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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극의 진화 '프라이빗 라이프' 가족은 픽션의 주요한 테마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도 따져보면 가족극이다. 햄릿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비슷한 배우가 비슷한 가족 역할을 연기한 영화를 찍어 대가로 인정받는 사람도 있다. 오즈 야스지로다. (요즘 바탕 화면에 오즈 야스지로 묘비 사진을 깔아두었다. 원래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유전에서 불 뿜어나오는 장면이었는데, 그게 요즘 주변 상황 같아서...) 넷플릭스에서 '프라이빗 라이프'를 봤다. '코미디'라고 돼있긴 한데, 거의 웃지 못했다. 오히려 영화 속의 상황과 감정이 너무 인텐스해서(영화 속에서도 '인텐스'라는 표현이 몇 번 나온다), 어젯밤 반을 보고 오늘 오전 나머지를 봤다. 요즘 내 감정적 체력은 이런 인텐스한 영화를 두 시간 보아낼 수 없는가보다. 40대에 접어든 뉴욕의 극작가 리처드.. 더보기
시네마란 무엇인가, '아이리시맨' **스포일러 있음 마틴 스콜세지는 마블 영화를 두고 "시네마가 아니다"라고 했다. 스콜세지의 '시네마'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신작 '아이리시맨'이 시네마인줄은 알 것 같다. 스콜세지는 이 영화를 제발 스마트폰에서는 보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난 넷플릭스에서 공개하기 이틀 전 시네큐브에서 '아이리시맨'을 보고, 넷플릭스에서 공개 후 다시 봤다. 상영시간이 3시간30분에 달하니, 며칠 사이 7시간을 이 영화에 투입한 셈이다. 며칠 후 또다른 3시간30분을 써도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트럭 운전사 프랭크(로버트 드니로)가 갱스터 러셀(조 페시)를 만나 '궂은 일'을 맡으며 성장하는 대목, 프랭크가 전설적인 트럭노조 지도자 지미 호파(알 파치노)를 만나 친분을 쌓는 .. 더보기
'겨울왕국2'의 안티클라이막스 ***'겨울왕국2'의 스포일러가 있음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순간 정말 끝났다. '겨울왕국2'는 한국에서도 1000만 관객을 노리는 글로벌 콘텐츠지만, 대중영화의 익숙한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안티 클라이막스'라고 해야할까. 클라이막스에 이르지 않고 영화가 끝나는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 대목이 클라이막스로 짐작되는데, 다시 생각해도 클라이막스가 해소되는 순간의 쾌락을 의도한 것 같지 않다. '겨울왕국2'에는 적(악당)이 없다. 강력하든 우스꽝스럽든,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악당이든 나름의 현실적 이유가 있는 악당이든, 가족 영화에는 악당이 필요하다. 하지만 '겨울왕국2'에서는 엘사와 안나 자매가 누구와 맞서 싸우는지 모호하다. 엘사가 목숨을 걸고 찾아간 곳에도 악당은 없다. 엘사가 최종 목적.. 더보기
자매 갈등은 어떻게 공적 의무와 충돌하는가, '더 크라운' 1년 전쯤 넷플릭스 '더 크라운'을 몇 편 보다가 접어두었다. 공들인 '웰메이드' 시리즈인줄은 알겠으나, 전개가 지지부진한데다 캐릭터들의 고뇌에 온전히 빠져들기 어려웠다. 예기치 않게 일찍 왕위에 오른 20세기 중반의 영국 여왕 이야기는 나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배우를 교체해 시즌 3이 방영될 예정이라는 소식에 보다 만 지점에서 다시 관람을 시작했다. 이번엔 좋았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시리즈의 분위기에 좀 싫증이 나기도 한 터였다.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세 줄짜리 시놉시스와 예고편을 보면 대단히 독창적이지만 막상 본편은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은 작품들이 많았다('하이 컨셉'이라 해야 할까). 그러다보니 넷플릭스를 뒤지며 뭘 볼까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관람패.. 더보기
불만과 혼란의 영화, '조커' *스포일러 있음. 불만과 혼란의 영화. '조커'는 그런 영화다. 조커는 DC코믹스에서 배트맨의 숙적이다. 잭 니컬슨, 히스 레저 등이 조커를 연기해왔다. 조커는 돈도 없고, 가문도 없고, 초능력도 없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면서도 질서를 추구하는 배트맨을 괴롭히지만, 왜 괴롭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돈 때문도 아니고 세계 정복을 위해서도 아니고, 복수 때문도 아니다. 왜 나쁜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커는 무섭다. 우스꽝스러운 광대 놀음을 하는 것 같지만, 우스꽝스러운 일이 허용되지 않을 법한 순간에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이기 떄문에 무섭다. 조커는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려 한다. 하지만 혼란 이후의 헤게모니 같은 것을 노리지도 않는 것 같다. 그저 세계가 혼란에 빠지는 걸 즐길 뿐인듯하다. 그래서.. 더보기
한 영화팬의 애도와 추억,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스포일러 있음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영화관에 들어갔지만, 기대치 이상의 감정으로 나왔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매우 이모셔널한(감상적, 감정적이라는 표현보다 왠지 '이모셔널'이 적절하다고 느낀다) 영화고, 그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이 들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어쩌면 이 두 가지 관점은 결국 연결된다. '할리우드'는 60을 바라보는 타란티노가 이모셔널하게 돌아보는 추억, 역사, 소망, 꿈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할리우드'는 미국 문화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라 할만한 '찰스 맨슨 패밀리'의 샤론 테이트 살해 사건을 다룬다. 찰스 맨슨의 사주를 받은 3명의 불한당이 1969년 8월 8일 배우 샤론 테이트-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집에 침입해 임신 8개월의.. 더보기
일과 삶이 엮이는 순간, '본딩' 넷플릭스 시리즈 '본딩'을 봤다. '러시아 인형처럼' 이후 오랜만에 끝까지 본 넷플릭스 시리즈였다. 일단 끝까지 보기에 부담이 없다. 편당 15분 안팎, 총 7편으로 구성돼 있다. 시리즈 전부를 봐도 2시간 정도라는 얘기다. 모바일폰 환경,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매체 환경이 이런 분량의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게이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인 피트가 오랜 친구 티프의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극이 시작된다. 티프의 직업은 '도미나트릭스'다. 생소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성적으로 지배적인 여성'을 뜻한다. 티프는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 간지럼을 태워달라거나, 펭귄옷을 입고 씨름을 한다거나, 막말을 들을 때 성적으로 흥분된다는 남자들이 티프를 찾아온다. 티프는 고분.. 더보기
과격한 보헤미안 랩소디? '더 더트'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영화의 기획부터 제작까지 석 달만에 해낼 순 없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넷플릭스에서 본 음악영화 '더 더트'는 '보헤미안 랩소디'와 유사한 궤적을 가진다. 물론 좀 더 과격하긴 하다. 그건 퀸과 머틀리 크루의 음악, 태도적 간극에 기인한 것이기도 할테고. 프레디 머큐리가 성적, 인종적 소수자이긴 했지만, 퀸의 다른 멤버들은 비교적 '정상가족'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머큐리의 떠들석한 파티를 묘사했지만, 그런 행동이 당대 록커들의 태도에 비해 그다지 튄다고 볼 수도 없다. 영국의 록 신은 이미 섹스 피스톨즈 같은 '개쌍놈'의 음악이 휩쓸고간 뒤였으니까. 하지만 머틀리 크루는 차원이 다르다. 어느 록커들의 삶에 견주어봐도 떠들.. 더보기
이것저것 섞여 더럽지만 아름다운 강물, '아사코' **스포일러 있음어제 오전에 극장에서 다섯명 쯤의 관객과 함께 '아사코'를 봤다. 영화가 너무너무 이상한데, 바로 그런 이유로 흥미진진했다. 서사는 종잡을 수 없었지만, 감정은 정확히 묘사됐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이 주요 소재라는 점에서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까지 본 멜로 영화는 아니다. 이상한 흐름이 자꾸 생각나고, 왜 그리 이상하게 찍었는지 궁금하고, 스스로 해명해보고 싶다. 훌륭한 영화라는 뜻이다. 줄거리만 요약해도 이상하다. 오사카의 아사코는 어느 사진전에서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말도 안되게 급작스럽게 시작한 사랑이이었다. 하지만 바쿠는 안정적이기보단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저녁에 빵 사러 간다고 나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돌아오는 사람이다. 빵 사러 갔다가 동네 목욕탕에 들렀.. 더보기
군주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실존인물인 영국 앤 여왕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어딘지 실제 이야기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아마 영화의 양식이 지금까지의 시대극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여왕이 중심인 영화야 많았지만, 그의 측근들까지 모두 여성으로 그린 영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여왕과 두 여성 측근에 의해 조종되는 말에 불과하다. 권력있는 신하들조차 여왕 하녀의 술수에 놀아난다. 세습군주국가의 많은 왕이 그러했겠지만,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은 꽤나 이상하다. 군주로서의 의무감으로 국정을 억지로 수행하지만, 이웃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국가를 운영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안아픈 데가 없어서 회의에 불참하는 일이 잦고, 변덕이 죽 끓듯 하고, 기괴한 컴플렉스까지 갖고 .. 더보기
완결에 대해, '알리타: 배틀 엔젤'과 '킹덤'의 경우 ***스포일러 있음'알리타: 배틀 엔젤'은 지금보다 더 근사할 수 있었던 영화다. 기술적으로 이 영화는 크게 흠잡을데가 없다. 이미 할리우드의 특수효과 기술은 가상 캐릭터를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 재현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이보그'는 SF의 오랜 소재지만, '알리타'는 인간과 사이보그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이질성을 극복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하는 세상을 시각적, 감정적 이물감 없이 보여준다. 사이보그지만 또한 10대 소녀의 외모와 행동 방식을 가진 알리타는 10대 소년과 자연스럽게 사랑한다. 알리타가 심장을 꺼내 보여주며 사랑을 증명하려 하자 소년 휴고가 당황하는 장면은 인간과 기계가 교류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마주칠 '언캐니 밸리'를 재치있게 그려.. 더보기
50대 액션 스타, '폴라' 넷플릭스 영화 '폴라'를 보다. 이름이 낯선 스웨덴 감독 요나스 오케르룬드가 연출했다. 필모그래피에서 영화 쪽은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다. 대신 U2, 콜드플레이, 비욘세, 그리고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경력이 확 들어온다. '폴라'는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에 대한 선입견을 고스란히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화려한 스타일(그리고 그것이 전부). 던컨(매즈 미켈슨)은 50을 앞두고 은퇴 직전인 청부살인자다. 던컨은 은퇴와 함께 회사로부터 거액의 퇴직금을 받는다. 하지만 돼먹지 않은 사장은 그 퇴직금이 너무 아까워 은퇴 사원들을 미리 죽이려 한다. 그러면 퇴직금을 아껴 회사 자산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은 젊은 킬러들을 던컨에게 보낸다. 하지만 애송이들에게 쉽게 죽을 던컨이 아니다. 이러한 종.. 더보기
청소년이 볼 수 없는 청소년물, '아메리칸 반달리즘' ***스포일러 있음넷플릭스에서 '아메리칸 반달리즘'(American Vandal) 시즌 1, 2를 봤다. 시즌 1은 고등학교 교직원 주차장에 있던 차량들에 누군가가 붉은 페인트로 남성 성기 낙서를 해놓은 사건을, 시즌 2는 고등학교 급식 레모네이드에 설사제를 넣거나 피냐타 안에 똥을 넣거나 하는 식의 '똥 테러'를 그린다. 두 명의 고등학생 프로듀서들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해나가는 페이크 다큐 형식이다. 두 사건 모두 유력한 용의자가 드러났고, 해당 학생은 퇴학당한 상태다. 일단 부딪히는 저널리즘 정신을 가진 두 프로듀서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꼼꼼히 살핀 끝에, 진범으로 몰린 이가 진범이 아님을 밝혀 나간다. 범죄는 범죄인데 중범죄는 아니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피의자로 연루된 사건이다. 범행도 심각하다기.. 더보기
인터액티브 영화의 시작?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스포일러 있음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다섯 번째 시즌이 신기한 시도를 했다. 12월 28일 공개된 첫 에피소드 제목은 '밴더스내치'. 사실 '블랙 미러'는 항상 신기한 이야기이긴 한데, '밴더스내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형식이 신기하다. '밴더스내치'는 간단히 말해 인터액티브 영화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영화가 시작하면 '밴더스내치'가 인터액티브 영화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리고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 서면 두 가지 옵션 중 10초 내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러므로 항상 선택할 자세를 취하라고 일러준다. 난 집에서 PS4로 넷플릭스를 보았기에, 이 기계에 딸린 듀얼쇼크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시대배경은 1980년대 초반. 주인공 스테판은 '밴더스내치'.. 더보기
마법 대신 가족 로맨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스포일러 있음'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는 대체적 평가대로 해리 포터 시리즈와 그 스핀오프 작품 중에서도 못 만든 편에 속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133분은 그리 긴 상영시간이 아니지만, 이 영화는 유독 길게 느껴진다. 영화가 이렇게 제작된데에는 짐작가는 이유는 있다. 워너브라더스는 '신비한 동물' 시리즈를 격년에 한 편 꼴로, 모두 5편 선보이겠다고 공언했다. 5편의 시리즈를 동력을 잃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선 서사가 유장하고 굴곡지게 이어지고, 캐릭터는 충분한 깊이를 갖출 준비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작진은 '신비한 동물' 2편인 이번 영화에서 그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2편은 1편처럼 신비한 동물들을 등장시키고 그 특성을 현시해 관객의 시선을 모으지 않고, 이렇.. 더보기
'퍼스트맨'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스포일러 조금(그런데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간게 스포일러일까?) 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을 보고 몇 가지. 1. '퍼스트맨'의 초반부 우주 유영 장면에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검고 광막한 우주 공간을 느리고 우아하게 유영하는 비행체의 모습은 모두 스탠리 큐브릭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소심하게 주장한다). 나른하고 아름다운 배경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큐브릭이 우주에서 트랜스 상태로 도달하는 방법은 관념이었지만, 셔젤은 철저히 물질이다. 큐브릭의 우주인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을 한 끝에 제 머리 속의 관념 혹은 외계의 초인간적 존재를 만난다. 하지만 셔젤의 우주인들은 우주선의 예기치못한 사고로 인해 제자리에서 급회전을 하거나 엄청난 진동을 경험하면서 트랜.. 더보기
트라우마와 킬러와 소녀,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포일러 있음'케빈에 대하여'(2011)는 근 10년간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무섭다. 1시간 52분이면 긴 상영시간도 아닌데, 그 시간 내내 온몸이 굳어 있었다. 나중에는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봐도 무서웠다. 이 영화에서 '케빈' 역을 맡은 에즈라 밀라는 이후 어디서 봐도 무서워하게 됐다. 아무리 멀쩡한 역을 연기해도 무섭다. (하긴 멀쩡한 역이 별로 없는 것 같긴 하다) 기자회견이나 팬미팅에서 활짝 웃고 있어도 무섭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린 램지가 '케빈에 대하여' 이후 6년만에 내놓은 영화다.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돼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받았다. '케빈에 대하여'만큼 무섭지는 않지만, 여전히 온몸의 감각을 자극하는 영화다. 조(호아킨 피닉스)는 실종 혹은 납치된 사람을 .. 더보기
짓다만 성, '안시성' ***스포일러 있음. 추석 영화 중 '안시성'을 보았다. 관람전,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전투 장면의 표현 수위가 '12세 관람가'에 맞춰졌기 때문일 것이라 예상했다. 예상은 틀렸다. 전투 장면에선 인체가 크게 훼손됐다. 피가 낭자하진 않았지만, 신체는 여러번 절단됐다. 오히려 '12세 관람가'가 다소 후하게 받은 등급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본의 방향성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대 세계에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쟁영화가 민족주의 색채를 빼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연개소문과의 갈등도 어색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공성전이나 백병전도 잘 연출됐다고 생각한다. 과시적이면서도 흔한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병사들의 동선이나 무기의 위력을 보여주는 연출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9.. 더보기
음악만 들어도,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봤다. 이 영화가 전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보다 못한 평가를 받는다면, 감독 교체(드니 빌뇌브->스테파노 솔리마)보다는 에밀리 블런트의 부재가 더 큰 이유라고 꼽고 싶다. 에밀리 블런트는 전편에서 멕시코 마약 조직 소탕을 위해 투입된 FBI 요원 케이트 역을 맡았다. 케이트는 FBI로는 베테랑일지언정,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에는 신참이다. 카르텔은 잔인무도하기가 세상에 이를데 없다. 이 카르텔에 비하면 '대부'의 마피아는 신사라고 느껴질 정도. 잔인무도한 조직에 맞서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점잖을리 없다. 작전의 책임자인 CIA 요원 맷(조쉬 브롤린)과 '컨설턴트'라고만 알려진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역시 알고보면 잔인무도한 사람들이다. 알레.. 더보기
지속가능하지 않은 승리와 열정 '보리 vs 매켄로' 야구 영화 본 뒤 야구하고 싶은 적은 없다. 축구 영화 본 뒤 축구하고 싶은 적도 없다. 하지만 '보리 VS 매켄로'를 보고 테니스를 치고 싶어졌다. 파란 잔디가 깔린 윔블던 센터 코트를 부감으로 잡은 초반부부터 그런 생각이 든다. 파란 잔디, 하얀 유니폼, 두 코트를 빠르게 오가는 작고 노란 공... 관중들이 숨죽인 사이, 코트를 때리고 튕겨나가는 공 소리가 경쾌하다. 두 플레이어의 재빠른 발소리와 힘겨운 신음 소리. 나도 잔디 코트에 공을 튀겨보고 싶다. 오래전에 테니스를 잠시 배운 적이 있다. 운동에 소질있는 편이 아니라 실력이 쑥쑥 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제일 통쾌했던 순간은 역시 서브였다. 포핸드, 백핸드로 공을 제대로 맞혔을 때도 즐거웠지만, 높게 띄운 공을 상대편 코트로 순식간에 꽂아넣었.. 더보기
투명성의 지옥 '아논'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앤드류 니콜의 '아논'(Anon)을 보다. '아논'이란 '익명'(anonymous)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니콜은 '가타카'(1997)의 작가, 연출답게 비주얼은 유토피아지만 사는 모양은 디스토피아인 미래 사회를 '아논'에서 그린다. '가타카'가 유전자에 의해 계급이 사실상 결정되는 사회를 그렸다면, '아논'은 보는 모든 것이 기록돼 사생활과 익명성을 보장받기 힘든 사회를 그린다. '아논' 속 사람들은 한때 유행하려다 말았던 구글 글래스를 쓴 듯한 인터페이스 속에서 살아간다.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의 이름, 직업 등이 자막으로 나타나고, 노점상의 핫도그를 보면 각각의 이름과 성분이 나타난다. 이런 시각 이미지들은 모두 기록돼, 범죄 수사에 활용되거나 심.. 더보기
커다란 농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스포일러 있음. '아이언맨' 시리즈는 좋다. 자기도취에 빠진 백만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그 주인공이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착해지는 기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헐크'도 좋다. 사실 마크 러팔로의 헐크보다는, 에릭 바나의 헐크가 좋다. 리안의 그 기나긴 헐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난 좋아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처음엔 그 진지함이 지루했는데, 갈수록 진지함이 꼴통스럽게 변하면서 재밌어졌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근래 나온 슈퍼히어로물 중 최고 수작이라 생각한다. '토르' 시리즈는 영화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하지만 크리스 햄스워스의 캐릭터는 잘 구축됐다. 토르는 아이언맨과 다른 차원의 자아도취에 빠진 캐릭터다. 좀 얄미운 아이언맨과 달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더보기
유령을 보는 혹은 보는 척 하는 형사 '리버' 영국의 6부작 텔레비전 시리즈 '리버'를 보다. 영국, 경찰, 티비 시리즈라 했을 때 떠올릴법한 정서는 '우울'이다. '리버'도 다르지 않다. 6부작, 6시간에 걸친 시간동안 내내 우울하다. 주인공이 70년대 디스코 'I love to love'에 맞춰 2인무를 추는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우울하다. 형사 존 리버와 파트너 스티비 스티븐슨이 함께 차를 타고 순찰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곧 스티비는 이미 죽은 사람임이 밝혀진다. 말하자면 리버는 죽은 이를 본다. '식스 센스'의 성인 버전이다. 하지만 '리버'는 '식스 센스'의 아이처럼 유령을 두려워하기보단 주로 짜증과 화를 낸다. 가끔 유령의 멱살을 잡고 두드려 패기도 한다. 다른 사람 눈에는 허공에 주먹질 하는 걸로 비춰지는게 문제긴 하다. .. 더보기
아이돌에 대한 몰입과 거리감 '도쿄 아이돌스' 명성이 자자하던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감독 교코 미야케)를 보다. 소재가 눈길을 끌거니와, 그 소재를 다루는 태도가 좋다. 일본 지하 아이돌과 그들의 팬덤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적절한 비판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소재를 장악하는 동시, 그에 대한 거리를 유지한다. 저널리즘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갖기 힘든 태도다. 리오라는 지하 아이돌과 그의 팬덤이 중심이다. 팬덤은 주로 남성이다. 팬의 연령과 직업은 다양하다. 대체로 미혼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리오가 여는 소규모 콘서트에 빠짐없이 나오고, 씨디를 사고 또 사고, 악수회에 참여해 악수와 함께 1분 안팎의 대화를 한다. 리오의 인터넷 방송도 매번 시청한다. 한 팬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려다 실패한 후, 결혼자금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아이돌을.. 더보기
산호초가 죽는다면? '산초호를 따라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를 보다. 열대 바다에서 아름답게 흐느적대는 산호초를 보여주는 자연 다큐멘터리인줄 알았다면 실패. 산호초를 보여주긴 보여주는데, 죽은 산호초를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산호초가 죽은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인간 때문이다. 요즘 들어 '인류세'란 어휘가 점점 더 많이 들린다. 아니, 진작 들렸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모르고. 영화는 '지난 30년간 전세계 산호초의 50%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향후 30년내 모든 산호초가 죽는다'는 자막과 함께 마무리된다. 생명이 죽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고, 알록달록 예쁜 산호초가 아니라 하얗고 검게 변한 산호초의 시신만이 있으면 다이버들이 심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호초가 죽는다는 건 그 이상.. 더보기
이상한 감독, 주연, 투자자, 리뷰어, '서던 리치'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서던 리치: 소멸의 땅'(원제 Annihilation)을 보다. 감독이 '엑스 마키나'의 알렉스 갈랜드라기에 영화가 이상할 줄은 알았는데, 역시 이상하다. 일단 이런 영화 만든 감독이 이상하고, 이 영화 주연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이 이상하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 돈을 댄 투자자가 제일 이상하다. 찾아보니 제작비 추정치가 4000만 달러 정도 되던데, 설마 회수하겠다는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우리는 이상한 영화를 좋아한다. 너무 멀쩡한, 그래서 심심한 영화들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땅을 칠지도 모르지만, 내 돈이 아니니 알 바 아니다. 또다시 헛된 꿈을 꾸는 이상한 투자자들이 나타나길 바랄 뿐. 미국의 한 국립공원 내 등대에 이상한 빛이 떨어진다. 이후 .. 더보기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더 포스트' 오늘 밤에도 어느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방영될지 모르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는 명대사들이 많은데, 최근 발견한 건 이 대목이다. 세관 공무원 최익현(최민식)은 빼돌린 압수품인 마약을 처분하기 위해 건너건너 아는 조폭 최형배(하정우)와 접촉한다. 거래를 위해 만나 몇 잔 술을 걸친 최익현은 최형배의 본관, 파, 돌림자 등을 묻더니 대뜸 자기가 최형배의 고조 할아버지뻘이라며, 할아버지를 봤으면 절을 하라고 큰소리를 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부하 조폭에게 끌려가 몇 대를 쳐맞는다(이 장면에선 '맞는다'기보단 '쳐맞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최형배는 부하를 제지시키고는 말한다. "어이 아저씨.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최익현은 .. 더보기
서사가 아니라 감각,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스포일러 있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서사가 아니라 감각의 영화다.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너무 단순해서 쉽게 요약된다. 말 못하는 청소부 엘라이자가 양서류 괴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끝.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이들의 사랑을 돕거나 방해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동료 청소부 젤다와 이웃집 게이 화가 자일스가 엘라이자를 돕고, 실험실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는 엘라이자를 방해한다. 과학자 호프스테틀러 박사는 그 사이에 끼어있다. 여기에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에게 추근대는, 약간의 변주를 넣었다. 그래서 엘라이자-괴물-스트릭랜드의 삼각 관계가 조성된다. 하지만 이 관계는 기능적으로 보인다.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에게 끌리는 과정이 매끈하지 않을 뿐더러(스트릭랜드가 아내와 섹스하며 아내.. 더보기
전통과 초현대가 공존하는 그곳, '블랙 팬서' 지금 블랙 컬쳐는 쿨하다. ('흑인 문화'보다는 '블랙 컬쳐'가 쿨해 보여서 그렇게 표현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미국 사회의 감수성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블랙 컬쳐는 쿨하고 쉬크하고 모던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블랙 컬쳐는 미국 대중문화의 한 줄기임에는 분명했으나, '주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한국에선 물론이다. 유색인종인 한국인들이 다른 유색인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비밀도 아니니까. 분위기가 바뀐 건 힙합의 인기와 맞물린 듯하다. 지금 힙합은 대중음악의 확고부동한 중심 장르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쇼 미 더 머니'다. 그 서브 컨텐츠인 '언프리티 랩스타'나 '고등래퍼'까지 인기 있으니, 반면 록을 중심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 '탑밴드'는 어땠나.. 더보기
'스타트렉'과 소화가능한 윤리적 딜레마 '스타워즈'는 신화적이고 '스타트렉'은 철학적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금 유보적인 표현을 쓴 이유는, 이 두 시리즈에 대한 팬덤이 너무나 강력해 뭐라고 함부로 말을 보태기가 무섭기 때문이다. 조셉 캠벨이 잘 지적했듯 '스타워즈'는 신화에서 볼법한 오랜 영웅 서사를 담았다.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고귀한 신분과 소명을 깨닫고 머나먼 여정에 나서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난을 당했다가, 결국 극복하고 목적을 성취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여기에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베이더 부자의 오이디푸스 궤적도 엮여있다. 요즘 나오고 있는 시퀄 시리즈에선 고아 소녀 레이에게 루크의 궤적을 따르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조금의 뒤틀림을 줬는데, 이 때문에 팬덤에서는 거센 반발이 있다고도 한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