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미지/영화는 묻는다

니체, 허무의 품격. <토리노의 말>

토리노의 말

허무의 밑바닥엔 무엇이 있습니까.

6일 끝나는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국제 영화제에서 유명하지만 국내 관객에겐 매우 낯선 헝가리 감독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을 먼저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올해 56세의 타르는 <토리노의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영화는 조만간 극장에서 개봉할 예정입니다.


5년에 한 번 꼴로 기나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영화를 내놓곤 했던 그가 이 은퇴작에서 전한 메시지는 ‘허무’였습니다. 영화는 ‘허무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시작합니다.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 머물던 니체는 마부가 고집센 말에게 마구 채찍질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니체는 사건 한복판에 뛰어들어 말의 목덜미를 감싸안고 흐느낍니다. 숙소로 돌아온 니체는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라는 말을 남긴 뒤 10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다 세상을 뜹니다. 


토리노의 말

<토리노의 말>의 주요 등장 인물은 아버지, 딸, 그리고 말입니다. 146분의 상영시간 동안 부녀는 몇 마디 말을 나누지 않습니다. 거센 폭풍이 한시도 쉬지 않고 불어닥치는 황무지의 오두막, 옷을 입고 물을 긷고 감자 한 알로 식사를 대신하는 이들의 6일간의 모습이 이 흑백영화의 전부입니다.

물론 6일 사이에는 작은 변주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않는 말은 차츰 병들어 갑니다. 술을 빌리러 온 이웃 남자는 세상과 인간의 근본에 대한 비관적인 말을 늘어놓습니다. 인근을 지나던 떠돌이 집시들은 부녀를 위협합니다. 결국 힘겹게 길어 올리던 우물물이 마릅니다. 부녀는 손수레에 간단한 가재도구를 싣고 집을 떠나려 하지만 곧 돌아옵니다. 집안을 희미하게 비추던 불빛마저 조금씩 사그러듭니다. <토리노의 말>은 압도적인 절망과 허무의 분위기에 차츰 잠식돼 갑니다. 인간과 동물은 힘겹게 지상의 삶을 이어왔지만, 이 삶이 계속될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의 구체적인 재난이나 위협 때문이 아닙니다. <토리노의 말>이 보여주는 절망과 허무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조건에 맞닿아 있기에 더욱 뿌리가 깊습니다.


다시 니체를 떠올려 봅니다. 니체는 피안에 가치를 둔 플라톤주의를 망치로 깨 부쉈습니다. 그 결과 광막한 허무에 노출된 차안의 나대지가 나타났습니다. 니체는 “다 부질없다” 식의 피상적 허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가치로 촘촘히 구축된 건물을 허물고 모든 걸 새로 시작하길 원했습니다.


이 허무에는 품격이 있습니다. 정신의 도저한 힘을 길러, 자기 자신 그리고 세상과 치열하게 맞서싸운 자만이 허무를 말할 자격을 갖춥니다. 허무의 나대지에 새 싹이 자랄까요. 니체도, 타르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이상 파괴할 것도, 내려갈 곳도 없다는 사실은 의지의 반석이 될 것입니다. 

벨라 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