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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추상미

그가 30대 이상의 멋진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삼아 찎은 장편영화를 보고 싶다. 그는 언젠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나 체홈의 연극에 출연하고 싶으며, 연극 연출에도 손을 대고 싶다고 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추상미는 ‘준비된 감독’이었다. 제1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 경선’에 선보인 <분장실>은 이를 증명한다. 출품된 301편 중 17편의 본선진출작 중 하나인 <분장실>은 소재에 대한 탐구, 연기 지도, 기술에 대한 장악력 등에서 빼어난 성취를 보여준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인 추상미의 첫 연출작이다. 여성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신촌에서 추상미를 최근 만났다.


-연기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나요.

“연기든 연출이든 깊이 들어가면 같아요. 중요한 건 원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느냐겠죠. 배우는 위대하면서도 안타까운 직업입니다. 연기자로 살다보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깊어지고 도전하고 싶은 역할도 많아지지만, 또 그만큼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아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계획할 수 없다는건 결국 욕구불만으로 이어집니다. 연출과 배우는 서로 샘내요. 어떤 감독은 ‘배우가 되고 싶은데 액면이 안따라준다’고 하고, 어떤 배우는 ‘연출하거나 글쓰고 싶다’고 합니다.”

추상미에게 연출은 오랜 꿈이었다. 지인들은 대체 언제 연출할 것이냐고 채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작품을 시작하면 발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연출은 장기전”이라고 생각했기에 결단이 필요했다. 결국 30대가 가기 전에 시작하자고 마음먹었고, 지난해 대학원에 지망했다. 그런데 대학원 면접을 하자마자 뜸하던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드라마 4편, 연극 6편이었다. 추상미는 “다 내려놓고” 연출의 꿈을 키웠다.


<분장실>은 연극 <가을 소나타>의 첫 공연을 올리기 직전인 무대 뒤 분장실이 배경이다. 딸 에바 역을 맡은 광덕(김광덕)은 첫 공연을 앞둔 긴장, 불안, 실제 엄마와의 갈등, 엄마인 샬롯 역을 맡은 선배 배우(예수정)와의 신경전에 시달리고 있다. 광덕은 차츰 공황 상태에 빠진다.


-연출해보니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너무나 많은 걸 통제해야 했어요. 제가 프로페셔널이었다면 할 것과 말 것,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알고 취사선택하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걱정해야 했으니까요. 또 제 상상력과 목소리가 관객과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지를 찾는 것도 숙제였어요. 세상과 사람을 좀 더 넓게 바라봐야겠다고 느꼈어요. 연출의 꿈을 꾸기 전과 후가 달라졌습니다.”

-엄마, 선배와의 갈등을 그렸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심리적인 위기를 겪을 때가 있죠. 그 때 우리 안에 있는 어린아이가 나오고, 아이가 나를 압도하기까지 해요. 우리는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를 집어넣으려고 하죠. 그러나 우린 아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분장실>은 일종의 성장영화입니다.”

추상미는 시나리오 작성부터 편집까지 영화 전반을 장악했다. 처음엔 편집을 학교 동기에게 맡겼는데,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컴맹’에 가까운 추상미지만, 방학 내내 컴퓨터 편집 프로그램을 익혀 직접 재편집했다. 편집이 잘못돼 촬영분량이 몽땅 날아가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배우 출신 감독으로서 배우에게 연기 지도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습니까.

“배우를 자주 불러 얘기를 나눴어요. 연극판에선 유명한 김광덕이란 배우인데, 그도 매우 연기를 잘하고 집중력 있지만 제가 예전에 겪은 심리적 강박을 느껴봤을 것 같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제 시나리오에 공감을 하더라고요. 같은 배우 입장에서 어떤 배우를 보면 특정 캐릭터를 굉장히 잘 소화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어요. 제겐 그 내면의 모습이 보이는데, 정작 배우는 그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못하고 소모돼요. 그 부분을 봐주는 감독이야말로 진정한 연출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30대가 넘어가면 여배우의 입지가 크게 줄어듭니다.

“제 연출의 소명도 그 부분이에요. 여배우 캐릭터에 진정성이 있으면 좋겠어요. 피상적이지 않고 인간적이고 실제적인 캐릭터. 30~40대의 중견 연기자가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요. 연기 안하고 가만 있어도 에너지가 나오는 배우! 유럽에선 많은 여배우가 40~50대에 전성기를 맞아요.”

잘 알려져있다시피 추상미는 연극인 고 추송웅의 딸이다. 추상미는 “<빨간 피터의 고백>은 아버지가 연출, 각색, 무대장치, 음악까지 다 맡은 작품이었다. 아버지는 배우를 넘어선 종합예술인이었다”며 “그런 DNA가 내 몸에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도 배고픕니까.

“판을 깔아놓으니까 막 쏟아져 나오네요. 지금은 창작에 대해 열려있는 시기에요. 한 끼 안 먹어도 배가 안고파요. 스마트폰에 메모하고, 카페에서 누구 얘기 들으면 귀기울여 듣고…. 많은 소재들이 절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쉬워지기 시작했어요. 지금 행복하고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