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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세상,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동화 <피노키오>(파랑새)읽었다. 피노키오는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지는 나무인형' 이야기 정도로 기억되지만, 사실 <피노키오>의 전체적인 정서는 매우 비정하다. 축약되지 않은 판본을 아이에게 읽어준다면 어른이 먼저 당황할지도 모른다. (하긴 많은 옛 동화들이 그렇다. 예를 들어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는 저주를 받아 춤을 멈출 수 없자, 발목을 잘라낸다. 옛 동화에는 이런 고어 신이 비일비재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A.I.>는 <피노키오>를 비튼 영화인데, 덕분에 스필버그의 영화 중 가장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갖게 됐다. 


<피노키오>의 교훈을 요약하면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자'다. 이는 고래의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알려주길 원하는 교훈이지만, 좀 비판적으로 생각해볼만하다. 부모라고 다 좋은 부모인가. 오만과 독선과 아집과 편견에 가득찬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어떻게 자랄 것인가. 또 공부라면 어떤 공부인가. 주변의 사람, 자연과 어울리며 살아가길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저 혼자 살겠다고 타자를 괴롭히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공부인가. 


그런데 <피노키오>에 내재적으로 접근하면, 이런 교훈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긴 하다. 이 가르침을 지키지 않은 피노키오는 상상도 못할 수난을 겪기 때문이다. 피노키오는 부모, 사회, 대타자의 보호를 뿌리치고 자유롭게 살고자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다.


피노키오의 세상은 유혹하는 세상이다. 세상은 잠시도 피노키오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피노키오의 마음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그를 진창에 빠뜨리려고 손톱을 세우고 달려든다. 제페토는 한 벌 뿐인 외투를 팔아 글자 공부 책을 사주는데, 피노키오는 그 책을 팔아버린다. 하필 등교길에 인형극이 열린다는 현수막을 보았기 때문이다. 피노키오는 인형 조종사에게 붙잡혀 땔감으로 쓰일 위기를 맞지만, 오히려 조종사에게 동정을 사 금화 다섯 개를 얻어 돌아온다. 그러나 집으로 오는 길에 눈먼 고양이, 다리 저는 여우가 나타나 다시 피노키오를 유혹한다. 이들은 금화 다섯 개를 수천 개로 불릴 방법이 있다고 꼬드긴다. 몇 번 세상의 쓴 맛을 본 피노키오는 이전처럼 제멋대로 까불지는 않지만, 세상의 음흉함을 알아차릴 만큼 현명하지도 않다. 돈과 생명을 잃을 위기를 몇 차례나 넘긴 피노키오는 마침내 마음을 잡고 몇 달간 학교에 다니는데, 이번에는 친구들이 커다란 상어를 보러 바다에 가자고 유혹한다. 피노키오는 이번에도 세상의 오해와 악의에 노출돼 죽을 뻔 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그러나 그의 수난은 끝나지 않는다. 피노키오는 다시 성실히 행동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전날에 이른다.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는 날을 기념하는 잔치에 친구들을 초대하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학교, 선생님, 책이 없는 '장난감 나라'가 있다는 풍문을 듣는다. 피노키오는 이번에도 유혹에 빠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피노키오는 결국 사람이 된다. 피노키오가 예전의 자신을 닮은 나무 인형을 바라보는 장면을 끝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어느 성인 독자는 수십 년 전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달리, 피노키오의 해피엔딩을 해피엔딩으로 느끼지 못한다. 인형극, 여우, 고양이, 친구, 장난감 나라가 피노키오를 유혹했듯이, 세상은 사람의 약한 마음을 쥐고 뒤흔드는 것들로 가득하다. "신은 작가에게 워드 프로세서를 주셨다. 그리고 악마는 거기에 인터넷을 달았다"는 말은 인상적인 인터넷 속담이다. 내가 블로그에 이 어줍짢은 글을 남기기 위해서도 수많은 유혹의 산을 넘어와야 했다. 쓸데 없는 사이트를 기웃거리는 것은 유혹 축에도 못낄지 모른다. 세상엔 술이 넘치고, 도박장이 깔려 있고, 예쁜 물건도 많다. 얼마 되지 않는 인생, 그것들을 즐기는게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도 숱하게 든다. 내가 수도승도 아닌데, 작은 쾌락을 누릴 시간과 돈은 있는데, 최고의 모범생이 될 필요까진 없는데, 잠깐 장난감 나라를 구경하는 건 괜찮을 것 같은데...


갈수록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질문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