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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자를 위한 삶의 원칙, 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


시간이 없어서 전화로 인터뷰했지만, 직접 만났다면 더 재미있을 법했다. 요즘 만나는 분마다 거창하게 말해서 수행, 가볍게 말해 처세의 방법에 대해 묻곤 한다. 많이 공부하고 생각한 분들은 대부분 나름의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문광훈 충북대 독문과 교수(51)는 신간 <심미주의 선언>(김영사)에서 아내와의 대화 한 토막을 전한다. 책의 일부를 미리 읽은 아내는 “답답하다”고 촌평했다. 남편이 주장하는 ‘심미주의’는 부동산 투기, 명품 구입에 관심 없이 건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조차 “고차원적이거나 허황되거나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문광훈 같은 이는 “희귀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더 희귀한 사람”이다. 문광훈 역시 아내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도 문광훈은 이 ‘무모한 사투’를 멈출 생각이 없다. 선언적이기는 커녕, 세심하고 사변적이며 느릿한 글에 <심미주의 선언>이란 제목을 붙인 것도 그러한 절박한 심정에서 나왔다. 그는 3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지난 40~50년간 정치와 경제가 질적·양적으로 급성장했지만 우리 정신의 풍경은 여전히 척박하다”며 “절박한 마음을 선언의 형식으로 담았다”고 말했다.



문광훈 충북대 교수 /김영사 제공


스탈린의 공산주의, 히틀러의 파시즘 사회는 오늘날 한국 사회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러시아 사상가 니콜라이 베르댜예프의 견해를 빌리자면, 그것은 “인간 영혼의 집단화/국유화”다.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동을 거치며 가치, 사회적 관습이 뿌리내리지 못했고, 이는 역으로 우리의 삶이 외풍에 시달리는 요인이 됐다. 신상품, 부동산, 유행, 속어가 전염병처럼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정의, 평등, 평화, 복지 등 자주 회자되는 사회적 가치조차 피상적으로 다루어진 ‘사이비 사회적인 것’이었다. 이 와중에 ‘개인적인 것의 고유한 가치’는 경시됐다. 설령 개인이 강조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주의적 개인’이 아니라 ‘이기주의적 사인’에 가까웠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말했다. “정치적인 것의 모든 개선은 ‘성격의 고귀화’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페터 바이스도 말했다. “가장 혁명적인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시각이다.” 


사회, 정치에 자신을 열어두되 그것에 포박되지 않는 길은 무엇인가. 문광훈은 이 대목에서 예술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예술경험에서 이뤄지는 감각과 사고의 연마는 비강제적 자발적으로 일어나며, 이 비강제적 자발적 자기변화에는 사회적 변화가 겹쳐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와 공, 개인과 사회의 매개체가 된다. 예술 언어는 개인적이고 특수하지만, 또한 합리적 공공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힌다. 문 교수는 ‘심미적 경험’을 언급한다. “심미적인 것은 대상을 사회과학처럼 직접 설명하거나 진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심미적 경험은, 그것이 삶의 조건을 되돌아보며 성찰케 한다는 점에서 삶을 쇄신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깊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예술은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실천을 직접 유도하지 않는다.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를 바라는 이들에게 예술이란 안이하고 추상적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은 결국엔 점진적이고 느릿하게 삶의 다양한 불평등, 부정의를 철폐하는데 기여한다. “예술이, 그것을 감상하는 나와 우리의 지금 삶을 쇄신시키는 데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있을 것인가?”


문광훈은 책에서 개별 예술작품에 대한 ‘사랑의 궤적’을 남겼다. 공재 윤두서, 상허 이태준, 카라바조, 타티아나 니콜라예바가 연주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5번에 대한 사려 깊은 평론이 수록됐다. 드물지만 고귀하며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오늘날 대중의 큰 인기는 얻지 못하는 작품 목록이다. 그는 “삶은 유일무이성을 갖는다. 그래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귀한 작품의 진수를 접하기 위해선 자기만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가만히 있는 시간,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을 갖는 것. 그는 “좋은 취향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다는 것이고, 이것이 자기 주관을 가진 시민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윤두서는 부유했지만 겨울에도 두 겹의 옷만 입고, 두 끼의 식사만 하고, 노비에게도 꼬박꼬박 이름을 불렀다. 문광훈은 윤두서의 삶을 흠모하지만, 남들에게 윤두서처럼 살라고 훈계할 생각은 없다. “진실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할줄 알아야 합니다. 윤리성의 비윤리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말한 것으로부터 여러 걸음 물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무심함이 윤리적 실천의 핵심입니다.”