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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본능적인 정의감,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올리버 트위스트>

<빌러비드>를 읽은 김에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꺼내들었다. 오래전에 챙겨두었으나 계기가 없어서인지 손이 가지 않은 책이다. 


당연히 두 편의 소설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낸다. <빌러비드>가 처절하고 비극적이고 잔혹하다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유쾌하고 희극적이다. 가끔 잔혹한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빌러비드>의 시이드가 벌인 일에 비하면 장난이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살인 장면이 잔혹하지 않은 것처럼. 


허클베리 핀은 주정뱅이에 폭력적이며 인종차별주의자인 아버지로부터 도망친다. 그렇다고 자신을 돌보아준 '문명화'된 여성들에게 의식주를 맡기고 싶지도 않다. 헉은 그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내려가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허클베리 핀, 그와 함께 한 도망노예 짐은 뗏목 위의 여정에서 영국 출신 왕과 귀족임을 자처하는 두 명의 사기꾼을 만난다. 이들이야말로 어쩌면 그저 무기력한 인물일 뿐인 헉의 아버지보다 더한 악당이다. 가식 없고 본능적이며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자연 속에 파묻히길 좋아하는 미국 소년이 영국 성인들의 나쁜 행동을 폭로하는 과정은, 미국 문학이 영국 문학에 던지는 독립선언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이전에 그런 작품이 있었다면 내가 잘못 말한 것일테고)


14세 소년 허클베리 핀에겐 '본능적인 정의감' 같은 것이 있다. 흑인도 백인과 같이 슬픔, 아픔, 그리움을 느끼고,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된다는 점을 '그냥 안다'. 그리고 그 앎을 실천한다. 비록 힘은 없지만, 온갖 기지를 발휘해서 상황을 헤쳐나간다. 허클베리 핀의 '기지'에는 '습관적인 거짓말'도 포함되지만, 이 소년의 거짓말을 비난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일 때문에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청소년판으로 읽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1885년, <올리버 트위스트>는 1838년 출간됐다. 50년 가까운 차이가 나는 샘인데, <올리버 트위스트>가 런던이라는 당대 최대 규모의 대도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미시시피 깡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당시 미국과 영국의 산업적 발달상이 너무나 확연히 차이난다. 그러니까 올리버가 헉보다 50년 앞서 산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우연에 우연이 남발되는, 현대의 작가라면 패러디를 위해 사용하거나 막장 대본을 위해 눈 딱 감지 않는다면 쓰지 않을 플롯이 등장한다는 점은 좀 난처했다. 


흥미로운 건 <올리버 트위스트>도 궁극적으로 소년의 '본능적인 정의감'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 올리버는 천애고아라 누구에게도 제대로된 윤리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도둑질을 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안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올리버의 본능적인 정의감, 선량함이 결국 그를 구원한다. 이 책에서 구원은 (유사) 가족을 되찾고, 돈도 조금 생긴다는 뜻이다. 반면 올리버를 괴롭힌 악당들은 사고 혹은 사형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50년 차이인데 두 작품을 비교하면 한 쪽이 훨씬 고색창연하다. 당시 사회의 변동, 작가의 테크닉 발전이 생각보다 빨랐다고 이해하고 넘어가보도록 하자. 아니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대중문학의 규칙 같은 것이 있었던 영국, 없었던 미국의 차이라고 상상해보도록 하자. 




찰스 디킨스(위)와 마크 트웨인. 두 분 다 한 성깔 하게 생기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