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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노장의 한 방, '나, 대니얼 블레이크'


기사를 쓸 때는 거래가 진행중이었는데, 얼마후 수입사가 결정됐다. 개봉일자는 정해지지 않았다. 수입제목은 뭐라고 할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의 오프닝 타이틀이 올라가는 동안 로봇보다 무미건조한 상담사와 조금 화난 듯한 남자의 전화 대화가 들려온다. “선생님, 스스로 모자를 쓸 수 있나요?” “무슨 소리예요. 전 심장이 아팠다니까요.” “선생님, 묻는 말에 답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습니다.” “네. 모자 쓸 수 있습니다.” “선생님. 스스로 자명종을 누를 수 있나요?” “아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전 심장이 아프다니까요.”

상담사는 실업급여를 받으려는 남자를 실제로 돕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매뉴얼의 항목을 채우는 데 관심이 있어 보인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은 영국 뉴캐슬에 사는 59세의 목수 대니얼 블레이크가 죽는 날까지 계속될지도 모른다. 제69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선보인 켄 로치(80)의 신작 <나, 대니얼 블레이크>는 빈자에게 모멸감을 주는 관료적 복지제도의 문제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영화다. 

블레이크는 성실한 남자였다. 아내를 잃고 홀로 살아가는 그는 심장에 이상이 있어 일을 쉬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국가는 블레이크가 실제로 구직활동을 했다는 증거를 가져와야 실업급여를 줄 수 있다고 한다. 블레이크는 “의사가 쉬라고 했는데 무슨 구직이냐”고 항변하지만, 국가는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결국 블레이크는 실제로 하지도 않을 일을 찾아다니며 구직활동 시간을 채워야 하는 처지다. 더도 덜도 아닌, 성실히 일한 대가로 살아가던 블레이크에게 이 같은 상황은 모멸감을 안긴다. 그러던 중 블레이크는 어린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가난한 싱글맘 케이티를 만난다. 블레이크와 케이티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돕지만, 둘의 앞날은 밝지 않다. 

역사는 전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블레이크가 부딪힌 복지국가의 허상은 20세기 초반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은 관료제의 기괴함과 다를 바 없다. 담당자와 전화 한 통 하기 위해서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통화 대기음을 들으며 1시간47분을 기다려야 한다. 블레이크는 수화기를 든 채로 택배를 받고 목공일도 한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니, 온라인으로 접수하라며 돌려보낸다. 블레이크는 컴퓨터에 친숙하지 않지만 물어 물어 겨우 항목을 채운다. 그리고 ‘전송’을 누르니 컴퓨터가 다운된다. 마치 컴퓨터와 국가가 한통속인 듯 관료적 복지제도의 장벽을 무자비하게 높인다.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제도의 틈새를 파고드는 건 선한 이웃 사이의 연대다. 자괴감에 빠져 은둔한 블레이크에게 케이티의 어린 딸 데이지가 찾아온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자 데이지는 문 사이로 말한다. “아저씨. 저희를 도우신 것 맞나요?” “맞아. 도왔지.” “그럼 이번엔 제가 도우면 안되나요?” 무사안일한 실업급여센터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는 직원이 있다. 그는 블레이크가 컴퓨터로 문항을 작성하는 걸 직접 돕는다. 그러다가 상사에게 “자꾸 선례를 남기면 안된다”는 꾸중을 듣기까지 한다. 

켄 로치는 “국가는 도움이 필요한 빈곤층에게 복지를 제공할 때 일부러 잔인한 태도를 취하고, 관료제의 의도된 비효율성은 정치적 무기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등장인물들은 영어를 쓰지만, 칸영화제 상영본에는 영어 자막이 붙었다. 영어를 하는 이조차도 뉴캐슬의 강한 사투리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켄 로치는 2년 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한 <지미스 홀>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소문이 무색하게 제자리로 돌아와, 10년 혹은 20년 전과 비슷한 형식, 감정의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로치가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로치가 사는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로치는 그에 대해 가장 정확한 시선을 견지하고 있을 뿐이다. 로치는 단순하고, 간결하고, 힘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번 칸국제영화제 기간에 국내 몇 군데의 수입사가 <나, 대니얼 블레이크>의 수입 의사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이 원활히 이뤄질 경우, 조만간 국내에서도 <나, 대니얼 블레이크>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