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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가 된 호스피스, '크로닉'


아름답고 사려 깊은 영화. 


크로닉

연출 미셸 프랑코/ 출연 팀 로스/ 15세 관람가/ 94분




데이비드(팀 로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사다. 데이비드가 여느 간호사와 다른 점은 환자의 삶과 욕망에 깊숙히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여자 환자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들른 바에 가서 만난 젊은 부부에게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고 소개하고, 건축가 출신의 환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설계한 집을 둘러보기도 한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이같은 행동은 세상의 오해를 부른다. 데이비드는 환자 가족에게 고소당한 뒤 직장을 잃고 지인의 소개로 새 환자를 맡는다. 그러나 환자는 데이비드의 과거를 알고는 무리한 부탁을 해온다. 

현대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그것은 환자의 병을 치료하거나 완화하는데 탁월하다는 점을 뜻할 뿐이다. 사람이 태어나 힘겹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마음의 곡절을 헤아리는데 있어서 현대 의학은 여전히 무력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복잡한 생명 유지 장치에 의지해 간신히 심장만 뛰고 있는 환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것이 진정 인간의 존엄을 배려하는 최후의 광경인지, 현대 의학은 여전히 숙고해야 한다. 




데이비드는 현대 의학이 간과한 틈새를 잇는 간호사다. 데이비드는 환자가 먹고 싸고 씻는 일을 돌볼 뿐 아니라, 환자의 마음까지 살핀다. 환자의 남편이 되었다가 남동생이 되었다가 종래에는 신 혹은 천사의 역할까지 수행하도록 요구받는다. 능숙한 간호사인 데이비드는 일을 맡기 전 주저할지언정 일을 할 때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마치 훌륭한 셰프가 주어진 재료로 최선의 요리를 하듯, 환자의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이런 이례적인 역할 수행은 세상의 오해를 산다. 데이비드 역시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에 매달리지는 않는다. 그저 묵묵히 돌아서서 다음 환자를 돌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데이비드는 오해받고 핍박받는 성자를 연상시킨다. 성스러운 인물은 세상의 관행, 풍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우리 삶의 핵심으로 다가가기에 종종 돌팔매질을 당한다. 그 과정에서 극단적인 시련을 겪기도 한다. 데이비드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결말도 관객에겐 충격적일지언정, 성자에겐 흔한 일이다. 

<저수지의 개들> <헤이트풀8> 같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에서 폭력적이고 음산한 인물을 연기했던 팀 로스는 이 영화에서 표졍이 거의 없고 조용한 간호사를 연기한다. 실제 <크로닉>에는 음악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영화는 단 97개의 컷으로만 편집됐다. 한 컷 당 평균 1분의 느릿한 영화지만, 병마가 안기는 고통 속에서도 평화로운 종말을 향해 최선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처연하고 아름다운데다가 예술적 긴장까지 선사한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이다. 1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