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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언제나 미래다, <레트로 마니아>

주제가 뚜렷하고 사례가 풍부하며 표현이 신랄하다. 영미권 대중문화 평론가 특유의 현란한 문체가 살아있다. 대중음악, 나아가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관심있는 이라면 읽어볼만하다.  




70년대 후반 펑크 폭발을 주도한 클래(위)와 섹스 피스톨스.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헌액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 밴드의 반응은 상이했다. 클래시의 믹 존스는 이마가 벗어지고 검은 양복을 입은 채로 "45년간 조직에 성실히 복무한 공로로 감사장을 받으려고 구부정한 자세로 발을 질질 끌며 연단에 올라가는 회사원" 같이 시상식 무대에 올랐다. 반면 섹스 피스톨스는 초대장을 받자마자 "로큰롤과 명예의 전당은 오줌 자국에 불과하다"고 반응했다. 


레트로 마니아

사이먼 레이놀즈 지음·최성민 옮김/작업실유령/456쪽/1만8000원


2006년 3월, 펑크록 밴드 섹스 피스톨스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의 초대장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 “섹스 피스톨스에 비하면 로큰롤과 명예의 전당은 오줌 자국에 불과해. 너희 박물관은 포도주에 섞인 오줌이야. 우리는 안 간다. 우리는 원숭이가 아니야. 우리를 뽑았다면 그 이유를 적어뒀기 바란다. 아무리 익명의 심사위원이라도 너희는 여전히 음악 산업 관계자야. 안 갈 거야. 말귀를 못 알아듣나 본데, 진짜 섹스 피스톨스는 그따위 똥 줄기와 무관하다.”


1970년대 후반 록음악의 흐름을 바꾼 ‘진짜 잡놈’의 혈기는 여전히 드셌다. 물론 그들도 몇 차례의 재결합 공연을 통해 노후 자금을 챙기긴 했지만, 그래도 대중음악이 박물관에 들어가는 순간 생명력은 끝장난다는 점을 인지한 셈이다.


미래파의 창시자 마리네티는 “박물관은 공동묘지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시체들이 사악한 난교를 벌인다는 점에서, 둘은 동일하다”고 외쳤다. 20세기 대중음악의 영웅들도 과거를 부정하는 순간 미래를 쟁취했다. 비틀스, 섹스 피스톨스, 너바나 등은 모두 어제의 거장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인 밴드였다. 따져보면 음악뿐만이 아니다. 영화, 문학, 연극, 미술 등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출신의 음악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옛 거장의 유산을 부정하기는커녕, 그들의 멜로디와 리듬을 반복하는 2000년대 서구 대중음악의 풍토에 우려를 표한다. 60~70년대 대중음악의 기수들은 단 한 순간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렸고, 대중은 어제까지 듣던 가수의 음반을 내던지고 하룻밤 사이에 ‘개종’하기 일쑤였다. 저자는 “예술에는 일종의 진화론적 숙명이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고백한다. 끊임없는 변화, 혁신에 의한 전진만이 예술을 이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중음악은 어떠한가. 저자는 “결정적인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비틀스의 JFK 공항 착륙, 지미 헨드릭스의 ‘성조기여 영원하라’ 연주,커트 코베인의 자살 같은 ‘사건’은 없다. 기억에 남는 음악도 없다. 물론 아이튠즈 차트는 여전히 붐빈다. 그러나 대부분의 팝스타는 ‘재활용’된 음악을 한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는 60년대 개러지 록,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60년대 흑인 솔 여가수, 레이디 가가는 80년대 신스 팝의 분위기를 낸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는 말로 자위하기엔 창조성의 결여가 심각한 지경이다. 


대중의 탓도 있다. 이 시대의 대중은 더 이상 새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노장 밴드가 재결성해 순회공연을 하고, 그들에 대한 헌정 앨범과 박스 세트가 판매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고, 각종 ‘00 주년’ 기념 페스티벌이 인기를 끈다. 한 시절을 주름잡았던 펑크밴드 뉴욕 돌스는 2009년 재결합 공연에서 신보에 실린 곡만 연주했다. 그러나 청중은 신곡이 아니라 옛 히트곡을 원했다. 보컬 데이비드 조핸슨은 청중의 시무룩한 반응을 보며 한 마디 했다. “다 죽어버린 거야, 뭐야?”


서구 대중음악의 복고 회귀 현상은 기술의 진보와도 관련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자료’에 대한 접근 방식은 제한적이었다. 아무리 집요한 컬렉터라 하더라도 과거의 음악을 모두 찾아듣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유튜브 시대의 음악인들은 몇 번의 클릭만으로 10년전이었다면 ‘희귀본’ 소리를 들었을 음원, 영상을 찾아낸다. 과거의 유산에 둘러싸인 예술가들은 이 유산을 이용하기 바쁘다. 지금 인터넷의 아카이브는 ‘아나카이브’(anarchive)다. “무질서한 데이터 잔해와 기억의 쓰레기 더미”다. 레이놀즈는 “역사에는 쓰레기통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역사’ 자체가 쓰레기통이 되어 거대한 폐품 더미를 쌓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2000년대만 과거에 집착한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을 숭배했고, 19세기의 고딕 리바이벌은 중세를 참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방에는 일종의 ‘창조적 오해’가 개입됐다. 과거를 끌어오되, 미래의 전망이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의 ‘레트로 마니아’는 노스탤지어에 매달려 앞으로 나갈 힘을 잃었다. 표현 욕구가 아니라 지식 반영을 위해 창작한다. 덕분에 살아보지도 않은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젊은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영화도, 공연도 다 마찬가지다. 수십 년 전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매년 여름 극장가를 장악하고, 수십 년 전 밴드의 노래를 사용한 쥬크박스 뮤지컬이 무대에 오른다. 


저자는 결말 부분에서 간명히 요약한다. “지난 시대는 지나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미래가 주는 흥분’을 잊은 사회가 ‘오늘의 안정’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까. 책을 읽은 뒤 오싹해지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중독’은 서구 대중문화계만의 문제가 아니기 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