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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국가에 투항한 NGO, <저항주식회사>



한국에서 안좋다고 느낀 현상이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안도감을 느껴야 할지 난감함을 느껴야 할지. 



 저항주식회사

 피터 도베르뉴·제네비브 르바론 지음, 황성원 옮김/동녘/276쪽/1만4000원


도심의 번화가를 걷다가 유엔난민기구, 그린피스, 국경없는 의사회 등 세계적인 비정부기구(NGO)가 후원회원을 모집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자원봉사자나 활동가가 붙임성도 좋게 말을 건넨다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후원회원을 모집하는 이들은 대부분 전문 마케팅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다. 이들은 회원 모집 실적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다.


그게 잘못된 일일까. 두 가지 시선이 있다. 마케팅 기업을 동원한 회원모집은 대의를 알리기보다는 성과를 올리는데 급급해 NGO의 도덕성을 훼손할 여지가 있다. 동시에 이같은 방식은 시민에게 NGO의 활동상을 더 세련되고 광범위하게 알리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저항주식회사>(원제 Protest Inc.: The Corporatization of Activism)를 보면 이같은 딜레마가 한국만의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캐나다, 영국을 기반으로 사회운동을 연구해온 저자들은 동시대의 시민사회운동이 마주한 위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운동가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먼저 오늘날 사회운동이 처한 조건을 살필 필요가 있다. 국가, 기업의 전횡에 맞서 인간, 동물, 자연을 보호하려는 운동가들이 쉬운 삶을 살았던 적은 없지만, 요즘 들어 시민사회운동은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국가는 국가 권력에 도전하는 운동가들을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억압한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수반들은 ‘안보’라는 깃발 아래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운동 당시 미 국토안보부 등 요원을 시위대 캠프에 잠입시켰고,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포했다. 영국 런던 경찰청 소속의 한 경찰은 아나키스트단체, 반인종주의단체, 환경단체에 잠입해 시위를 조직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2010년 조직 탈퇴후 해외로 도피했다. 이 경찰이 올린 정보로 유명 운동가들이 기소됐다. 스페인, 독일, 그리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국가 정상들은 ‘생태 테러리스트’라는 말까지 사용하며 운동가들을 적대시한다.


인간 관계가 파편화되고 있다는 사실도 사회운동에 불리하다. 사회학자 라이트 밀스는 운동가들이 사적인 문제를 공적인 사안으로 바꿔놓기 위해 투쟁해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퇴근후 선술집에 들러 우정을 다지곤 했던 노동자들은 무의식중에 집단의 정치적 힘을 깨달았으나, 이제 그러한 노동자 문화는 사라졌다. 공동체는 사라졌고, 사회적 유대는 끊어졌다.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된다.





운동가들은 차츰 순화됐다. 정부를 타도하거나, 다국적 기업의 철폐를 부르짖는 과격파는 거의 없다. 대신 공정무역, 친환경상품 시장 등으로 대표되는 ‘신사적인 자본주의’를 조곤조곤 주장한다.


운동의 방향이 전환한 배경에는 NGO와 기업·국가의 제휴가 있었다. 운동은 기업의 도움을 받거나 기업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세계자연기금은 코카콜라, 환경보전기금은 맥도날드의 후원을 받는다. 환경단체 시에라클럽은 천연세제 그린웍스를 홍보한다. 그린웍스엔 시에라클럽의 로고가 찍히고, 시에라클럽은 그 대가로 판매액의 1%를 받는다. 1971년 미국 핵무기 실험을 막기위해 알래스카 서쪽의 암치카섬으로 향했던 급진적 평화운동가 집단 그린피스는 이제 300만명의 후원자를 가진 글로벌 브랜드가 됐다. 2011년 그린피스 상임이사의 연봉은 1억5000만원에 이른다.


이들이 설립 초기의 목적 의식을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글로벌 NGO들의 최근 활동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보다는 건전한 소비를 촉진하는 쪽으로 향한다는 점은 뚜렷하다. 예를 들어 그린피스의 최근 가장 큰 성과는 코카콜라 등 대기업과 협력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천연 냉매’를 개발하고, 완구회사 마텔이 바비 인형 포장 방식을 바꾸도록 한 일이다. 이런 일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린피스의 과거 위상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책을 읽는 내내 한국의 시민운동, 기업, 국가의 역학 관계가 떠올랐다. 한때 가장 신뢰받는 집단으로 꼽혔던 한국의 NGO들은 이제 기업 후원에 의지해 사업계획을 짜고, 일부 운동가들은 아예 국가, 지자체의 경영에 직접 뛰어들었다. 그것도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한 방식일 수 있겠다. 하지만 <저항 주식회사>의 저자들은 “많은 운동가들이 승자의 편으로 전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런 일들이 “가장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자본주의의 ‘느린 폭력’에 자기도 모르게 힘을 보태는 일”이라고 우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