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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역할-<킹스 스피치> 리뷰

가끔 이런 영화를 볼 필요도 있다. 게다가 난 숙련된 영국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양들의 침묵>이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이 비주류 감성을 가진 영화에 상을 몰아준 적이 있기도 하지만, 미국 영화계의 최대 이벤트 아카데미 시상식은 대체로 보편적 가치관을 보수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는 영화를 선호해왔다. 지난달 말 열린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가져간 <킹스 스피치>는 애초 아카데미가 외면하기 힘든 종류의 영화였다.

영화 주인공은 조지 6세(콜린 퍼스)다. 그는 졸지에 왕이 됐다. 형인 에드워드 8세가 미국 출신 유부녀 심슨 부인과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왕위에 오른 지 1달만에 물러났기 때문이다. 비록 상징적인 권력만 유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영제국의 왕이 됐는데 조지 6세는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가 심한 말더듬 증상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온갖 언어치료사를 찾았는데 소용이 없다. 왕비(헬레나 본햄 카터)는 비정통적인 치료법을 고수하는 것으로 알려진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를 찾는다. 왕은 로그를 만나 치료를 시작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 같은 사생활까지 털어놓기를 권하는 로그의 방식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마침 영국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휩싸이고, 왕은 라디오 연설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면서 국민을 통합시켜야 한다.



연설을 하던 조지 6세가 유독 ‘왕’(king)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면서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아버지 조지 5세는 남다른 카리스마를 가진 왕이었고, 형 에드워드 8세는 어린 시절부터 재주가 많아 인기가 좋았다. 그 사이에 낀 조지 6세는 자신감을 상실해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막중한 임무를 지닌 왕좌 앞에서 “날아가고 싶다”, “난 왕이 아니라 꼭두각시다”라고까지 말한다.

라이오넬 로그는 언어치료사인 동시 심리상담가 역할까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로그와 마주앉은 왕은 그동안 은밀히 키워온 아버지와 형에 대한 콤플렉스를 마주보기 시작한다. 결국 <킹스 스피치>는 내면의 약점을 정면으로 바라본 뒤, 이를 통해 아버지, 형, 왕의 거대한 이름을 이겨내는 남자의 성장담이다.

아울러 이 영화는 사회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한다. 멜로드라마 장르였다면 ‘낭만의 화신’처럼 비춰졌을 에드워드 8세는 이 영화에서 왕으로서의 의무를 방기한 채 사랑놀음에 빠진 철없는 남자 쯤으로 묘사된다. 반면 조지 6세는 심리적, 육체적 문제를 갖고 있지만 결코 막중한 책임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의 책임이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국가를 외적으로부터 지키는 일이다.

조지 6세는 개인의 이익이나 명예 때문이 아닌, 오직 국민과 국가를 위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진짜 보수’다. 실제의 조지 6세 역시 독일군이 폭격하는 와중에도 버킹엄궁을 지켰다고 한다.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직후, 조지 6세가 전쟁을 앞둔 대국민 연설을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조지 6세는 평화에 대한 열망, 파시즘에 대한 비판, 미래에 대한 확신을 느리지만 또렷한 어조로 연설한다.

조지 6세는 히틀러의 연설 영상을 보면서 말한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은 청산유수군”. 그러나 보수적이지만 근본적인 앎, 어눌하지만 확신있는 말, 앎과 말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보여줬던 조지 6세와 영국은 말뿐인 히틀러의 독일을 이겼다.

다시 아카데미 이야기. 올해 아카데미의 선택이 보수적이고 안정지향적이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런 점을 들어 아카데미의 고리타분한 심사 기준을 비판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매순간 미학적 혁신이 일어나고, 대중의 가치관이 바뀌고, 정치적 혁명이 일어나는 삶이란 얼마나 피곤할까. <킹스 스피치>가 영화사에 남을 혁신적인 작품으로 기억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당대 대중의 보편적이고 건전한 가치관을 되새겨주는 역할은 충분히 해낸다. 17일 개봉.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