샬롯 램플링이 그런 멘토 연기를 하라고 캐스팅된 것은 아닐 것이다. 엄마는 딸에게 징징대지 말라고 딱 잘라 얘기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따뜻한 남자처럼 보이지만, 많은 따뜻한 남자가 그렇듯이 이날도 별 대책은 없다. 게다가 결정적인 순간 그냥 내뺀다. 하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파안대소중인 엄마 샬롯 램플링
결혼식을 준비한 언니 클레어, 형부 존 역시 저스틴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존은 막대한 돈을 들인 결혼식이 망할까봐 안절부절 못한다. 그는 대놓고 속물이다. 18홀 골프장이 있는 성을 자랑하고, 처제에게 수시로 결혼식에 들어간 돈이 엄청나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처제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결혼식을 주관하는 자신의 위신이 떨어지고 돈이 아까울까봐 노심초사 하는 것처럼 보인다. 클레어는 그래도 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 네가 정말 미워"라는 대사를 몇 번이고 한다.
저스틴은 카피라이터다. 결혼식에는 그의 상사가 초대받아 참석했다. 그는 저스틴에게 승진 소식을 알린 뒤, 광고 문구 언제 떠올릴 것이냐고 웃으며 말한다. 처음엔 농담인줄 알았는데 진담이다. 그는 신입사원 한 명을 저스틴에게 붙인다. 저스틴이 어딜 가든 그를 따라다니며 문구를 받아내라고 독촉한다. 받아내지 못하면 자르겠다고 위협한다.
저스틴은 안간힘을 쓴다. 미소를 지으려고, 우울과 비관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결혼식을 끝내려고 노력한다. 술을 마시기도 하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기도 하고, 신랑을 안심시키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스틴의 마음은 이미 거꾸로 선 나선의 소용돌이를 따라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저스틴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영화 바깥에 있다. 바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주체못해 주변 사람에게 불편함을 안기는 여성을, 에릭 로메르는 <녹색 광선>에서 매우 잘 이해하고 묘사했다. 폰 트리에는 조금 짓궃긴 하지만, 그래도 로메르 못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대체 저스틴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던 관객(사실 나)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알 수 없는 건 저스틴이 아니라 주변 사람이라고 생각이 바뀐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나' 아닌가.
아름다운 커스틴 던스트. <스파이더맨>에선 몰라 뵈었습니다.
2부 '클레어'는 저스틴의 우울을 우주의 변화, 지구의 종말과 연관시킨다. 시간이 흐르고 클레어 부부의 우아한 삶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저스틴은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됐다. 저스틴은 가까스로 택시를 타고 언니네 집으로 온다. 물론 이때도 형부는 처제의 기거를 못마땅해한다.
저스틴의 영육이 어찌됐건, 지구는 들썩인다. 소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스쳐 지나갈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클레어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존은 과학자들의 말을 믿으라고 안심시킨다. 하지만 그 역시도 지구가 무사할 것이라고 100% 확신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존은 집사와 함께 재난에 대비한 물건을 사재기한다. 그저 존은 믿는 척 할 뿐이다.
멜랑콜리아가 지구로 다가오면서, 저스틴의 상태는 호전된다. 스스로 걷기는커녕, 밥 한 숟가락 뜨지 못할 정도로 기력을 잃었던 저스틴은 닥쳐온 재난 앞에서도 담담하다. 불안에 벌벌 떠는 언니에게 동생은 말한다. "지구는 사악해. 없어지더라도 아쉬울 것 없어." 클레어는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스쳐지나갈 것이라고, 과학자의 말을 인용한 남편의 말을 다시 인용하지만, 저스틴은 지구가 곧 멸망하리라는 걸 안다. 어떻게 아느냐하면 그냥 안다. 그리고 자신의 결혼식 때 아무도 맞추지 못한 퀴즈의 정답도 뒤늦게 말한다.
이것이 멜랑콜리아.
일생의 결혼식을 파국으로 끝나게 한 저스틴의 우울은 멜랑콜리아의 근접 때문인가. 그런 설명은 없지만, 저스틴에게는 분명 영적인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스틴은 귀신이 나타난 걸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무당처럼, 유독 가스가 새어 나오는 걸 제일 먼저 아는 광산 속의 카나리아처럼, 그렇게 남들보다 미리 우울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저스틴은 받아들인다. 지구의 사라짐, 인류의 멸망, 자신의 죽음을. 자연에는 인자함이 없다. 등산화에 짓밝혀 죽은 개미처럼, 인간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엄격한 불자가 아니고서야 어느 등산객이 개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겠는가. 애도한다 해도, 그 애도가 반나절을 넘기겠는가. 저스틴은 우주의 순환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만, 그녀와 손을 맞잡은 클레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벌벌벌 떤다. 파랗고 아름답고 기분 나쁜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부딪히고 세상이 환해지면서 영화는 끝.
이 영화는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랐다. 다들 아시다시피, 공식 기자회견에서 폰 트리에가 "그래요. 저는 나치에요" 운운하는 멍청하고 악랄한 농담을 하는 바람에, 폰 트리에는 그 즉시 칸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영화제에 남은 커스틴 던스트는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던스트는 정확하게 연기했고, '정말 이 사람이 <스파이더맨>의 옆집 소녀였나' 하는 생각이 드는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던스트 아니면 할 수 없는 그런 연기는 아니었다.
폰 트리에의 농담에 대해 다시 말하자면, 아무리 '표현의 자유'니 에술가의 언행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사회적 기준을 들먹이더라도, 칸이 그를 내쫓은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비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감독이 부산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정신대를 소재로 바보 같은 농담을 했다면, 그 진의가 무엇이든 그는 사회적 지탄을 피할 수 없고 부산영화제도 그를 추방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서유럽의 분위기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나치는 농담의 소재로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을만하지 않은 역사 속 사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농담이든 비방이든 저주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갖고 있어야 <멜랑콜리아> 같은 영화를 찍는 것인가. <안티크라이스트>를 볼 엄두는 안나지만, 폰 트리에는 분명 빼어난 감독이다.
나도 모래 시계 구해 오면 이런 사진 찍어 주세요. 문제의 남자 라스 폰 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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