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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초상, <아메리칸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1974~2013)은 네번의 참전에서 160명의 적을 사살한 미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실 소속의 저격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그의 삶을 다룬다. 그러나 난 이 영화의 제목을 그냥 <아메리칸>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영화가 그리는 크리스 카일이야말로 '진짜 미국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은 넓은 나라다. '합중국'(united states)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각 주마다 문화가 다르다. 영화에는 거대한 뉴욕이나 캘리포니아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텍사스 사람인 크리스 카일이야말로 '미국인'의 진짜 모습이다.   


카일은 텍사스 그리고 미국에 대한 애정에 넘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애정은 텍사스 혹은 미국 바깥의 사람에게는 절대 가닿지 않는다. 카일은 지역의 로데오 경기에 참여한 뒤 그 증거로 버클을 받아 의기양양하게 돌아온다. 하지만 로데오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그깟 철조각이 무슨 의미일까. 아니다 다를까, 카일의 오랜 여자친구마저 남자친구의 텍사스 카우보이 놀이에 신물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다. 


카일은 애향심, 애국심 이전에 가족애가 강한 남자다. 어린 시절에도 동생이 학교에서 친구에게 얻어맞자 상대방을 거의 죽여 놓았다. '우리편'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이게 카일의 무의식이다. 때마침 누군가 미국을 건드린다. 빈 라덴의 알카에다가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하자 카일은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입대한다. 카일은 혹독한 훈련을 거친 뒤 네이비실 대원이 돼 이라크에 파병되고, 엄청난 활약을 한다. 알카에다 대원들은 카일의 동료, 카일의 나라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속속 죽어나간다. 아이가 대전차 수류탄을 들고 달려나올 때는 잠시 심적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아이를 쏘지 않으면 동료가 죽기에 결국 최후의 순간에 방아쇠를 당긴다. 



동료의 시신 앞에서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일




핸섬한 백인 남우 브래들리 쿠퍼는 크리스 카일 역을 위해 몸집을 불렸다. 체격이 좋아 보인다기보다는 어딘지 둔해 보인다. 표정도 나사가 하나 둘 빠진 듯 하다. 그는 늘 휴대용 성경을 들고 다니지만 읽는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카일은 책은커녕 신문조차 읽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카일의 삶은 사냥, 로데오, 저녁의 맥주 한 병 정도로 단순하게 요약된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계의 정세에도 관심이 없다.  


카일은 재미없는 사람이다. 함께 있는 사람을 지켜주기는 하지만, 재미있게 하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자녀들과의 관계도 나쁘진 않지만, 그다지 상냥한 아빠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가진 삶의 원칙 몇 개를 아이(특히 아들)에게 주입하는 것으로 자식 교육 혹은 소통을 갈음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카일은 현실 적응에 문제를 겪는다. 그러나 그 정도가 동료 군인들처럼 심하지는 않다. 그의 부적응은 '이라크에선 아직도 미군이 죽어가는데, 미국 본토에선 쇼핑센터나 다닌다'는 사실에 기인할 뿐,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가책에 있지는 않다. 아이건 여자건 남자건, 미국의 적이라면 죽여야 한다.  


가족, 동료, 나라는 지켜야 하며, 지키는 방법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직접적 폭력 대응이다. 그가 '친구'의 범위를 넓혀준다면 좋겠지만, 카일은 그럴 의사가 없어 보인다. 이런 생각과 행동은 '코스모폴리탄'이니 '세계시민'이니 ''노마드'니 하는 말들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과 맞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미국인의 오랜 삶의 방식이다. 2차대전 참전 이전까지 미국 정부는 '고립주의'를 취했다. 요즘에야 뉴욕, 로스앤젤레스의 다문화적, 국제적 모습이 강조되지만, 미국인의 진짜 특성은 <아메리칸 스나이퍼>에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