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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는 뭐하는 사람인가, <거장 신화>

거장 신화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김재용 옮김/펜타그램/824쪽/2만8000원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야구감독, 해군제독과 함께 ‘남자가 해볼만한 3대 직업’으로 꼽히곤 한다. 이 3가지 직업은 모두 한정된 시·공간 속에 있는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을 이끌어 좋은 결과를 내야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지휘자의 손 끝, 야구감독의 사인, 제독의 명령에 따라 성공과 패배가 순식간에 갈린다. 


<거장 신화>(원제 The Maestro Myth)는 영국의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의 1991년작이다.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2001년 개정판을 근간으로 했다. 레브레히트는 지휘자라는 직업이 생겨나 인기를 얻은 뒤 쇠락해가는 지난 120년간의 과정을 두툼한 분량, 날카로운 서술로 풀어냈다. 


모차르트, 베토벤의 시대에는 지휘자라는 직업이 없었다. 있었다해도 대체로 작곡가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세기의 관객이 오늘날의 연주회장에 온다면 악기를 연주하지도, 곡을 만들지도 않은 지휘자가 수많은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는 풍경이 이상하다고 느낄 것이다.


지휘자라는 직업의 출현은 복잡한 교향곡의 탄생과 맞물린다. 말년의 베토벤은 기존 교향곡의 한계를 뛰어넘는 난해한 곡을 만들려했는데, 이런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의 구성 역시 복잡해져야 했다. 베토벤 스스로가 오케스트라 지휘에 도전했지만 기억력이 나빴고 대인 관계에 서툴렀으며 청각장애까지 않았던 그의 지휘는 청중의 웃음을 유발할 뿐이었다. 브람스, 바그너의 화려하고 복잡한 교향곡, 오페라가 등장하면서 곡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단원들의 일사분란한 연주를 끌어내는 지휘자의 존재가 필수적이 됐다. 


그러나 초창기 지휘자들은 창조의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작곡가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기 일쑤였다. 바그너는 ‘최초의 전문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와 외도했는데, 주변 사람들 중 오직 뷜로만 이 사실을 몰랐다.


구스타프 말러는 유명한 작곡가인 동시 지휘자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해낸 인물이었다. 젊고 자신만만했던 말러는 당시 유럽 음악과 정치의 중심지인 빈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얼마간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넘어,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둘러야 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부분에 간섭했다. 연주자, 합창단을 통제했고, 레퍼토리를 결정했으며, 의상, 오페라하우스 편의시설, 심지어 관객의 태도까지 지적했다. 그는 연주 시작후 들어오려는 관객의 입장을 통제하기 시작한 최초의 지휘자들 중 하나였다. 그를 신임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조차 “극장은 즐거움을 얻으려고 오는 곳”이라고 항의했으나, 말러의 전적인 통제로 인해 공연의 질이 급상승하자 입을 다물었다. 



구스타프 말러(1860~1911)


이탈리아의 토스카니니와 독일의 푸르트벵글러는 파시즘의 광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처한 지휘자였다. 불같은 성미를 가진 토스카니니는 악당처럼 보이긴 했으나, 적어도 겁쟁이는 아니었다. 무솔리니 찬가를 연주하라는 요구를 받았던 토스카니니는 이를 간단히 거부했다. 파시스트와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기보다는, 국가가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푸르트벵글러는 달랐다. 그는 나치당 행사는 물론, 점령국의 자동차 퍼레이드장에서도 지휘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악단에 소속된 유대인 음악가를 보호하기 위한 헛된 노력을 계속했다. 그는 훗날 나치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독일을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정치가가 아니라 정치와는 상관없는 모든 인류에게 속한 독일 음악의 전달자”라고 자처하면서. 


클래식 음악의 세계는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레퍼토리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회의 변화와 밀접하게 맞물려있다. 괴벨스로부터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은 카라얀은 음반 시대의 도래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인물이었다. 나치와의 협력 혐의를 받아 한동안 지휘를 할 수 없었던 그는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 전곡 녹음 등으로 매스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베스트셀러 음악가’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그에게서 ‘나치 동조자’라는 어두운 꼬리표를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 젊고 유머러스하고 잘 차려입은 번스타인은 전후 번성하던 미국, 특히 뉴욕이 딱 사랑할만한 지휘자였다. 뉴욕필하모닉을 처음 맡았을 때 그의 교향곡 해석은 화려하지만 피상적이었다. 하지만 리허설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텔레비전 교양 프로그램에서 교향곡을 알기 쉽게 설명하던 그를 미국인들은 좋아했다.


그러나 이제 신적인 권위를 누리던 지휘자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베를린필의 사이먼 래틀은 흠잡을 데 없는 지휘자지만 결코 카라얀이 누린 명성을 가지지 못했다. 1990년 뉴요커들은 번스타인의 죽음을 일제히 추모했지만, 그와 같은 반열의 지휘자였던 게오르그 솔티의 1997년 부고 기사는 상대적으로 약한 비중으로 처리됐다. 짧은 시간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인터넷, 게임 등에 빠진 젊은이들은 1시간동안 지속되는 4악장의 교향곡을 듣지 않는다. 


저자는 클래식 음악의 세계가 너무나 쇠퇴했기 때문에 앞으로의 미래는 오히려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에 더 유리한 백지상태”라고 위안한다. 특히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6000만명의 젊은이가 피아노를 배우는 중국, 클래식 음반 판매 비율이 여전히 높은 한국 등 동아시아 음악 시장을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