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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4등'




'4등'은 형식적으로도 빼어난, 인권영화의 성취다. 


영화 <4등>은 박세리, 박찬호의 선전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변방에서 태어난 이들이 세계 스포츠의 중심에서 1등을 차지하는 광경에 한국인들은 기뻐했다. 그런데 1등이면 다인가. 1등 못하면 실패한 인생인가.

<4등>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인권영화다. 지금까지 청소년 문제(시선 1318), 범죄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범죄소년) 등 다양한 인권 이슈에 대한 영화를 제작해온 인권위는 이번에 스포츠 인권을 소재로 했다. 그러나 <4등>이 체육인들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스포츠계의 현실은 한국 사회의 비뚤어진 교육열, 폭력의 대물림, 성과 지상주의를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수영 대회에 나가면 매번 4등만 하는 아이 준호가 주인공이다. 준호 엄마는 아이의 기록을 향상시키기 위해 새 코치를 수소문한다. 엄마는 메달은 물론 원하는 대학까지 골라가게 해주겠다고 장담하는 코치 광수에게 준호를 맡긴다. 심드렁하던 광수는 준호의 재능을 알아챈 뒤, 준호에게 혹독한 연습을 시키기 시작한다. 수시로 고함을 지르고 구타도 서슴지 않는다. 구타한 뒤에는 맛있는 것을 사주며 미워서 때린 게 아니라고 달랜다. 준호는 결국 생애 처음으로 2등을 한다. 엄마는 광수의 훈련 방식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 







애초 인권위가 잡은 큰 주제는 ‘폭력’이었다. 이때의 폭력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권력의 작동, 나이에 따른 위계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분야가 스포츠였다. 한국의 오랜 ‘금메달 지상주의’는 금메달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 예컨대 폭력에 대해 둔감하게 했다. 스승의 체벌은 ‘사랑의 매’로 둔갑했고, 선수가 맞으면 “맞을 짓 했으니 맞았겠지”라고 답했다. 이 대사는 <4등>에서도 역설적인 상황에서 등장한다. 

현재 한국 스포츠계의 현실은 한국의 왜곡된 교육열을 드러내고 있다. <4등>이 스포츠 영화이자 교육 영화로 보이는 이유다. 정지우 감독과 함께 <4등>의 시나리오를 공동집필한 인권위 김민아씨는 “취재하다보니 스포츠 인권 문제는 완벽하게 교육 문제와 연결됐다”고 말했다. 1등 못하면 사람 취급 안 하고,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고액의 사교육에 의존해야 하고, 유년 시절의 성적이 대입에까지 연결되고, 학부모들이 이를 위해 아이들을 닦달하는 상황이 그렇다. 실제로 <4등>의 준호 엄마는 초등학교 자녀의 등수에 자신의 모든 존재 의미를 건 사람처럼 나온다. 김민아씨는 “한국 사회의 엄마는 교육의 최전선에서 아이를 지키는 사람일 뿐”이라며 “지금 같은 사회의 프레임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악의 축'으로서의 엄마.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더 무서움. 

인권위는 2003년 임순례, 박찬욱 등 감독 6명의 단편을 모은 <여섯 개의 시선>을 시작으로 <4등>까지 12편의 인권영화를 제작해왔다. <4등>의 순제작비는 6억원으로, 이 중 2억원이 인권위 예산이다. 인권위의 인권영화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마음 깊이 공감하지는 못했던 인권 이슈들을 쉽게 전파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인권영화가 제작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제작된 다른 인권영화들에 견줘봐도 빼어난 성취를 보여주는 <4등>은 13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