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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이 아니라 소멸, 한강의 '채식주의자'




한국을 넘어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이 한 마디씩 걸친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해 뭔가를 말하기가 쑥스럽지만, 그래도 무언가 적어본다. 


3편의 연작 중편 중 '채식주의자' '나무 불꽃'은 좋았고, '몽고반점'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작중 성행위 퍼포먼스를 권유받은 뒤 당혹해하는 아티스트의 반응처럼 "내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온건한 사람"인 이유인지도 모르고. 


첫번째 중편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이 소설속의 등장인물들 중 가장 평범한, 그래서 고루한 사람이다. 이런 지루한 남편의 목소리로 '영혜'라는 문제적 인물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은 독자를 소설 속 세계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데 전략적인 도움이 된다. 영혜는 끔찍한 고깃덩어리와 피와 이것들이 연상시키는 살육의 이미지로 가득찬 꿈을 꾼 뒤 육식을 거부한다. 세상은 그녀를 간단히 '채식주의자'라 부르지만, 소설의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영혜의 생각과 행동이 단순히 채식이라는 식습관으로 요약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영혜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숨쉬고 걷고 먹고 싸면서 우주에 미치는 해악 그 자체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구폭발'이니 '환경파괴'니 하는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지 않더라도, 인간 존재는 우주의 오점이다. 크나큰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다. '인류의 찬란한 문명' 따위 기억하고 기려줄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영혜에겐 이러한 인간의 해악스러운 조건이 육식과 살육이라는 이미지로 먼저 떠오른 것이고, 다른 존재를 의식적으로 해하지 않는 식물은 영혜가 닮고 싶은 존재가 된다. 두번째 중편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아티스트 형부는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말에 불현듯 느낀 바 있어, 영혜의 몸에 식물을 그리고 자신과 영혜가 교접하는 상상을 시작한다. 영혜는 형부의 기괴한 제안을 거부하기는커녕 기꺼이 받아들이며, 형부는 상상의 장면을 마침내 실현한다. 




세번째 중편 '나무 불꽃'에 이르면 영혜는 식물 너머의 무언가가 되길 원한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영혜는 종종 물구나무를 선 채 머리가 뿌리로 박히고 음부에서 꽃이 피어나는 상상을 하더니, 결국 육식이건 채식이건 일절 음식 섭취를 거부한다. 마치 식물처럼 햇빛과 물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동물로 태어난 영혜에게 햇빛과 물만 섭취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라는 언니의 절규에 영혜는 "왜, 죽으면 안되는거야?"라고 답한다. 이제 영혜는 말과 생각이 끊기길 희망한다. 


식물은 가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혜는 죽음으로 조금씩 발을 딛는다. 그러므로 영혜가 원하는 것은 식물이 되는 일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의 소멸이다. '나무 불꽃'의 화자인 영혜 언니 역시 영혜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듯 하다가, 결국은 그 역시 불현듯 소멸을 꿈꾼 적이 있다는 고백을 해내기에 이른다. 


'몽고반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형부와 영혜의 섹스가 너무 '동물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채식을 넘어, 식물 되기를 넘어, 궁극의 소멸로 향하는 영혜가 열대 우림의 거대하고 썩은 냄새 풍기는 식충식물 같은 섹스를 하다니, 부주의하게 과속방지턱을 넘다가 덜컹거리는 느낌이었다. 평론가 허윤진은 작품 말미의 '해설'에서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 등 외적인 조건에 자신을 맡긴 채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이 사실은 주변의 생태계를 포괄하는 역동적인 체계라는 점을 기억하자. 식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그것은 때로 냉정한 광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욕망에 달아오른 동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자신과 영혜를 식물의 형상으로 구성한 결과가 지독한 동물적 욕망으로 낙착된 것은 어쩌면 예고된 결말이었는지 모른다"는 말로 이 섹스를 이해하지만, 내겐 그들의 섹스가 여전히 소화되지 않는 덩어리처럼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