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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눈 티와 아편, <음식의 제국>

음식의 제국

에번 D G 프레이저·앤드루 리마스 지음, 유영훈 옮김/알에이치코리아/488쪽/2만원


지난 끼니에 무엇을 먹었는지 떠올려보자. 고슬고슬한 쌀밥과 구수한 된장찌개, 보기 좋게 담긴 초밥, 상큼한 드레싱을 얹은 샐러드…. 대체로 그 음식의 맛, 향, 모양이 생각날 것이다. 그런데 그 음식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까지 기억해본다면 어떨까. 음식의 재료로 쓰인 쌀, 두부, 참치, 올리브는 누가 어떻게 수확했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른 걸까.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거나 바다에 나가 직접 물고기를 잡아오지 않은 이상, 그 재료가 식탁에 오르는 과정에는 세계인의 손이 탄다. 나라 사이의 운송 수단이 발달하고 무역 장벽이 낮아진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노르웨이 어부가 잡아올린 고등어, 케냐 소년이 딴 커피콩, 미국 캘리포니아 농부가 기른 오렌지가 한국에 있는 우리의 입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먹는다는 것에는 전지구적인 정치·경제·문화의 과정이 개입된다. 


농경학자 에번 D G 프레이저와 저널리스트 앤드루 리마스는 음식이라는 키워드로 세계 문명의 흥망성쇠를 재구성한다. 사회가 급변하고 인간의 삶이 영향받은 큰 사건의 배경에는 음식이 직·간접적으로 엮여있었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다. 


수렵·채집을 위해 이동하며 살아가던 인류는 곡식을 기르면서 정주하기 시작했다. 인류 최초의 농부가 심을 종자를 고른 기준은 자연 재해에 대한 방어력이 아니라 알곡의 크기였다. 가능하며 많은 낟알을 맺어 많은 사람에게 먹일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곡을 많이, 크게 여는 곡식에는 그만큼 많은 물이 필요했다. 곡식에 물을 대기 위해선 관개수로가, 관개수로를 파기 위해선 혹독한 노동을 견디는 수많은 일꾼이 있어야 했다. 전제 정치, 그리고 국가의 탄생이다. 


그러나 농업 혁명에는 부작용이 있었다. 신선한 야채와 고기 대신 미적지근한 곡물 죽을 먹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건강은 오히려 나빠졌다. 곡물에는 필수아미노산, 철분, 단백질 등이 부족해졌고, 아이들의 발육도 저해됐다. 노동 시간도 길어졌다. 수렵·채집인이 한 주 평균 20시간 일했던 반면, 농경인은 40~60시간 일했다. 결정적인 문제는 전쟁이었다. 들소를 잡으러 다니면서 전쟁을 할 수는 없지만, 잉여 곡물은 군량이 됐다. 수렵·채집인들은 다른 부족과의 싸움이 붙을라치면 그저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만, 농경인들은 애써 일군 논밭을 버려두고 떠날 수 없었다. 전제국가의 조직화된 농부들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농업은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 지구가 인간의 농업으로 인해 변화하고 있었다. 농부들은 곡물을 기르기 위해 숲을 베고 동물을 몰아냈다. 논밭이 된 땅의 성질도 달라졌다. 식물이 자라기 위해선 17가지 원소가 필요한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질소다. 문제는 흙 속의 질소 양이 한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곡물을 기를수록 질소의 양은 줄어들었고, 해가 거듭될수록 같은 농지에서 나는 수확량도 감소했다. 지력이 떨어진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부족해진 질소를 보충하는 대신 다른 농지를 찾아나섰다. 로마 제국의 확장이다. 


로마 제국의 몰락도 식량난과 함께 찾아왔다. 로마 문명의 번성기는 기상학에서 부르는 ‘로마 온난기’와 일치한다. 기원전 250년~기원후 400년을 일컫는 이 시기는 지구가 몹시 따뜻하고 적당한 비가 내린 기간이었다. 작물은 죽죽 자랐다. 그러나 로마 온난기가 끝나자 제국 영토에서 올라오는 세금이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군대, 도로, 교역이 모두 망가졌다. 410년 서고트족 군대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로마 시민에게 돌아간 밀 배급량은 예년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로마는 이민족의 무력이 아니라 부족한 빵 때문에 무너졌다. 


스페인, 포루투갈이 시작해 영국, 프랑스가 패권을 이어받은 근대 유럽 제국주의 융성기의 주요 교역품도 식품이었다. 영국인의 오후 시간을 즐겁게 해주는 차 때문에 죽어나간 사람이 19세기에만 4000만명이었다. 1662년 영국의 왕 찰스 2세에게 시집온 포르투갈 캐서린 공주는 영국 왕실에 차문화를 전파했다. 당시 영국에 물 이외에 마실 것이라고는 맥주, 브랜디, 커피밖에 없었다. 캐서린은 남편이 애인들과 놀아나는 동안 홍차를 우리며 시간을 보냈고, 차문화는 즉시 영국 귀족 사이에 전파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의 차문화는 서민들에게까지 퍼졌다. 18세기엔 잉글랜드 전역에서 차를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런데 차는 전량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 민중에게 팔아넘겼다. 중국이 영국의 아편 밀매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자, 영국은 전함으로 맞섰다.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영국인들이 애프터눈 티를 마실 때, 중국인들은 아편을 피웠다. 


제국주의 식민지에 세워진 플랜테이션 농장에서는 본국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한 가지 작물만이 집중적으로 재배됐다. 지금은 스리랑카가 된 실론섬에 도착한 영국인들은 원시림을 깎아내고 커피 나무를 심었다. 커피 가격이 하락하자 이번에는 커피 나무를 베어내고 차 나무를 심었다. 영국은 찻잎 채취를 위해 인도에서 떠도는 타밀인을 데려와 투입했다. 그런데 영국 시장에 원활히 홍차를 공급하던 실론에 1876년부터 3년간 극심한 가뭄이 닥쳤다. 때마침 경기 침체 때문에 차값까지 폭락했다. 타밀 사람들은 남아도는 차잎을 먹을수도,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수만 명이 굶어죽었다. 


플랜테이션 농장이 아니더라도, 한 가지 작물을 심는 데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른다. 지력이 급속히 떨어지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아일랜드는 원래 목초지에 수많은 가축이 뛰어올던 곳이었다. 아일랜드 지주들은 산업혁명이 진행중이던 18세기 영국에 암소, 양털을 팔고자 했고, 그래서 경작지를 목초지로 바꾸었다. 아일랜드 농부들은 17세기 초반 스페인에서 들여온 감자를 심어 연명했다. 아일랜드 토양에서 잘 자랐던 감자는 다른 곡물에 비해 2배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었다. 1840년대 아일랜드 인구 800만명 중 300만명이 감자만 먹고 살았다. 1845년 9월 감자역병이 발생하자 감자 농사는 완전히 망했다. 100만명이 굶어죽었고, 100만명이 기근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해외로 떠났다.  


식품을 공산품처럼 생산하는 미국도 문제다. 온화한 날씨, 비옥한 토양을 가진 미국 캘리포니아는 미국산 과일과 견과류, 채소의 약 50%를 생산한다. ‘현대 농업의 표본’이자 ‘야채 및 과일 발전소’가 된 이 곳의 농부들은 농사 준비물 조달, 재배, 가공, 유통 등 전통사회의 농부가 해야했던 일 중 단 한 가지만 한다. 마치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처럼 한 가지 일, 즉 재배만 하면 나머지는 국제적인 농산물 기업들이 다 알아서 처리한다. 이러한 대규모 농업은 돈이 되지만, 심각한 환경오염이 따른다. 한 가지 작물만 심어진 농장은 그만큼 질병에 취약하다. 농부들은 작물을 농약에 담그다시피 한다. 게다가 아래로는 화학 비료를 쏟아붓는다. 캘리포니아 하천 인근 삼림의 89%가 농장이 됐고, 결과적으로 해안 습지는 말라버렸다. 대규모 축산시설의 동물 학대, 열악한 노동 환경, 환경 오염 역시 익히 알려졌다. 


저자들은 몇 가지 대안적인 움직임을 소개한다. 이제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공정무역, 유기농, 슬로푸드 등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아직 완전하진 않다. 공정무역 식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공급이 달리자, 공정무역 단체들은 ‘공정무역 인증’ 기준을 완화했다. 기존엔 작은 협동조합, 가족 농장에서 나온 식품만 인증했지만, 이제는 농장에서 나온 상품 일부에도 공정무역 마크를 붙여준다. 유기농 식품이 도시 고소득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자, 유기농의 기준은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것’ 정도로 좁혀졌다. ‘유기농 우유’의 이미지는 푸른 목장에 드문드문 방목된 젖소가 풀을 뜯어먹은 뒤 생산하는 우유겠지만, 실제로는 축사에 갇혀 곡물이 포함된 사료를 먹으면서 만든 우유도 포함된다.  


<음식의 제국>은 16세기 피렌체의 상인이자 세계 무역 여행을 기록한 최초의 유럽인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1573~1636)의 세계 일주 여정을 따라가며 세계 문명 속 음식의 역할을 소개한다. 카를레티는 세계를 돌며 식료품 등을 거래하며 이문을 남기려 했던 평범한 상인이었다. 자신의 물욕, 성욕, 식욕을 채우는데 충실했고, 이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대륙 서안의 카보베르데 군도를 거쳐 파나마 운하를 지나 페루 리마까지 갔다가 필리핀 마닐라, 일본 나가사키, 중국 마카오에 들른다. 이후 인도의 고아에 머물다가 훗날 나폴레옹이 유배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고초를 겪은 뒤 네덜란드 미델뷔르흐를 통해 유럽에 돌아온다. 이 여행에는 15년이 걸렸다. 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온갖 환락, 고난을 경험한 끝에 큰 부를 축적했지만, 귀향길에 네덜란드 사략선(국가의 허가를 받아 무장한 개인선박)에 전재산을 털린다. 그의 여정은 인류가 기르고 사냥하고 교역해온 1만3000여년 음식의 연대기를 압축해 보여준다.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비슷한 점은 “음식으로 장난치면 벌 받는다”는 것이다. 1917년 미국 뉴욕의 유대인 주부들은 식료품 가격이 중간 상인들의 농간에 의해 갑자기 오르자 매디슨스퀘어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비싼 가격을 반대하는 어머니 연맹’이란 이름의 이 여성들은 “오직 마진이 가장 적게 붙은 몇 가지 식료품만 사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뉴요커들은 이들의 기세에 눌려 식품을 사지 못했다. 팔리지 않은 식품은 썩어갔고, 상인들은 결국 굴복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명박 정권은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숱한 잘못들을 저질러 비판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위기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한 순간 찾아왔다. 표현의 자유 문제, 검찰 개혁 문제, 재벌 중심 경제 문제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청앞 광장을 가득채우는 일은 없다. 음식 문제 정도가 대중을 그토록 분노케할 수 있다. 


<음식의 제국>은 새로운 지식이나 지혜를 전하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대략 알고 있던 음식과 문명에 대한 상식을 구체적인 정황과 명쾌한 서술을 통해 읽기 쉽게 전한다.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수작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