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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에 대해, '알리타: 배틀 엔젤'과 '킹덤'의 경우



***스포일러 있음

'알리타: 배틀 엔젤'은 지금보다 더 근사할 수 있었던 영화다. 

기술적으로 이 영화는 크게 흠잡을데가 없다. 이미 할리우드의 특수효과 기술은 가상 캐릭터를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 재현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이보그'는 SF의 오랜 소재지만, '알리타'는 인간과 사이보그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이질성을 극복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하는 세상을 시각적, 감정적 이물감 없이 보여준다. 사이보그지만 또한 10대 소녀의 외모와 행동 방식을 가진 알리타는 10대 소년과 자연스럽게 사랑한다. 알리타가 심장을 꺼내 보여주며 사랑을 증명하려 하자 소년 휴고가 당황하는 장면은 인간과 기계가 교류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마주칠 '언캐니 밸리'를 재치있게 그려낸다. 수십년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기계와 신체의 융합을 시적인 악몽처럼 그려냈지만, 그건 이미 오래전 상상의 산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AI'에서 그려낸 이물감 정도가 사이보그에 대한 동시대 이미지의 극한에 가까울 것 같다. 

문제는 서사다. 프로듀서 제임스 카메론과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알리타'의 서사가 조금 더 완벽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이도 박사(크리스토퍼 왈츠)는 천공의 도시에서 떨어진 고철 더미에서 사이보그 소녀의 두뇌를 줍는다. 두뇌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 이도 박사는 소녀에게 그럴듯한 신체를 붙여주고는 죽은 딸의 이름 알리타를 선사한다. 하지만 알리타의 옛 기억은 사라졌다. 다만 거대한 경찰 기계를 맞아 전투 자세를 취하는 알리타의 반사 신경이 과거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줄 뿐이다. 

이도 박사, 알리타가 등장하고, 알리타와 밀당하는 소년 휴고가 등장하고, 이도 박사의 비밀이 밝혀지고, 알리타가 조금씩 기억을 회복한 뒤 능력을 발휘하는 중간 부분까지 영화는 매우 경쾌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중간을 넘어서면서 서사는 조금 숨을 고른다. 종반부의 장쾌한 하이라이트를 위해 살짝 속력을 줄였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떄까지 흘러간 러닝타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알리타'는 서사의 장애물을 잘 피한 뒤에도 좀처럼 속력을 내지 않는다. 레이싱 게임으로 치면, 앞서가던 라이벌 차량을 다 따돌리고 결승선까지 직선 도로만 남았는데, 액셀레이터를 밟지 않는 모양이다. 왠일인지 레이서는 속력을 적당하게 줄이고, 심지어 타이어를 교체하러 들어가고, 괜히 오솔길을 탄다. 122분의 상영시간이 다 돼가는데도 자꾸 딴청을 부린다. 상영시간 내에 서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카메론과 로드리게즈는 속편을 준비했다. 영화 내내 몇 번 이름으로 등장하거나 다른 이의 몸을 빌려 나타나는 것으로 설정된 천공의 도시의 리더는 끝내 알리타와 마주하지 않는다. 모터볼 경기 선수로 나선 알리타가 천공의 도시쪽으로 칼을 치켜들면, 리더는 그런 알리타를 보고 웃으면서 영화가 끝난다. 아마 알리타와 리더의 대결은 다음 편에서 보여주려는 것 같다. 

일본 만화 원작이 있었고, 그 서사를 어느 정도는 담아내려는 생각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알리타'가 할리우드의 속편 관행을 너무 일찍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래서 한 영화에 전력을 다하는 대신, 후속편을 위해 서사의 꼭지들과 아이디어들을 남겨둔 것 같다. 이런 의심이 들었을 때 생각난 건 원빈이 '아저씨'에서 했던 대사였다.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알리타: 배틀 엔젤'의 장면들. 인간과 기계의 로맨스에는 이물감이 없다. 

다음 편을 위해 이번 편의 아이디어를 아낀다고? 이번 편이 망해서 아예 다음 편을 제작할 기회가 없다면 어쩌려고? 카메론의 영화를 예로 들자. '터미네이터'에서 사라 코너와 카일 리스가 터미네이터와의 대결을 마무리짓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났다면? '아바타'에서 인간 군인들이 나비족의 터전을 공격할 준비를 하다가 끝났다면? 할리우드가 속편을 만들어 사골 우리는 관행을 탓하자는게 아니다. 장기적, 지속적으로 이윤을 창출하려는 건 자본주의 기업의 속성이다. 다만 속편을 염두에 두었더라도 개별 영화의 서사적 완성도는 갖추어야 한다. 완성된 영화의 세계관이 워낙 탄탄할 때, 1편에서 구현되지 않은 아이디어가 풍부할 때, 속편은 제작될 수 있다. '터미네이터2'가 그런 영화였다. '터미네이터'는 그 자체로 뛰어났지만, 2편 역시 자체적으로 뛰어났다. (이후의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덤 혹은 향수 상품이다) 그때의 카메론은 아이디어를 하나의 영화에 모두 쏟아부은 뒤에도, 다시 다음 영화를 만들만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사람이었다. 이제 카메론은 더 이상 샘솟는 아이디어가 없을까봐, 아니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부족할까봐 걱정이 많았던 걸까. '알리타'가 이런 식의 결말을 내려고 했다면, 애초에 천공의 도시의 리더는 그토록 자주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속편의 여지를 만들기 위해 종반부에 힌트만 숨겨두었으면 됐다. 하지만 '알리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리타와 리더의 대결 구도를 조성한 뒤, 둘이 한 번도 대결하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난다. 이건 완성된 영화가 아니다. 

'알리타' 얘기를 한참 해서 사족처럼 붙이는 격이 됐지만, 넷플릭스의 '킹덤' 역시 완결성 면에선 실격이다. '킹덤' 첫번째 시즌은 6편으로 끝났다. '킹덤'을 시즌제 드라마로 볼 수 있다면, 이건 시즌제를 오용하거나 악용한 사례다. 조선 중후반 어느 시대,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병이 발생한다. 역병은 죽어가는 왕을 무리하게 살려두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감염자들은 밤이면 나타났다가 아침이면 바위 밑, 마루 밑 등에 숨는다. 이 조선판 좀비의 설정은 흥미롭지만, 제작진은 좀비의 출현 이유에 대해 제대로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다음 시즌으로 해결을 미룬다. 심지어 좀비와 인간의 일대 대결이 벌어지려는 순간 첫번째 시즌을 끝낸다. 여러 가지 인터뷰나 극의 전개로 짐작컨대, 제작진은 이미 모든 설정과 서사의 구상을 마친 것 같다. 시즌 2가 시즌 1의 인기에 힘입어 억지로 제작됐을 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시즌제 드라마라도 최소한의 완결성은 있어야 한다.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죄수들이 탈옥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무리했다면, 그걸 시즌의 끝이라 부를 수 있나. 

'킹덤'의 첫번째 시즌 여섯 개 에피소드는 완결된 시즌이라기보단 10~12편 시즌의 전반부로 보인다. 첫번째 시즌이 이렇게 끝나고 보니 '킹덤' 1, 2편이 다소 늘어지는 것처럼 보인 이유도 마음대로 추정해보고 싶다. 제작진은 '킹덤'을 두 개의 시즌으로 늘이기 위해 초반부 호흡을 일부러 늘어뜨린 것 아닐까. 차라리 두 개의 시즌이 아니라 10편짜리 한 개의 시즌으로 계획을 세웠다면, '킹덤'은 훨씬 깔끔한 호흡의 서사를 보여줬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