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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몰스킨, 나꼼수의 인기. <니치>

지금 팔리는 몰스킨은 사실 1997년 처음 나온 브랜드라는 놀라운 사실. 그들은 헤밍웨이, 마티스, 피카소가 '몰스킨'을 썼다고 홍보하지만, 이때의 몰스킨은 '기름먹인 가죽 재질의 양장본 수첩'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에 가깝다는 사실. 결국 지금의 몰스킨사는 '아방가르드의 추억'을 제품으로 만들어 파는 것뿐. 



▲ 니치…
제임스 하킨 지음·고동홍 옮김 | 더숲 | 336쪽 | 1만6000원

1969년 첫 매장을 연 미국의 의류업체 갭(Gap)은 오랜 시간 성공가도를 달렸다.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청바지와 티셔츠는 반항적인 10대와 그들의 부모, 조부모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브랜드 이름은 ‘세대 차이’(generation gap)에서 따왔지만, 갭의 옷은 세대를 포괄해 사랑받았다. 갭은 유럽, 아시아로 매장을 확대했으며 몇 개의 의류 회사를 인수해 덩치를 키웠다. 

1999년부터 모든 것이 변했다. 매장에 시끄러운 댄스 음악을 틀어놓은 라이벌 업체 아베크롬비 앤 피치가 젊은 고객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칸 어패럴, 에이치 앤 엠 등도 갭의 영역을 잠식했다. 갭 경영진은 젊은 고객들의 사랑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손바닥만한 상의, 밝은 핑크색 바지를 들여놓고 음악을 틀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10대는 자존심을 버린 갭의 전략을 비웃었고, 전통적인 30대 중반 이상의 고객은 갭의 변신을 불쾌해했다. “모든 이의 마음에 들려고 하면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하는 법입니다.” 갭의 전략을 냉소한 어떤 이의 말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고, 현대 사회의 트렌드 변화를 연구해온 제임스 하킨은 <니치>에서 종종 생태학에서 끌어온 비유를 든다. 이제는 경영학에서 ‘틈새 시장’(니치 마켓)을 의미하는 단어로 더 많이 사용되는 ‘니치’는 원래 생태학의 ‘생태적 지위’라는 뜻이다. ‘공룡’ 갭은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해 생태적 지위를 뺏긴 채 멸종의 길을 걷고 있다. 

과거의 니치가 주류 시장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소극적 생존 전략이라면, 하킨은 “이제 니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환경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유는 중간층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종이 생태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이 제각기 번성하고 있다. 

미국 인구가 1억3000만명이던 1939년 개봉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2억200만장의 티켓을 팔았다. 영화, 식품, 자동차 업계 거물 회사들은 ‘중간층’을 공략하면 됐다. 정치인들 역시 진보와 보수 사이 부동층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평균적인 소비자’의 시대였다.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은 달라졌다. 이들은 정보 소비자에서 정보 포식자로 변태했다. 이들은 온라인 서식지에서 무한정의 정보에 욕구를 드러내 원하는 것을 콕 집어낸다. 그리고 대중의 관심을 독점했던 주류 기업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갭은 혼란에 빠졌다. 종합지의 부수는 감소했고, 지상파 방송사의 시청률은 곤두박질쳤다. 정치인들 역시 모두를 위해 말하려 한다면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을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평범한 유권자’, ‘일반적인 시청자’는 사라졌다.

정보 포식자가 남다른 것만을 갈망하지는 않는다. 메뉴가 너무 많으면 무얼 먹을지 모른다. 포식자들은 집단을 이루며 붙어 다닌다. “열광의 대상 주위에 모여들어서 서로 관심사를 공유하면, 우리는 한층 깊이 대상에 대해 공감하고 더욱 세세한 지식을 추구”한다. ‘정치 오타쿠’는 뉴욕타임스가 아니라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를 구독하고, 공포영화 팬들은 <타이타닉>이 아니라 <쏘우> 시리즈를 관람한다. 

문제는 있다. 이들 새로운 대중이 “작은 상자들에 갇힐 위험” 때문이다. “비슷한 생각을 지닌 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들을 더 과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내면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방법으로 이뤄진다.…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의 인터넷 집단은 이슬람 근본주의와 같은 극단주의 활동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하나인 트위터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트위터리안들은 트위터 바깥 세상 혹은 자신을 팔로우(구독)하지 않은 사람들과 의사소통하기보다는, 자신을 팔로우하는 이들이 좋아하는 메시지만을 지속적으로 보낼 가능성이 높다. 

<니치>는 경제·경영서지만, 경제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의 흐름도 살핀다. 하킨은 “우리와 함께 자란 상업 및 문화의 바벨탑들은 대부분 우리의 발밑으로 무너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기업에는 고객에게 아부하는 제품을 만드는 대신, “제품의 독특한 특성에 집중하고 열광적인 청중을 꾀어”내라고 조언한다. 애플, 몰스킨이 그렇게 성공했다. <나는 꼼수다>의 인기를 보면 하킨의 조언이 기업에만 해당하진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