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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좀비영화의 가능성과 한계, '부산행'




칸영화제에서 본 '부산행' 리뷰.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엔딩도 좋다. 다만 '연상호'라는 이름에 기대한 것과는 다른 영화다. 



‘살아있는 시체’를 뜻하는 좀비 영화는 공포 영화의 하위 장르에서 출발해 여름용 블록버스터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브래드 피트가 출연한 <월드워 Z>(2013)는 좀비 영화가 대중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3일(현지시간)의 금요일 자정 제 6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미드나잇 스크리닝’으로 처음 선보인 <부산행>은 ‘한국형 좀비영화’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간 제작진은 한국 관객이 여전히 좀비 영화에 낯설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부산행>을 ‘재난 영화’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이날 공개된 <부산행>은 확연한 좀비 영화였다. 그것도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같은 고전에서 볼 수 있었던 느릿한 좀비가 아니라, <28일후>(2002) 이후 유행한 광폭하고 재빠른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다. 

가족보다 일을 우선으로 하는 펀드매니저 석우(공유)는 별거중인 엄마에게 가고 싶어하는 어린 딸 수안(김수안)을 데려다주기 위해 부산행KTX에 오른다. 그러나 때마침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확산돼 사람이 사람을 물어뜯어 죽이는 일들이 벌어진다. 열차 안에도 감염자가 발생해 큰 혼돈이 벌어진다. 석우는 수안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한국형 좀비영화’로서, 또 여름용 블록버스터로서 <부산행>은 제 몫을 다한다. <부산행>이 묘사한 좀비의 모습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KTX 내부나 대전역, 동대구역 등 익숙한 공간, 군인·학생·직장인·노인 등 평범한 한국인의 모습을 통해 펼쳐지는 좀비 재난의 모습은 흥미진진하다. 열차 내부라는 한정된 공간을 이용한 액션과 트릭도 제작진의 역량을 잘 드러낸다. 생존자가 있는 칸 사이에 좀비들이 득실댈 때, 생존자가 갖가지 방법으로 좀비떼를 뚫고 나가는 모습은 영화의 스릴을 더한다.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다양한 반응 역시 이같은 영화의 필수 요소다. 나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면서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인에 대한 선의를 끝까지 간직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대부분이 혐오할만한 남루한 노숙자 캐릭터는 등장인물들에게 도덕적 딜레마를 안기는 역할을 한다. 저 미천한 사람의 목숨까지도 귀히 여겨야 하는가. 그를 위해서 나의 안전을 위험에 빠트려도 되는가. 너무 이기적인 행동과 눈빛으로 점철된 나머지 영화 속의 갈등을 증폭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형적 악역 용석(김의성) 캐릭터보다, 노숙자 캐릭터가 더 흥미로운 이유다. 

칸영화제의 주 상영관인 뤼미에르 대극장을 가득 채운 2000여명의 관객들은 <부산행>을 충분히 즐겼다. 임신한 아내(정유미)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상화(마동석)가 좀비들을 쓰러뜨릴 때마다, 객석은 휘파람과 박수로 답했다. 미드나잇 스크리닝이 다소 느슨하고 유희적인 분위기에서 펼쳐진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부산행>은 상업영화로서의 존재감을 충분히 증명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부산행>에 붙일만한 ‘한국형’ 좀비영화라는 수식어에는 검토할만한 지점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한국 관객들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지점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특히 ‘일 때문에 소홀했던 딸에 대한 사랑을 다시 느끼는 아버지’는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너무 많이 사용한 소재다. 이 소재가 여름의 극장 관객에게 여전히 인기 있고 호소력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쉽다. 하지만 야심있는 연출자라면 대중이 좋아한다고 판명된 감성을 재활용하기보다는, 좋아할 수도 있는 감성을 새롭게 개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좀비에 의한 재난을 ‘소요 사태’라고 거짓 발표하는 정부, 자본주의의 첨단에 있는 이기적인 이들에 대한 비판도 겉핥기에 그친 인상이다. <부산행>의 감독이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등 으스스하고 냉소적이며 잔혹한, 그래서 매우 독창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던 연상호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부산행>은 올 여름 극장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